66. 잔여물 (8)
벨르아나 오피니어스.
그게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결혼 전 이름이었다.
백작 부인은 크리스나 백작가만큼은 아니어도 지참금을 넉넉히 챙겨 줄 수 있을 만큼 제법 부유한 오피니어스 자작가의 둘째 딸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그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이었다.
그들이 나고 자라면서 배우는 모든 것은 결국 한 가문의 안주인이 되기 위한 것이며,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일은 꿈도 못 꾸거나 정말 말단직에 불과했던 시대의 여성.
심지어 백작 부인은 위로는 잘난 오빠와 아래로는 사랑스러운 막냇동생에게 눌려 기 한 번 못 펴고 산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녀가 크리스나 백작과 결혼한 이후로 더욱 꼼짝도 못 하고 눌려 산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백작은 집안에서 여자가 제 의견을 내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가주가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군림자였으니까.
그래서 백작 부인은 다른 생각을 할 여력도 없이, 평생 배운 대로 집안의 평화가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백작 부인이 아테니아에게 한 행동의 발로는 모두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자신이 한 행동이 대단히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아테니아의 저택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테나, 네가 그간 내게 실망한 것이 있으니… 지금부터 할 내 말은 결국 모두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죄인처럼 계속해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그간 어머니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아테니아였지만, 자식으로서 또 부모의 그런 모습을 보자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따뜻하게 차를 우려낸 찻잔을 어머니의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목도 축여 가면서 말씀해 주세요. 천천히 말씀하셔도, 전부 들을 테니까요.”
엄마랑 딸의 사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다.
그렇게 원망스럽던 어머니가 오늘 한 번 이렇게 편을 들어줬다고 지금과 같은 마음이 드니 말이다.
“…고맙구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울컥한 표정으로 한발 느리게 대답했다.
그녀는 목이 멘 듯, 어딘가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가 차로 목을 적시고는 그제야 말을 이었다.
“너희 아버지… 그러니까, 내 남편. 참… 자기 뜻대로 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지.”
백작 부인이 쓰게 웃었다.
그녀도 이 사실을 몰라서 그간 그냥 산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테니아는 그런 어머니의 말을 묵묵히 들어 주었다.
“참고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다소 강압적인 것 빼고는 바람피우는 일도 없고 가정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이만하면 훌륭한 결혼이라고.”
아테니아의 세대도 크게 유한 편은 아니지만, 어머니의 세대는 더더욱 그러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시대는 이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조였다.
지금도 이혼에 대해 숙덕거린다지만, 백작 부인의 세대는 이혼을 했다고 하면 반 미친 사람 보는 듯한 시선들이 따라붙었다.
물론, 이혼하는 사람도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 했지만.
어쨌든, 그만큼이나 이혼이 드물고 힘든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판국에 말 안 듣는 이들은 매가 약이라느니 헛소리를 하며 부인을 때리지도 않고, 밖에 나가서 사생아를 만들어 오지도 않는 백작은 상대적으로 썩 훌륭한 남편감이 맞았다.
크리스나 백작이 저는 지금껏 가정에 잘하지 못한 게 없다고 여기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적어도, 자신은 위와 같은 개차반들처럼 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백작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기도 했다.
다만 그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을 뿐.
“근데 사실은 그 하나가 힘들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은연중에 생각했단다, 한 번 바람을 피우기는 했지만, 그래도 네 의견을 존중해 주는 듯 보였던 칼스이턴 후작이 남편으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세대에 배운 것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음 세대와 자신이 배운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인지하면서도, 결국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도 그러했다.
게다가, 클라이브는 표면적으로는 더없이 아내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완벽한 남편이었으니 더더욱 백작 부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내게… 이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고, 또 네가 이혼을 하고 받을 수많은 손가락질이 걱정되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한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남자들은 누구나 다들 한 번쯤은 실수한다고 했던 건… 어차피 이혼할 수 없다면 너에게 커다란 충돌 없이 맞춰 사는 방법이라도 알려 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지금 다시 상기시켜 보면, 참으로 잘못된 애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건 행복할 방법이 아니라, 덜 불행할 방법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당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배운 것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가정의 평화였으니까.
그리고 백작 부인의 시대에, 남자가 잠깐 밖으로 도는 일쯤은 커다란 흠도 아니었으니까.
“하나가 괜찮지 않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냥 괜찮지 않은 사람인 걸… 이 어리석은 엄마가 깨닫지 못했어.”
그렇지만 오늘, 제 남편을 보고 있자니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살림 밑천이라니.
백작 부인은 백작의 그 말을 여전히 곱씹지 않을 수 없었다.
