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64화 (64/111)

64. 잔여물 (6)

“요즘은 크리스나 영애를 만나지 않는 모양이지?”

아테니아와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된 지 일주일이 되었다.

선선대 대공은 여전히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서 머무르는 중이었다.

발레리안에게 아테니아와의 일을 묻는 선선대 대공의 얼굴은 상당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상관하실 일이 아닙니다.”

발레리안이 울컥하여 대답했다.

아테니아가 그렇게까지 말한 판국에, 발레리안이 클라이브를 만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발레리안은 자신을 찾아온 클라이브의 대면 요청을 거절했다.

그렇지만 서로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는 그녀의 말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요즘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든 것이 클라이브의 탓은 아니겠으나, 클라이브 따위를 계기로 하여 아테니아와 이렇게 거리감이 생겼다는 것이 매우 화가 났다.

그러니까 방금 선선대 대공의 말은 이런 발레리안의 타오르는 분노에 기름을 들이붓는 격이었다.

“쯧, 말본새하고는. 그러니 어느 여자가 붙어 있겠느냐.”

그러나 선선대 대공은 당연히 그런 발레리안의 기분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평소라면 발레리안도 원래 저런 사람이겠거니 무시했을 수도 있었다.

아테니아를 급히 돌려보냈던 아침의 일이야, 그녀가 있는데 보이기 싫은 모습을 보여 날카롭게 반응한 것이었다.

사실, 발레리안은 대체로 선선대 대공이 뭐라고 하든 무시했다.

선선대 대공은 정말이지 발레리안의 어린 날부터 지겹게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제가 다른 이에게는 그 누구도 선선대를 대하듯이 하지 않으니,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기분이 나쁜 발레리안은 오늘만큼은 선선대 대공의 말을 그저 넘기지 못했다.

“흥, 그런 것치고는 네놈의 연애도 순탄치 않아 보이는구나.”

물론, 발레리안이 그런 말을 한다고 꿈쩍할 선선대 대공은 아니었다.

도리어 발레리안의 말에 대놓고 코웃음을 친 선선대 대공은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실패한 연애, 루이앙스 공작가의 영애와 맞선이나 보거라.”

쾅.

발레리안이 신경질적으로 제가 앉아 있던 집무실의 책상을 내리쳤다.

그가 굳이 집무실까지 쳐들어와서 제 속을 뒤집어 놓는 선선대 대공을 노려보았다.

“자꾸 절 건드리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발레리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빈켄티우스 가문이 루이앙스 공작가와 완전히 척지길 바라는 게 아니시라면요.”

루이앙스 공작가의 영애와 결혼하느니, 차라리 그들과 원수가 되겠다는 소리였다.

“그렇게만 해 봐라! 내 어디 아테니아 크리스나를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쾅!

발레리안이 아까보다 책상을 더욱 거세게 내리쳤다.

어찌나 거세게 내리쳤는지, 단단한 원목으로 된 책상에 금이 가 있었다.

그의 손이 나무가 갈라진 틈에 긁혀 생채기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피가 나든 말든, 발레리안은 개의치 않았다.

정말이지, 개나 소나 왜 자꾸 아테니아를 걸고넘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들은 뭘 몰랐다.

아테니아가 있어서, 발레리안이 항상 최악까지는 가지 않는다는 것을.

“착각하지 마십시오.”

발레리안이 음산해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빈켄티우스를 망가트리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것 같습니까?”

발레리안이 살면서 빈켄티우스를 아예 무너뜨려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백여 년은 더 된 일이지만, 황가가 저들끼리의 근친상간으로 그 핏줄을 이어 가던 때가 있었다.

지금이야 그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지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근친상간으로 인해 황가에 문제도 많이 생겼더란다.

그리고 그때 황가보다도 더 심한 가문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빈켄티우스였다.

생각해 보라.

지금도 선선대 대공이고 원로들이고 혈통을 따지지 못해 안달이 난 집안이었다.

빈켄티우스는 대대로 자신들의 핏줄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런 이들이 저들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슨 짓인들 못 했겠는가.

혈통에 대한 빈켄티우스의 집착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그 기록은 가문의 비밀 서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만 떠올리면 아무리 백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할지라도, 발레리안은 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

법으로 금지된 일이기에, 더는 그런 행위를 못 한다는 것이 그로서는 너무나 다행으로 여겨졌다.

이 귀족 혈통에 집착하는 미친 집안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더한 짓이라도 발레리안에게 강요했을 테니까.

“어디 저랑 해 보실 테면 해 보십시오. 빈켄티우스의 마지막이 제 손에서 이루어질 터이니.”

빈켄티우스를 증오한 만큼, 발레리안은 가문의 치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만큼 부와 권력을 쌓아 올린 빈켄티우스에 왜 부정과 비리가 없었겠는가.

