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잔여물 (1)
“…이상해, 리안이 어제오늘 연락이 없어.”
헬레나와 야유를 즐기던 아테니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아직 결별설 이후, 재결합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발레리안과 황태자의 대치를 알았던 날에는 열이 받아 대공가의 타운하우스로 쳐들어갔다지만, 매번 그런 식으로 굴 수는 없었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했고, 아테니아는 그러겠노라 말했으니까.
그러므로 두 사람은 서로의 만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게 옳았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섣불리 발레리안을 찾아갈 수도 없었다.
게다가 선선대 대공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그녀는 괜히 제가 연락을 했다가 발레리안이 아니라 선선대 대공이 그것을 낚아챌까 봐 걱정되어 타운하우스로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지금, 결국 그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중으로 연락하시겠지. 겨우 하루잖아. 너 연애 하는 티 너무 낸다, 테나?”
헬레나가 장난스레 아테니아를 달랬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연애가 뒤로 미뤄졌기 때문에, 현재 그 애매한 상태를 알고 있는 건 헬레나뿐이었다.
물론, 발레리안의 가정사는 그의 개인적인 일이었기에 어제 아침 식사할 때 있었던 일은 말하지 않았지만.
“너도 알잖아, 빈켄티우스의 사람들이 발레리안이 만나는 사람에 대해 예민한 거.”
그래서 아테니아는 헬레나가 아는 사실을 한도로, 최대한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었다.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그토록이나 발레리안의 연예 대상에조차 예민한데, 본디 그들의 주인이었던 선선대 대공이 그렇지 않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만으로도, 헬레나는 선선대 대공의 등장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쯤은 추측할 수 있을 터였다.
“평소의 리안이라면 내가 이렇게 걱정할 거 알아서라도 무슨 연락을 줬을 거라고.”
어제 아침, 빈켄티우스의 요리사들이 타운하우스로 돌아간 이후 발레리안은 내리 연락이 없었다.
선선대 대공의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던지라, 아테니아의 걱정이 무럭무럭 자라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그는 그녀를 걱정시킬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테니아는 겨우 단 하루였어도, 발레리안이 연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그래, 그렇지.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가 너한테는 지극하시지.”
헬레나의 눈이 흐려졌다.
이 자랑인 듯 걱정인 듯 묘한 친구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 줘야 할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그녀는 아테니아와 달리, 정략결혼을 통해 혼인한 경우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선선대 대공의 등장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유리한 일은 아니겠지만, 황제도 이겨 먹던 발레리안이 아닌가.
선선대 대공의 성격을 직접 겪어 보지 못한 헬레나로서는 솔직히 절대 좋다고는 못할 발레리안의 성격상, 그가 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발레리안은 여우처럼 아테니아에게만큼은 그 성격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나는 이미 한 번 이혼한 사람이잖아.”
그러나 아테니아가 침울해지자, 헬레나는 금세 제 친구를 보듬어 왔다.
“네 잘못으로 이혼한 것도 아닌데, 뭐가 흠이라고.”
“그래도 일전에 네 저택에서 다들 그랬던 것처럼, 귀족들이 서로 바람피우는 일이 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다들 참고 살잖아.”
체면, 아이의 양육권, 재산 분할 등, 귀족들은 여러 문제로 이혼 사유가 있어도 억지로 결혼을 유지했다.
사실, 그들 사이에서는 아테니아가 모난 돌이었다.
“나보고 유별나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아테니아도 자신을 두고 조금만 참으면 될 걸, 그렇게 남편이 잘했는데 바람 한 번을 못 참아서 이혼했다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그런 건 전부 당사자가 아니기에 쉽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사람의 시선과 말이라는 게 언제든 그 대상을 칼처럼 찌를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아테니아가 이혼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어느덧 그 시선과 말들에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또, 또 그런다. 허리 펴. 네가 뭐 죽을죄를 지었다고.”
찰싹.
어느덧 웅크려진 아테니아의 허리를 헬레나가 가볍게 때렸다.
그토록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자신의 친구가 이렇게 수그러든 것을 보면 헬레나는 저절로 클라이브가 미워졌다.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헬레나가 아테니아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도 아는데, 발레리안은 아무래도 미혼이고…, 또 아무래도 빈켄티우스에서 이미 날 탐탁지 않게 여기잖아.”
아테니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헬레나의 격려가 고마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자꾸만 밀려드는 생각을 아테니아는 어쩌지 못했다.
