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잔여물 (7)
크리스나 백작 저택에 난 난리는 당연하지만 아테니아에게도 전달되었다.
백작 부인이 딸에게 사람을 보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른 가족이었다면 무시했을 터였다.
그러나 제 어머니에게 약한 아테니아는 결국 크리스나 백작저로 달려가고 말았다.
“…클라이브 칼스이턴, 이 망할 새끼!”
아테니아가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클라이브를 욕하며 편지를 손에 붙들고 화를 내는 크리스나 백작이었다.
그것을 통해, 그녀는 곧바로 이 일이 클라이브와 관련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백작의 손에 들린 편지는 클라이브가 보낸 것일 터였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테니아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크리스나 백작에게 물었다.
그 순간, 제 딸을 발견한 크리스나 백작의 두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그가 성큼성큼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아테니아! 지금 당장 가서 클라이브 칼스이턴을 설득해라!”
“여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테니아가 알기로는 지금껏 살며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편지에 아테니아를 보내 주면 지금 이 일을 멈추겠다잖아! 이번 향수 사업이 우리 상단에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서 그래?!”
크리스나 백작이 소리쳤다.
편지에는 클라이브가 제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아리에타 상단의 투자자로서, 상단주와 논의하여 향수에 관한 특허 신청을 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로 인해 백작은 거의 반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이번 향수는 크리스나 상단에서 비밀리에 준비한 제품으로, 상단의 건립 기념일을 맞아 깜짝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리하여 이 향수의 경우, 이미 연구는 지난해부터 시작하여 완료된 데다가 지금은 전부 생산에 들어간 터였다.
그간 들인 연구비도 있었고 재료들을 미리 다 결제하여 준비해 놨기에, 만들지 않으면 어차피 그게 전부 크리스나의 손해인 셈이었다.
그런 상황에 만약 똑같은 향수를 내놓은 상단이 향수 제조 방법에 대하여 특허라도 먼저 신청해 버리면, 크리스나의 경우 그 상단의 허가 없이는 아예 향수를 생산하지도 못할 터였다.
“아리에타 상단이란 건 들어 본 적도 없어! 클라이브 그 자식이 우리 향수 사업을 말아먹게 하기 위하여 어디서 대충 상단 형태를 꾸려서 만들어 온 거라고!”
크리스나 백작이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아리에타 상단은 아테니아로서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즉, 백작의 말대로 클라이브가 돈을 들여 급조한 상단일 가능성이 컸다.
클라이브가 아리에타 상단의 투자자라는 건, 상단을 급조했다는 것을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그런 상단이 제대로 된 상단일 리도 없었다.
즉, 아리에타 상단에는 향수를 대규모로 생산해 낼 능력 따위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클라이브의 행동은 크리스나 백작의 말대로, 크리스나 상단의 사업을 망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네가 재혼만 해 주면 이번 일은 클라이브 그 자식이 알아서 해결하기로 했다.”
크리스나 백작이 아테니아의 어깨를 단단히 붙든 채 말했다.
“이번 향수에 들어간 향료는 하나하나가 금값과 같은 것들이야. 이번 향수 사업이 망하면, 크리스나 상단은 크게 휘청일 거다.”
사업은 실패할 수도 있었고, 성공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평소였다면 크리스나 상단도 사업 하나가 망한다고 해서 휘청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터였다.
무슨 사업을 하든, 대체로 그 사업의 위험 부담까지 계산하여 행동했으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대운하 사업을 맡으면서, 크리스나 상단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나아갔다.
그로 인해 크리스나 백작의 욕심은 산더미만큼 불어나 있었다.
백작은 크리스나 상단의 규모가 제국에서만으로 그치지 않고, 무역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원료 하나하나 비싸지 않은 것이 없는 최고급의 값비싼 향수를 만들어, 클레르폰 제국에서 긁어모은 돈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크리스나 상단이 다소 무리를 했지만, 본래라면 사업의 확장도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귀족들의 습성상, 귀하고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것일수록 더욱 각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크리스나 상단에서 만든 향수는 지금까지 시중에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백작은 이 사업에 기대가 아주 컸다.
그런데 지금 거기에 클라이브가 커다란 제동을 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지금… 사업을 성공시키겠다고 저를 팔아먹겠다는 이야기예요?”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제 아버지가 돈에 미친 것 같은 탓이었다.
“제정신이세요???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 저를 감금하기까지 했어요! 그런 놈에게서 겨우 벗어나 한 이혼이라고요!”
아테니아가 절규처럼 외쳤다.
