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자기기만 (7)
아테니아가 가자마자,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을 향해 세운 날을 누그러트리지 않고 물었다.
“선선대께서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할아버님이나 전하도 아닌 선선대.
그게 본디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을 부르던 호칭이었다.
사실, 어린 날부터 발레리안이 선선대 대공을 할아버님이라고 부른 적은 거의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 네놈이 어쩐 일로 나를 할아버님이라 부르나 했지.”
물론, 선선대 대공도 그 호칭에 어떤 감흥이 있어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코웃음 칠 뿐이었다.
“꼴에 흠모하는 이의 앞이라고 되바라지게 보이고 싶진 않은 모양이구나.”
심지어 선선대 대공은 마치 발레리안의 속내가 빤하다는 듯 빈정거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알고 있겠지.”
혹시라도 꿈꾸지 말라는 듯, 선선대 대공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크리스나 백작가로는 안 된다.”
선선대 대공의 입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매일 했던 것처럼 날 선 말이 흘러나왔다.
“네 어미의 그 반쪽짜리 혈통을 지우려면, 너라도 제대로 결혼해야 하지 않겠….”
쾅!
발레리안이 그 순간 참지 못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그 입에…!”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동시에 높아졌다.
“그 입에 감히, 내 어머니를 올리지 마시죠. 내 어머니가 누구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발레리안의 두 눈에 새빨갛게 핏줄이 섰다.
그의 흉곽이 분노에 찬 호흡으로 인해 팽창했다.
“그건 네가 변변치 않은 놈이어서 그런 것 아니냐.”
그러나 선선대 대공의 입에서 태연하게 뱉어진 말에, 발레리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 발레리안은 애석하게도 저 악의 어린 말에 또 심장 한구석에 통증을 느꼈다.
어린 날부터 무수하게 들어 온 말이었다.
이쯤이면 익숙해질 만도 했는데, 여전히 괜찮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 그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머니는 저를 위해 무리하다가 죽었다고.
‘너 때문이야!’
어린 날, 발레리안을 외면하던 그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가, 악에 받친 소리를 선선대 대공에게 내뱉었다.
“그렇게 따지자면, 할머님께서 돌아가신 건 선선대께서 지은 죄가 아닙니까?”
그 순간, 이번에는 선선대 대공의 표정이 매섭게 굳었다.
발레리안 할머니의 죽음.
그것은 아직 정정하던 선선대 대공이 대공의 자리를 제 아들에게 물려주는 계기가 된 일이었다.
“어딜 네 조모를 들먹여…!!! 네 조모가 누구 때문에…!”
선선대 대공의 두 눈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왜요, 그것도 저 때문이라고 하실 겁니까?”
그러나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을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를 상처 줄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놈이, 그래도…!”
선선대 대공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탁.
“애석하게도, 제 연인이 제가 맞는 걸 싫어해서요.”
그러나 발레리안은 이번만큼은 맞아 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선선대 대공의 손목을 굳건하게 잡고 있었다.
아테니아가 그렇게 말하고 갔으니까.
그래서 발레리안 더는 맞아 줄 수 없었다.
“이 건방진 놈! 네놈이 날 막아?!”
발레리안이 때리려던 제 손을 잡아채자, 선선대 대공은 노발대발하여 날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선선대 대공이 정정하다고 한들, 한참 젊은 시절을 보내는 발레리안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게 싫으셨으면!”
발레리안이 홱 하니 선선대 대공의 손을 내쳤다.
“내게 이 빌어먹을 자리를 물려주지 마셨어야죠.”
선선대 대공과 발레리안의 다툼에 고용인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예전 같았으면 불같은 성격을 가진 선선대 대공의 말을 어쩔 수 없이 따랐겠으나, 발레리안의 말마따나 현재의 대공은 발레리안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이 고용인들에게 아무것도 명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선선대 대공의 분노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버릇없는…!”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의 말에 분기를 터트리면서도, 그와 동시에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선대 대공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토록 화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을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감히…! 감히…!”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선선대 대공은 목덜미를 잡으며 같은 말만 반복할 뿐 어쩔 줄을 몰랐다.
지금껏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것처럼 황제조차 위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만하게 살아온 선선대 대공이었다.
그러니 이런 취급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왜 제멋대로 이딴 자리를 내게 떠안기셨습니까.”
발레리안은 20살이 되던 날, 곧바로 대공 자리에 앉았다.
그것에 그의 의사라고는 단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영광된 자리에 앉게 해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물론, 빈켄티우스에 대한 강렬한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에게 그조차 감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 영광된 자리 선선대께서나 오래 앉아 계셨어야지요.”
