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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63화 (63/111)

63. 잔여물 (5)

발레리안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듯 호흡을 멈추었다가 뒤늦게 크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 저와… 헤어지자는, 말씀이십니까?”

발레리안은 마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물었다.

그만큼 그는 방금 아테니아의 발언을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 연인은 아니었으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애매한 관계였다.

그리하여 이별이 그들 사이에 어울리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상황을 표현할 말이 그것뿐이었다.

“네, 리안과 제 사이의 관계를 끝내자는 말이에요.

그러나 발레리안이 충격받은 얼굴로 아테니아를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제 뜻을 물리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이런 식으로 아테니아와의 사이가 틀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한 터였다.

“애석하지만, 리안이 내 의사를 끝까지 존중하지 못하겠다면 함께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요.”

발레리안은 어쩔 줄을 몰랐다.

여기서 사과를 한다고 해서, 그가 뜻을 굽히는 게 아님을 아테니아도 알 터였다.

“잠깐, 잠시만요, 테나. 그러니까, 하….”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겨우 이런 일로 아테니아와 헤어지고 싶지 않은 심정은 당연했다.

“저는 지금 리안에게 헤어지겠다며 괜스레 으름장을 놓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당신의 뜻을 꺾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에요.”

아테니아는 말할수록 생각이 확고해지는지, 점점 더 어투가 매끄러워졌다.

“저와 리안의 생각이 어디까지 다른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합의점을 찾을 수 없다면 앞으로도 함께하는 데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테니아는 이미 한쪽이 맞추는 생활을 해 봤다.

그녀가 결혼 후, 칼스이턴 가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맞춘 게 그러했다.

그 결과가 이 모양이었고, 아테니아는 오히려 이제 그들에게 맞추지 않는다며 원망을 들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과거 제 행동이 틀렸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리안이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면 이번 일까지는 저도 당신의 뜻에 따를게요.”

그러니까 아테니아의 말은 다음부터는 발레리안이 그녀의 일을 일방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을 멈추라는 의미였다.

“제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몽땅 리안이 하려고 하지만 않으면, 어느 정도 당신의 도움을 받아들일 생각도 있어요.”

그러나 이 역시 발레리안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은 말이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빈켄티우스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몰이해 같은 것이었다.

발레리안은 본인의 능력 자체도 뛰어난 데다가, 그의 세대에서 빈켄티우스의 유일한 혈통이었다.

선선대 대공이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어쨌든 외부에서 발레리안이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었다.

이 나라에서 빈켄티우스가 하고자 하는 일은 그들이 내뱉은 말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런 삶을 살아온 발레리안에게 아테니아처럼 차근차근 무언가를 해결해야 하는 삶이 이해될 리 없었다.

“…하지만 테나, 당신은 어떤 고생도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발레리안은 재차 아테니아를 설득하고자 했다.

그는 지금 대단히 당황스러웠다.

아카데미 시절의 아테니아는 부유한 가문에서 자란 만큼 무언가를 받는 것에 익숙했다.

즉,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어떤 것을 해 주어도 크게 거부하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아테니아는 그가 알던 그녀와 달랐다.

그 점이 발레리안을 당혹스럽게 했다.

그건 그와 아테니아 사이 생긴 5년이 만들어 낸 착각이요, 공백이었다.

애초에 아테니아는 어린 시절에도 자신의 일은 스스로 척척 해내는 타입이었다.

다만 자기가 판단하기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본디 기억은 사람마다 그것을 저장하는 내용이 달라진다고 했다.

발레리안의 기억은 결국, 그의 시점에서 본 그녀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게 발레리안이 착각하게 된 이유였다.

게다가 5년 동안, 아테니아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아이 때와는 달리, 이제 어른으로서 스스로를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아테니아와 5년을 떨어져 있던 발레리안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5년간의 공백은 그렇게 생겨났다.

“…리안, 왜 당신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아테니아가 한숨을 삼켰다.

사실, 5년간의 착각과 공백은 발레리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시절, 자신과 그가 척척 잘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사랑에 서툰 소년이었던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모든 행동을 좋아했을 뿐이었다.