그저,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큼 빈켄티우스의 힘이 대단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힘이 지금은 발레리안의 손에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그것을 휘두를 줄 몰라서가 아니라, 휘두르기 싫어서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근래 들어 발레리안이 가진 권력과 부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안다면, 그런 사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요즘 따라 자꾸만 그의 한계를 건드리는 자들이 늘어난 탓에, 그가 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 네가 감히, 네 조모의 뜻을 어기겠다는 것이냐?”

발레리안의 말이 허투루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선선대 대공이 표정을 굳히며 발레리안의 조모가 남긴 유언을 들먹였다.

‘너는 부디 네 뜻대로 가문을 이끌어 가거라, 리안.’

발레리안의 할머니가 남긴 유언은 선선대 대공이나 원로들의 뜻에 휘둘리지 말라는 소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그에게 가문을 부탁한 것이었다.

그건 여전히 발레리안의 발목을 빈켄티우스에 붙잡아 두는 족쇄와 같았다.

발레리안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제 조모의 유언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 주던 조모에 이어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이후로 무기력함에 잠식되어 살던 발레리안을 세상으로 꺼내 준 게 아테니아였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사람 좋은 척 가면을 쓰고 살았다.

하지만 사실, 발레리안은 대다수의 일에 감흥이 없었다.

그냥 살아 있기에 숨을 쉬었다.

그랬던 그가 아테니아로 인해 감정을 도로 하나하나 배워 갔다.

그녀를 인식하고 나서 그녀 때문에 기뻐하고 웃고 또 슬퍼했다.

아테니아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아주 많은 순간에 가문과 제 존재에 대한 증오와 미움으로 잠식될 뻔한 발레리안을 구해 냈다.

누군가가 존재하기에, 그것만으로도 벅차오르는 기분.

그런 것은 겪어 본 자들만이 알았다.

그래서 그는 유언보다, 아테니아의 존재 그 자체를 지키고 싶었다.

“선선대께서 만약 테나를 건드리신다면, 저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겁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이 선명한 경고의 뜻을 내뱉었다.

선선대 대공이 크게 흠칫했다.

선선대 대공 또한 발레리안이 빈켄티우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 미움을 제 부인의 유언이 억눌러 가문을 이어 왔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발레리안에게 절대적이었던 그 유언조차도 어기겠다고 할 만큼 아테니아를 마음에 두었을지는 선선대 대공도 몰랐던 것이었다.

발레리안이 그녀와 떨어져 있던 5년 내내, 대놓고 티를 내지 않았으니 선선대 대공이 알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선선대 대공은 단 한 번도 그런 세밀한 관심 따위, 발레리안에게 기울여 본 적이 없었으니까.

선선대 대공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발레리안이 허튼 생각은 하지 말라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물론, 테나를 이 빌어먹을 가문에 끌어들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단언컨대, 이것은 바뀔 일 없는 발레리안의 확고한 진심이었다.

그는 이 저주받은 가문을 제 대에서 끊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니 테나와 저를 떨어트려 놓아야겠다는 그런 괜한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이제 이 가문의 핏줄을 이을 사람은 저뿐이니까요.”

선선대 대공이 처음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음성을 흘렸다.

선선대 대공도, 선대 대공도 모두 제 아내를 잃은 뒤 재혼하지 않았다.

발레리안이 오직 아테니아밖에 모르는 것처럼, 3대는 묘한 부분이 닮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더러 굳이굳이 루이앙스 대공가의 영애와 결혼하라고 하는 것도 우스웠다.

선선대 대공이나 선대 대공이나, 저들의 반려밖에 모르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오늘 일어난 조손의 대치는 그렇게 발레리안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똑똑똑.

그리고 그때, 세바스찬이 발레리안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대공 전하, 세바스찬입니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세바스찬의 목소리에 다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에 발레리안이 들어오라고 명령하자마자, 세바스찬이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지?”

“지금 크리스나 백작가에 일이 생겼습니다.”

발레리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의심의 눈길로 선선대 대공을 쳐다봤다.

“난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선선대 대공이 불쾌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정직해서가 아니라, 굳이 발레리안에게 자신이 한 일을 숨겨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선선대 대공이었기에 아마도 그 말은 사실일 터였다.

그제야 발레리안이 세바스찬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일이 생기다니?”

자세한 것을 묻는 발레리안의 말에 세바스찬이 설명을 늘어놓았다.

“방금 연락받은 것인데, 이번에 새로 생긴 상단에서 크리스나 상단이 조만간 내놓을 예정이었던 향수와 완전히 똑같은 것을 내놓았답니다. 그것도 병의 모양새부터 향까지 단 하나도 틀린 게 없는 제품을요!”

그 순간, 발레리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하나였다.

아테니아를 만나러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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