“그들이 날 못마땅해하는 점에 이혼했다는 이유도 크게 작용하리라는 걸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자꾸 이렇게 움츠러드네.”
아테니아는 새삼, 이혼한 귀부인들이 왜 재혼은커녕 연애조차 쉽게 하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는지 느끼게 되었다.
잘못한 게 없어도, 놓인 상황들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나마 아테니아는 자식이 없다지만, 아이가 있는 귀부인들은 더할 터였다.
전남편이 아이를 키운다고 할지라도, 아이를 완전히 손에서 떠나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또 그 상태로 전남편의 아이와 새로운 남편, 혹은 연인 사이를 오가자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닐 터였다.
그렇다고 아이를 나 몰라라, 완전히 놓아 버릴 수도 없을 테니 이혼한 귀부인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혼자가 되는 건 너무 서글프지만 어쩔 수 없게 느껴졌다.
“이혼이 죄도 아닌데… 내가 이런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어.”
아테니아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부유한 친정과 좋은 머리, 부족한 것 없는 외모, 적당한 사교성.
그녀는 이미 결혼 전에도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이혼 이후에도 자신이 충분히 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겨우, 그녀의 삶에 클라이브라는 존재가 없었다가 있었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아테니아는 그것이 자신의 오판이었음을 깨달았다.
결혼과 이혼은 그녀가 겪어 온 모든 세계를 바꾸고, 또 다시 뒤엎는 일이었다.
“…불행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야.”
말을 할수록, 아테니아는 울적해졌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내연녀와 저에 관한 뒷담화를 하고 있던 남편과 어떻게 다시 이전처럼 하하 호호 웃으며 산단 말인가.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행동의 계기가 옳다고 해서, 그 결과까지 좋게 따라오리란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아테니아….”
헬레나가 안타깝게 아테니아를 바라봤다.
하필, 왜 클라이브 같은 놈과 제 친구가 얽혀 이런 일을 겪는 것인지.
한없이 안타까웠으나 도와줄 방법이 없어, 헬레나의 마음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야유는 썩 상쾌하지 않게 끝이 났다.
***
그러나 아테니아의 상쾌하지 않은 하루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가 자신의 저택에 내리는 순간, 누군가 그녀를 불러 왔으니까.
“아테니아!”
물론, 그 누군가는 아테니아가 자신의 저택 문앞에 세워 둔 용병에 의해 그녀에게 다가오는 것을 저지당했지만.
“아테니아, 나야!”
어느덧 주위에는 어둠이 내려 주변이 식별 가지 않았다.
상대는 마치 아테니아가 자신을 당연히 알아보리라는 듯, 제 존재를 주장했다.
그녀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어둠 속에서 용병들이 붙든 사람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누구… 클라이브?”
아테니아는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라이브의 행색이 그녀가 알고 있던 바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또 본판이 나쁘지는 않은 데다가 본래 본인을 워낙 잘 꾸미는 유형이었다.
그리하여 클라이브는 어딜 가든 제법 훈훈하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깔끔한 외형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완전히… 폐인 같은 행색을 하고 있었다.
깎지 않은 수염과 퀭한 눈 밑, 푸석푸석한 피부가 클라이브를 귀족으로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테니아, 우리 대화 좀 하면 안 될까?”
클라이브는 다소 비굴하기까지 한 말투로 아테니아에게 말했다.
살도 빠진 것인지, 용병들과 대조되어 오늘따라 그는 더욱 왜소해 보였다.
“응? 너한테 무슨 짓 하려는 거 아니야. 봐, 나 기사들도 안 데려왔어!”
클라이브는 자신의 무해함을 주장하기 위해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럴수록 그의 행색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와서, 아테니아의 표정은 점점 더 이상해졌다.
클라이브의 옷차림은 최소 두 달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늘 유행에 민감했던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너, 꼴이 대체 왜 그래?”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클라이브에게로 다가갔다.
비록, 그가 전에 자신을 감금한 바가 있어 용병들에게 놓아주라고는 말하지 않았으나…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클라이브의 남루한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집안 사정이 좀 안 좋아서….”
클라이브는 용병들이 듣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도 모른 채로 대꾸했다.
그는 어떻게든 아테니아가 저택으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보였다.
“집안 사정이 안 좋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테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크리스나와 계약이 깨졌어도, 칼스이턴은 여전히 부유한 가문이었다.
비옥한 영지에서 나오는 수익도 있을 텐데, 칼스이턴이 어떻게 두 달 만에 사정이 안 좋아질 수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