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잔여물 (2)
“…그, 그게. 일이 좀 있었어.”
클라이브는 아테니아의 말에 제대로 답하지 않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는 무언가에 초조한 듯, 손을 달달 떨면서 엄지손톱끼리 부딪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하아, 아니 됐다. 내가 이걸 너한테 왜 물어보고 있는지.”
아테니아에게 클라이브는 정말로 밉고 미운 상대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가 그녀를 진심으로 대했든 대하지 않았든, 아테니아의 기억 속에 남은 추억이 모두 나쁜 것으로 변해 버리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누군가에게 배신당한 순간, 배신감을 느끼는 이유가 그러하지 않은가.
배신한 상대를 그저 미워하면 그만일 텐데, 배신당한 이들은 그것을 아파한다.
그건 나쁜 기억이 좋은 추억을 온전히 끊어 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가 반사적으로 클라이브에게 질문을 건넸다가, 말을 그만뒀다.
“가. 너랑 나랑 대화하고 있을 사이 아니잖아.”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에게서 뒤돌아서며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클라이브라는 폐기물 덩어리까지 제 속에 얹고 싶지는 않았다.
“잠깐, 잠깐, 잠깐만…!”
그 순간, 클라이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잠깐이라고 하잖아…! 너, 이대로 가 버리면 빈켄티우스 대공가로 갈 거야!”
그제야 아테니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클라이브가 알고 저러는지 모르고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현재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는 선선대 대공이 있었다.
그런 판에 클라이브가 들이닥쳤다가 선선대 대공을 만나기라도 하면, 발레리안이 얼마나 난감해지겠는가.
“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아테니아가 경멸조의 싸늘한 말투로 클라이브에게 물었다.
그녀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가 따박따박 쏘아붙였다.
“바람피운 것도 모자라서 날 감금까지 하더니,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크리스나 저택에 들이닥치질 않나….”
그간 있었던 일을 늘어놓을수록 아테니아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커졌다.
“발레리안과 내가 내연 관계였다는 헛소리를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날 석녀라고 소문내기까지 하더니!”
그도 그럴 것이, 그간의 클라이브가 벌인 만행들이 워낙 하나같이 질 나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짓의 대상이 된 아테니아가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 놓고 이제는 뻔뻔하게 또 날 찾아와?! 네가 날 볼 일이 뭐 있다고 찾아와!”
“그… 그건!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 봐, 아테니아, 테나, 여보… 억…!”
아테니아가 순간 퍽 소리가 날 만큼 클라이브의 정강이를 후려 찼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폭력을 싫어했다.
그 싫어하는 행동을 클라이브와 같이 있으면 자꾸만 하게 된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그가 더 싫었다.
“누가 네 여보야! 당장 내 저택 앞에서 꺼져…!”
아테니아가 참다가 못해 소리쳤다.
그러자 클라이브가 다급하게 외쳤다.
“나 돈 좀 빌려줘!”
“…뭐?”
아테니아는 그 찰나에 뇌가 정지된 기분이었다.
클라이브의 상태가 안 좋아 보이기는 했지만, 단언컨대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너 그래도 나랑 이혼할 때 네 지참금 고스란히 들고 가서 돈 좀 있잖아, 그렇지?”
클라이브는 마치 아테니아가 마지막 희망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녀는 일순 어이가 없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마치 정말로 그녀에게서 돈을 얻어 낼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것인지 용병들에게 붙잡힌 채로 더더욱 매달려 왔다.
“당장 갚아야 할 돈이 있어서 그래. 이것만 갚고 나면 내가 따블, 아니 따따블로 불려서 돌려줄게…!”
클라이브가 충혈된 눈으로 밝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반드시 돈을 갚을 수 있으리라고, 아니 그보다 더한 돈을 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만 같았다.
갚아야 할 돈.
따블, 따따블 같은 단어들.
아테니아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너 혹시… 도박하니?”
아테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클라이브가 곧바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도박이라니…! 그냥 정당한 내기 게임일 뿐이야!”
클라이브는 자신은 절대 도박 따위 하지 않는다며, 거듭 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을 뿐임을 강조했다.
“한 판만 다시 하면 돼. 이번에는 진짜로 내가 이길 수 있어! 저번 판에서도 거의 다 이겼는데, 거기서 하필 그 카드가 나오는 바람에….”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클라이브의 말은 딱 봐도 도박에 중독된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그의 말을 들을수록, 아테니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아가씨…!”
아테니아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이자, 소란에 나와 봤던 제미니가 아테니아를 다급히 붙잡아 주었다.