그러나 그 절규는 크리스나 백작의 귀에 와닿지 않았다.
“내 대에서 크리스나 상단을 망하게 할 수는 없어! 그깟 결혼, 한 번이든 두 번이든 하면 될 게 아니냐! 정 안 맞으면, 이 위기만 넘기고 이혼해도 뭐라고 하지 않으마! 그러니….”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머리를 누가 세게 때린 듯 점차 멍해졌다.
그 순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이가 백작의 그 말들을 끊어 놓았다.
“여보!!! 그만하지 못해요!!!”
응접실 안에 있던 모든 이가 놀라 크리스나 백작 부인을 돌아보았다.
늘 조용하고 유약하던 백작 부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하고 있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평소와 달리 성큼성큼 다가가 놀라 굳은 백작에게서 홱 아테니아를 빼냈다.
“재혼하고 다시 이혼하라고요? 그게 지금 딸한테 할 말이에요?!”
아테니아는 지금의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화를 내 주고 있다니.
지금껏 어머니는 전적으로 아버지의 편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사업에 정신이 빠져도 정도가 있지…! 이혼을 겪으면서 이 애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우리는 그것도 외면한 주제에 유리한 조건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팔려 가듯 재혼하게 만들겠다고요???”
돌연 달라진 어머니의 태도를 아테니아는 이해할 수 없어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딸이 칼스이턴에 가서 어떤 취급을 받겠어요!”
그리고 유약했던 어머니가 이렇게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아테니아는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신, 지금 누구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거야! 여자가 어딜 시끄럽게 집안에서 목소리를 내!”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은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그로 인해 당황했던 백작이 한발 늦게 입을 열었다.
“그럼, 딸자식이 어느 누구한테 물어도 불행한 일을 당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백작에게 지지 않았다.
크리스나 백작은 대단히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다가, 기어코 선을 넘어 버렸다.
“큰딸은 원래 살림 밑천이라고 하는 거 몰라…! 아테니아도 누리고 산 게 있으면 그만큼의 역할을 해야…!”
쫘악!
찰나에 커다란 마찰음이 응접실 안을 울렸다.
크리스나 백작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테니아와 아이레스의 두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나도 할 말이 없지만… 오시어드 크리스나! 당신 같은 인간은 내 딸의 아버지가 될 자격도 없어!”
정작 크리스나 백작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친 백작 부인은 제가 만든 상황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끼기긱.
분명 정면으로 돌아오는 크리스나 백작의 목에서 소리가 났다면, 그런 소리가 났을 터였다.
“당신, 지금 날 때렸나…?”
크리스나 백작은 여전히 상황을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유순하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 때렸다! 어쩔래! 살림 밑천??? 밑처어어언?????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말을 해! 내 딸이 오시어드, 당신 재산이야?!”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마치 그간 쌓아 둔 것이 폭발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결혼 기간 내내 꼬박꼬박 백작에게 존댓말을 하던 백작 부인은 더 이상 이곳에 없는 듯했다.
그리고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기어코, 모두가 저를 보고 있는 앞에서 선언했다.
“당신! 그따위로 살 거면 나랑 이혼해!”
아테니아는 정말이지, 폭탄이 크리스나 저택의 한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기분이었다.
***
한바탕 크리스나 백작저를 뒤집어 놓은 뒤, 백작 부인은 마치 자신의 말을 실천하는 것처럼 짐을 싸서 저택을 나와 버렸다.
“어머니…! 어머니! 어디 가시게요…!”
아테니아의 표정은 당황 그 자체였다.
그녀는 그 상태로 전속 하녀 둘만 데리고 나가는 제 어머니의 뒤를 빠르게 뒤쫓았다.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 나랑 이야기 좀 해요!”
아테니아가 어머니가 아닌 엄마로 호칭하며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팔을 붙잡고 나서야, 백작 부인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엄마, 나 좀 봐.”
아테니아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어머니를 돌려세웠다.
그러나 아테니아와 마주한 순간,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인처럼 푹 수그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너를 보겠니.”
백작 부인이 목이 메는 듯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생각해 보면… 그녀의 어머니는 유약한 사람이었는데도, 단 한 번도 우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러면 엄마는 대체 언제 우는 걸까.
자신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여태껏 많이 울었는데.
아테니아는 돌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좀 더 유해졌다.
“엄마, 나 좀 보고 대화 좀 해요. 나, 엄마한테 들을 말 많잖아요.”
아테니아가 조곤조곤히 제 어머니를 설득했다.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던 백작 부인이 들을 말이 많다는 아테니아의 말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