물론, 발레리안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자신이 이 자리를 내팽개칠 수 있으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아테니아가 바라는 대로 그녀와 결혼하여, 아테니아를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발레리안은 사업 수단이 좋아 빈켄티우스의 이름이 아닌 사유 재산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불려 놓은 사람이었다.
그는 고작 빈켄티우스의 이름이 아니어도 아테니아를 평생 풍족하게 살게 해 줄 자신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발레리안은 문득 억울해졌다.
“…할머님과 어머니의 뜻만 아니었더라면, 이깟 자리 당장에라도 내다 버렸을 겁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은 툭 하니 말하고 말았다.
정말로, 그를 빈켄티우스에 붙들어 놓은 것들만 아니었더라면 아테니아에게 달려갈 수 있었을 텐데.
속이 쓰렸다.
“하, 네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돌연, 선선대 대공이 입매를 비틀며 발레리안을 비웃었다.
“네놈에게 황위 계승권이 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가 빈켄티우스 덕임을 잊었더냐?”
빈켄티우스는 황제가 발레리안을 경계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임과 동시에, 또한 발레리안을 보호하는 가장 큰 방패였다.
그것만큼은 사실이었다.
“황제에게서 제 한 몸 지킬 방법은 얼마든지….”
그러나 발레리안은 그조차 고맙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지킬 자신 따위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황제와 다툼이 있었다지.”
하지만 선선대 대공은 발레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빈켄티우스가 없었다면, 네가 이번에 아테니아 크리스나를 황제의 마수에서 지켜 낼 수 있었을 성싶으냐?”
선선대 대공은 수도에 있지도 않았던 주제에, 크리스나와 칼스이턴, 그리고 황가와 빈켄티우스가 얽힌 일에 대해 꽤 상세히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발레리안이 풀어 놓은 것이 원로들뿐만은 아니었던지라 아직도 그네들의 주인이 현재 누구인지 모르는 작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당장, 발레리안에게 그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그도 선선대 대공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발레리안이 이번에 어렵지 않게 아테니아를 황실에게서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빈켄티우스의 힘이라는 사실을.
“착각하지 마라. 네놈이 원하는 자유 따위, 절대 얻을 수 없어.”
선선대 대공이 선언하듯 말했다.
“네놈은 평생 빈켄티우스로 살아야 해.”
발레리안은 선선대 대공의 말이 마치 사슬처럼 제 온몸을 옭아매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게 내가 어린 날 쓸모도 없던 네놈을 빈켄티우스에 내버려 둔 이유니까.”
발레리안은 숨이 턱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그가 아테니아를 끝내 놓을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달콤했던 바람에, 발레리안은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음을 새삼 인지했다.
그는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였다.
하필 황위 계승권자이고, 하필 빈켄티우스이고, 하필 저런 조부를 둔.
“아무래도 크리스나 영애가 이 아침에 내 타운하우스에 있었던 것을 보면, 너와의 사이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던데.”
발레리안이 대꾸하던 것이 잠잠해지자, 그제야 선선대 대공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애초에 결별설을 믿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연애 노름만 하고 있을 건 아니겠지?”
선선대 대공이 눈매를 가늘게 뜨며 발레리안을 압박했다.
“네 어미가 얼마나 불행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크리스나 영애를 우리 가문에 끌어들이지 않는 게 옳지 않겠느냐?”
발레리안이 순간 울컥하여 선선대 대공을 노려봤다.
그 시선이 마치, 당장 할 수만 있다면 선선대 대공을 죽여 버리기라도 했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그 불행의 원인께서 하실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나 선선대 대공이 발레리안의 어머니가 죽은 일에 지금껏 단 한 번도 죄책감 따위 보이지 않았듯이, 이번에도 뻔뻔하게 대꾸했다.
“내가 아테니아 크리스나의 불행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면, 연애 놀음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다.”
“당신…!!!”
아테니아를 건드리겠다는 선선대 대공의 말에, 발레리안이 기어코 그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노신사는 아까와 달리 건방지다고 분노하지 않고 그저 혀를 차며 제 손자를 올려다봤다.
“빈켄티우스에 어울리는 며느릿감을 데려와야 할 거다. 그게 너한테도, 네가 사랑하는 여자한테도 좋을 테니까.”
딱.
선선대 대공이 지팡이로 발레리안의 손을 내리쳤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이번에는 피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손에 힘을 풀어 버렸다.
결혼하지 않아도, 아이를 낳지 않아도, 함께하면 좋다고 했다.
아테니아의 말대로 그럴 수 있다면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일순, 다시 자신이 없어졌다.
그의 가문은… 사람을 불행으로 끌어들이는 늪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