“아테니아, 잘 들어 봐. 내가 하는 게임이 어떤 게임이냐면… 잘만 하면 본래 건 돈의 100배를 벌 수 있는 건데…!”
클라이브는 충격받은 듯한 아테니아의 반응에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숫제 제 귀를 막고 싶었다.
“그만!”
아테니아는 끝내 참다못해, 클라이브의 말을 막아 버렸다.
그녀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클라이브가 잘 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이런 모습이길 바란 적은 없었다.
그래도 한때, 아테니아에게 위로가 되었고 기쁨이 되었던 사람이었으니까.
훗날 그것이 미움이 되었을지라도… 적어도, 인간답게는 살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테니아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바닥을 찍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울 듯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너, 대체 왜 이렇게까지 됐니….”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의 이런 모습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감금했을 때, 그리고 후에도 반성하지 못하고 헛소문들을 퍼트릴 때.
그때가 클라이브의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이렇게까지 한 사람을 실망하게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돌아가. 더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클라이브.”
아테니아가 클라이브를 외면하며 말했다.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겨우 저런 사람임을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하든 말든, 이미 사실이었지만.
“……그래서, 돈을 안 주겠다고?”
클라이브가 돌변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가 음산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찰나에 홱 아테니아에게로 달려들었다.
지금껏 자세를 낮추며 대화하던 클라이브의 태도에 용병들이 방심하여 그를 놓친 것이었다.
쿵.
그 순간,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한 여자가 클라이브의 팔을 뒤로 꺾어 제압하며 그대로 바닥으로 처박았다.
“꺅! 아가씨…!”
제미니가 놀라 아테니아를 감싸 안았다.
아테니아 또한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크리스나 영애?”
갈색 머리칼에 갈색 눈을 가진,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의 평범하지 않은 여자가 물었다.
아테니아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여자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어디 있다가 나타나신 거죠?”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크리스나 영애를 호위하라고 보내신, 그분 소속의 기사입니다. 이름은 소피아 메르테스라고 합니다. 놀라게 해 드려서 죄송해요. 상황이 급박하여….”
소피아가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단번에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경계의 기색을 지우지 않고 물었다.
“저는 리안에게 당신에 대해 들은 바가 전혀 없어요.”
“…그것은.”
그러나 소피아의 설명은 이어질 수가 없었다.
“아아아아아악!!!!!!!!!!”
소피아에 의해 바닥에 깔려 있던 클라이브가 돌연 미친 것처럼 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아테니아 크리스나!!!”
제게로 이목이 쏠리자, 클라이브가 소리쳤다.
도박은 자신이 한 주제에, 그는 여전히 아테니아의 탓을 했다.
그녀는 기가 막혀 재차 말문이 막혀 버렸다.
“네가 나와 얌전히 재혼만 했어도…! 아니, 그깟 바람 한 번에 유난 떨지 않고 이혼하지만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어!”
클라이브가 마구 발버둥을 치며 발악했다.
그러나 잘 훈련된 기사인 소피아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런 탓에, 그렇지 않아도 그리 좋아 보이지 못했던 그의 옷은 땅바닥의 흙먼지로 더럽혀졌다.
“…하, 메르테스 경. 그놈은 용병들에게 넘기고, 경은 나와 이야기 좀 하죠.”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저렇게까지 바닥으로 떨어진 것에 대하여, 왜 그렇게 사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지에 대해 잠시나마 안쓰러워했던 것조차 접어 버렸다.
클라이브 칼스이턴은 하여간에, 한심한 상대를 향한 안타까움조차 품을 필요가 없는 대상이었다.
그래 봤자, 또다시 아테니아의 탓을 할 뿐이니까.
“예, 크리스나 영애. 제가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소피아가 클라이브의 꺾은 팔을 잡은 채로 용병들 쪽으로 그를 던졌다.
하마터면 의뢰자를 다치게 할 뻔한 용병들이 아까보다 험악해진 얼굴로 클라이브를 거칠게 잡아챘다.
아테니아는 그러든 말든 간에, 더는 클라이브를 신경 쓰지 않고 소피아와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네 탓 맞아…! 네 탓이 맞다고!”
클라이브야 제가 좋아 바람피운 것조차도 아테니아의 탓을 했던 작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녀는 그가 하는 말도 그중의 일환이리라 여겼다.
“너 때문에 황제 폐하께서 우리 가문에 화가 나셔서 보복하셨단 말이야…!”
클라이브가 이어진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