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62화 (62/111)

62. 잔여물 (4)

아테니아의 기세가 매서웠기에, 제미니는 후다닥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은 후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고요한 응접실에는 아테니아와 발레리안만 남게 되었다.

“언제부터예요? 저한테 사람을 붙여 둔 게.”

제법 날카로운 아테니아의 분위기에 발레리안이 움찔하며 대답했다.

단언컨대, 그녀는 그를 여러 의미로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실,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오래 언제요.”

아테니아의 추궁에 발레리안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녀는 그가 말할 때까지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테나가 혼자 살게 되신 후부터요.”

“하.”

아테니아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이 깜찍한 남자가 아무리 저를 보호하겠다고 해 놓은 조치라지만, 그녀에게 제 사람을 붙여 놓고도 일언반구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던 것이다.

“그럼, 우리의 결별설이 난 뒤에도요?”

아테니아가 재차 물었다.

발레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침묵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긍정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이 남자가 정말…!”

아테니아는 어이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가 발레리안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드물게 아테니아의 눈을 피했다.

“……아무리 나를 위해서라지만, 다음부터 이런 식으로 나 몰래 일을 처리하면 정말 가만히 안 있을 거예요.”

아테니아가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도로 앉았다.

클라이브와 칼스이턴 그리고 제 가족들까지.

모두가 그녀를 저들 멋대로 하려는 이들뿐이었다.

그러니 발레리안이 사람을 붙여 놓은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다음부터는 꼭 상의하겠습니다.”

발레리안이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니아가 더 화를 내면 어떻게 풀어주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이 일로 더 뭐라고 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진짜 용건은 이어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브한테 영지의 세율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한 거, 취소해요.”

아테니아의 표정이 더없이 강경했다.

그에 발레리안이 멈칫하며 말했다.

“하지만, 테나….”

“리안, 당신이 나를 위해서 그런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진짜 나를 위한다면, 리안이 매번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건 곤란해요.”

아테니아는 단호함을 거두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더더욱 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음을 강조하듯, 다시 한번 말했다.

“나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발레리안의 보살핌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니고요.”

“압니다, 그렇지만 테나의 일을 제가 쉽게 해결해 드릴 수 있는데 손을 놓고 있기가….”

“나는 리안에게 짐이 되려고 당신과의 관계를 이어 가겠다고 한 게 아니에요.”

아테니아가 차분히 제 생각을 꺼내 놓았다.

물론, 그녀의 일은 발레리안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말대로 해결하기 전혀 어렵지 않을 수 있었다.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 대공이니까.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그에게 있어 응석받이 같은 신세가 되기 싫었다.

“설령, 내가 해결하기 힘든 일이라도 도움을 구하기 전까지는 내가 알아서 하게 둬요. 발레리안의 도움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기는 싫어요.”

발레리안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솔직한 말로, 그는 아테니아가 자신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면 그녀가 자신을 떠날 수 없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일순 들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아테니아의 말이 끊어 놓았다.

“다소 어렵게 해결하더라도, 그게 내 방식이고 내 삶인 거예요.”

클라이브가 계속해서 자신의 저택을 찾아온다면 아테니아는 분명 곤란에 빠질 터였다.

아무래도 전 부인과 전남편의 사이인 만큼, 사교계에서 수군덕거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사교계에 나서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사교계에 나가고 싶다고 하면 그녀를 지지해 줄 친구들도 있었다.

“오늘 같은 일로 만약 사교계에서 저를 두고 뒤에서 말을 한다고 하면, 저도 마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예요. 클라이브가 찾아오는 일만 해도 그렇죠. 용병을 늘리거나, 신고를 할 수도 있어요.”

금전적으로 부담은 가겠지만, 아테니아가 용병을 늘린다면 그 삼엄함에 클라이브도 쉽게 다가올 생각은 못 할 터였다.

자금의 문제는 아테니아가 투자를 통해 슬슬 수익을 올리고 있었으니 그것을 좀 더 노력하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브가 저를 찾아온다면, 스토킹으로 신고하여 접근 금지 가처분 신청 또한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물론 클라이브의 작위가 후작인 만큼, 그 과정이 지난하고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전적으로 발레리안에게 의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테니아는 생각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까지 리안에게 떠넘기고 싶지 않아요.”

“…압니다, 그대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들도 있다는 것을.”

아테니아의 말을 들으며 한참을 침묵하던 발레리안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는 서운한 기색이었다.