심지어 발레리안은 5년간, 빈켄티우스 대공이 되어 소년 시절보다도 더한 권력을 누렸다.

그는 모든 일을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었고, 빈켄티우스의 힘을 쓰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발레리안과 마찬가지로, 그와 함께하지 않은 그녀가 이런 점을 알 리 만무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에는 몰이해가 생겨났다.

왜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냐는 아테니아의 말에 답답하기는 발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테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 제대로 시작하지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손가락 끝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그녀가 그것조차 거절할까 두려움이 섞인 움직임이었다.

그가 그렇게 나오자, 아테니아도 마음이 약해져서 결국 발레리안의 손을 맞잡았다.

“리안, 무조건 끝내자는 게 아니에요.”

아테니아가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서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발레리안은 지금의 아테니아가 낯설었다.

“그러니까 서로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거예요.”

아테니아는 이제 첫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서로 맞춰 갈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아닐 수도 있어요.”

그리고 결혼의 실패는 아테니아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했다.

이제 인간관계에 있어 겁 없이 어울리던 그녀는 없었다.

아테니아는 더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녀는 혹시 모를 실패에서 뒷걸음질 치는 중이었다.

또 넘어지기에는, 이미 넘어져 본 경험이 너무 아팠으므로.

“그러니까 우리, 잠깐 생각할 시간을 가져요.”

아테니아는 끝내 제 말을 취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발레리안과 그녀는 어쩌면 시작하기도 전에 끝이 날지도 모를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

클라이브는 지금 잔뜩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아테니아의 저택 앞에는 용병이 늘었다.

그런데 심지어 클라이브를 만나 주기로 했던 발레리안은 그녀가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만남을 보류했다.

오늘 아침에도 도박 빚을 갚으라는 빚쟁이가 칼스이턴 저택에 들이닥친 터였다.

그러나 누구와도 만날 수 없었으므로, 클라이브는 아테니아를 욕하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빚쟁이들을 피해 저택을 뛰쳐나온 클라이브의 앞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 문장도 없는 검은 마차가 섰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황실의 부기사단장 마티어스 레브런트가 있었다.

클라이브도 황실에서 녹을 먹는 관리였으니, 황실 부기사단장인 마티어스와는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다.

그리하여 마티어스를 알아본 클라이브가 의아한 듯 물었다.

“레브런트 경께서 여기는 어쩐 일로…?”

마티어스는 남작으로 클라이브보다 지위가 한참 낮았으나, 황실의 부기사단장이란 직함은 클라이브로 하여금 마티어스에게 경어를 쓰게 만들었다.

“제 주인께서 부르십니다.”

마티어스는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마티어스가 누구의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황태자, 베르나도 클레르폰.

마티어스는 그의 사람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클라이브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어쩌면 황태자가 제 유일한 구원줄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탁.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티어스가 마부석의 창문을 두드리자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마차에는 창문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클라이브는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디로 가든 솔직히 그다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도박장의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닦달당하는 신세가 아니던가.

도박장에 내쳐지는 것만 아니라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마차는 한참을 달렸다.

마침내 마차가 멈춰 섰을 때, 클라이브는 두 눈을 가린 채로 어느 작은 주택 앞에 내리게 되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마차에서 내려 주택으로 들어가는 동안, 클라이브는 저를 안내해 주는 마티어스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답답하지는 않았다.

황태자가 발레리안에게 망신을 당한 일은 이미 수도의 사교계 전체에 퍼져 있었다.

클라이브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황태자가 저를 부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아마도 황태자는 자신을 이용하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어떻게 할 심산 같았다.

클라이브는 그에 기꺼이 응할 셈이었다.

황태자의 뜻을 이루어 주면, 자신도 원하는 것쯤은 요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칼스이턴은 지금의 난감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는 클라이브의 머릿속에, 아테니아에 대한 미안함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방 안으로 들어서자 클라이브의 두 눈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졌다.

“오랜만이군, 칼스이턴 후작.”

그리고 클라이브의 눈앞에는 역시 그가 예상한 대로 황태자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클라이브는 제게 온 기회에 기쁨의 웃음을 애써 숨기며 황태자에게 허리를 숙였다.

클라이브는 이미 황태자가 무엇을 시키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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