저에게도 그 말은 상처였는데, 직접적으로 들은 제 딸에게는 어떻게 들렸을지 생각하면 가슴이 사무쳤다.
“네 아버지가 너한테 그런 폭언을 할 때까지 그냥 지켜만 봤으니, 그건 분명 내 죄야.”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아테니아의 손을 잡았다.
혹시라도 기분이 나쁘거나 뿌리칠까 봐, 망설임이 가득한 손길이었다.
그리고 아테니아가 그 손을 내치지 않자, 백작 부인은 그제야 조금 안도했다.
“미안하다, 테나. 네가… 그런 말들을 듣게 만들어서.”
어머니에게 괜찮다는 말이라도 해서, 저 죄책감에 잠식된 듯한 표정을 나아지게 해 드려야만 했다.
아테니아는 그간 해 온 대로, 맏딸로서의 의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어쩐지 좀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네 아버지의 말대로 얌전히 따르는 게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일이라고 여겼어. 가정이 행복하면 결국 다들 좋아지리라고,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네게도 그것을 강요했어. 이런 못난 엄마라서 너무 미안해.”
아테니아의 얼굴이 마치 아이가 울기 직전처럼 일그러졌다.
“정말 미안하다, 아가. 이제야 네게 사과해서.”
아테니아는 백작 부인이 내뱉은 말을 듣고 나서야, 제가 울 것 같은 기분이 된 이유를 깨달았다.
아테니아가 이혼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그녀가 가족들에게서 처음 듣는 사과였다.
그리고 그게, 실은 아테니아에게 가장 큰 잘못을 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듣는 사과라는 사실이 그녀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감정과 생각들이 너무나 복잡하게 이리저리 엉켜 있었다.
“네가 나보다 나은 삶을 살면, 그걸로 된 거라고 혼자 제멋대로 결론 지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네 아버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구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아테니아의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제 딸을 한쪽 뺨을 감쌌다.
백작 부인은 마치 눈물을 닦아 주듯이, 엄지로 딸의 볼을 매만져 주었다.
“엄마가 착각했어.”
보통의 엄마들은 딸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엄마는… 네가 엄마보다 나은 삶이 아니라, 훨씬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벨르아나도 결국, 보통의 엄마였다.
그래서 그녀는 아테니아가 행복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게 진심임을 너무나 잘 알겠기에, 아테니아는 그날 아이처럼 기어코 펑펑 울어 버렸다.
***
아테니아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펑펑 운 후, 진정되었을 즈음에야 제미니가 말을 전해 왔다.
“아가씨, 사실… 아까 전부터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다른 응접실에 계셨어요. 백작 부인과 아가씨께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말씀드렸더니, 기다리겠다고 하셔서….”
“…뭐? 언제부터?”
제미니의 말에 당황한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택이 작은 탓에, 내부에는 응접실이 단 두 개뿐이었다.
그리고 그 응접실은 모두 1층에 있었다.
소리 내어 울었던 것 같은데, 혹시 그 소리를 발레리안이 들은 것은 아닐지 아테니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 시간쯤 되었을 거예요.”
아테니아가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 하도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을 텐데, 이미 한 시간이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발레리안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함이 가득했다.
“테나, 아가, 진정하렴.”
그런 아테니아를 자리에 도로 앉힌 것은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었다.
“제미니, 우선 얼음과 찬 수건을 가져오거라. 아테니아의 눈가에 남은 부기를 가라앉혀야겠어.”
백작 부인은 어른답게, 상황에 재빠르게 대처했다.
그녀는 제미니에게 지시를 내린 후, 아테니아를 다독였다.
“네가 불쾌하지만 않다면, 내가 나가서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에게 차를 대접하고 있으마.”
“…어머니가요?”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사교성이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사실, 그래서 아테니아가 사교계에 데뷔한 이후로는 크리스나의 사교계 일을 그녀가 많이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낯을 많이 가리는 제 어머니가 직접 나서겠다고 말하니, 아테니아는 그것이 낯설었다.
“물론, 네가 싫지만 않다면. 나도 네 어미로서 작은 일이라도 해 주고 싶다. 정말 별거 아니지만, 내가 나가 있는 동안 눈의 부기라도 좀 없애고 나오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별거 아닌 일이라고 할지 몰라도, 발레리안과 딱 한 번 봤을 뿐인 그녀에게는 큰 결심이었을 터였다.
그것을 알았기에, 아테니아는 어머니의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려요, 엄마.”
“내 말을 들어 줘서 고맙다, 아가.”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그제야 조금 웃었다.
아테니아의 어머니도 그렇게 변화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