“그렇지만, 그동안 그대가 고생하는 것을 나는 두고만 봐야 합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도요.”

“그저 가만히 있으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힘들어하면 위로해 줄 수도 있잖아요. 그건 오직 리안,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말뿐인 위로가 무슨 소용입니까.”

“나한테는 그걸로도 충분해요.”

“저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칼스이턴 후작이 당신 근처에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요. 그놈을 떼어 놓기 위해서 세율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습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두 사람 사이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녀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의 손등 위로 제 손을 얹었다.

“리안, 그냥 날 좀 믿어 주면 안 돼요? 내가 클라이브 따위에게 눈을 돌리는 것도 아니잖아요.”

아테니아는 다시 차근차근 발레리안을 설득하고자 했다.

“그대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저도 알아요. 다만, 칼스이턴 후작의 존재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좀처럼 아테니아의 말에 동조해 주지 않았다.

그는 결코 제 의견을 굽히지 않을 듯 보였다.

“…그래서, 기어코 내 일을 당신 마음대로 처리하겠다고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손 위에서 제 손을 거두며 물었다.

이혼하면서, 그 과정에서 무엇이든 그녀의 마음대로 돌아가는 게 없었다.

아테니아를 둘러싼 이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녀를 휘두르려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테니아는 이제 그런 게 질색이었다.

발레리안이 제게 말없이 사람을 붙인 것은 이렇게 저렇게 넘어갔지만, 그녀는 앞으로도 그가 이런 식으로 굴길 바라지 않았다.

“…이번에는 제 뜻대로 따라 주시면 안 됩니까? 제가 매번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발레리안은 발레리안대로 아테니아의 태도가 서운했다.

그가 그녀에게 나쁜 일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결국 아테니아를 위한 행동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까지 반대할 일인가 싶었다.

과한 생각일 수도 있으나 마치,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는 여기까지라고 하는 듯하여 발레리안은 제 앞에 넘지 못할 선이 그어진 기분이었다.

“…이번만 그럴 건가요? 만약에, 클라이브가 리안과 약속을 깨고 또다시 제게 접근하면요?”

발레리안이 칼스이턴 영지의 세율을 해결해 주는 대가로 클라이브와 계약서를 쓴다고 해도, 막말로 위약금은 물어내면 그만이었다.

클라이브가 위약금을 물면서까지 아테니아에게 무언가를 바라서 재차 접근하면, 결국 발레리안이 내건 계약서는 무용지물이 된다는 의미였다.

“그건 그때 가서….”

아테니아가 냉정하게 발레리안의 말을 끊어 냈다.

“그때 가서 또, 리안이 다른 방식으로 개입하여 일을 해결하려고 하겠죠. 내 말이 틀린가요?”

발레리안이 침묵했다.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아테니아의 말마따나 그는 다시 그녀를 도울 수단을 강구하게 될 터였다.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거잖아요. 말했다시피, 나는 리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내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당신이 해결해 줘야 한다면, 그게 짐이 되는 것과 무슨 차이예요.”

“제가 그걸 짐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요?”

“네, 그렇더라도요.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요.”

또 같은 말이 반복되었다.

사실 두 사람 다 어린 날부터 서로를 워낙 좋아하여 서로에게 맞춰 주었을 뿐, 고집이 센 이들이었다.

그런 판국에 아테니아나 발레리안 둘 중 누구도 의견을 굽히지 않으니, 같은 대화가 끝나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칼스이턴 후작을 그대에게서 떼어 내야겠습니다.”

결국, 발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언했다.

그로서는 정말 처음으로 아테니아의 의견을 완전히 듣지 않겠다고 한 셈이었다.

“…내 일인데 내 의견을 무시하겠다는 거예요?”

전에 없던 발레리안의 행동에 아테니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이 차분히 설득한다면 제 뜻을 들어주리라 여겼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그가 쭉 그래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강경하게 말했음에도 발레리안이 그의 뜻대로 하겠다고 하자, 아테니아는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울컥했다.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테나를 위해서….”

“그만해요.”

아테니아를 위해서.

발레리안이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말은 그녀를 제멋대로 휘두르고 싶어 하던 이들이 무수하게 아테니아에게 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는 듣기 싫은 마음을 감추지 않고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만약 당신이 기어코 당신의 뜻대로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요.”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아테니아가 단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 관계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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