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57화 (57/111)

57. 자기기만 (6)

“기꺼이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발레리안에게 제 가족들의 일을, 제 실패한 결혼을 알리고 싶지 않았듯이… 그에게도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터였다.

이제 아테니아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발레리안을 채근하지 않고 기다려 주기로 했다.

“…고마워요, 테나.”

발레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그건 충만감이 차올라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아, 그제야 그는 자신이 얼마나 아테니아를 바랐던가를 모조리 인정했다.

그녀를 위해 그녀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얼마나 오만한 자기기만이란 말인가.

이토록이나, 아테니아를 원했던 주제에.

발레리안이 조심스레 그녀를 안았다.

아테니아도 순순히 이끌려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아테니아를 안은 순간, 세상이 발레리안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그는 오래도록 그녀를 안고 있었다.

***

아테니아가 들이닥친 시간이 저녁이었던 탓에, 그녀는 그날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서 묵게 되었다.

당연하게도 아테니아는 손님방에 머물렀고,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그녀는 늦었더라도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이 영애는 누구지?”

왜냐하면, 아침 식사를 하는 도중에 한 노신사가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고용인들이 그 노신사를 막지도 못하고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게 아테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발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노신사는 희끗희끗한 머리치고는 허리가 곧고 키가 크며 정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발레리안을 닮아, 아테니아는 단번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쯧, 너는 오랜만에 만난 할아버지한테 인사도 하지 않는구나.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노신사는 발레리안의 할아버지이자,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선선대 대공이었다.

그러고 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선선대 대공도, 선대 대공도 살아 있는데 발레리안이 대공 자리를 벌써 물려받았다는 것은.

사실, 20대에 가문의 작위를 물려받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아침부터 불쑥 들이닥치신 분이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만.”

발레리안이 담담하게 선선대 대공에게 반박했다.

“내 집에 내가 온다는데, 네놈이 무슨 상관이냐.”

그러나 선선대 대공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발레리안의 태도에는 일절 관심도 없는 듯, 아테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영애는 누구냐고 내가 물었을 텐데. 스스로 말을 못 하는 건지….”

선선대 대공의 말투가 날카로웠다.

그 안에 드러난 못마땅함에 아테니아가 움찔했다.

“할아버님!”

발레리안이 드물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가 더 분노하기 전에, 아테니아가 앞으로 나섰다.

“아테니아 크리스나라고 합니다.”

“크리스나 백작가?”

선선대 대공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얼굴에 못마땅한 감정이 가득했다.

“크리스나가의 첫째 딸이라면, 얼마 전 이혼한 그 영애가 아니더냐.”

선선대 대공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무례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에 분노한 것은 발레리안이었다.

“세바스찬, 당장 할아버님을 방으로 모셔 가라!”

발레리안이 집사를 불러 곧바로 명했다.

모셔 가라고 했으나, 결국 이 자리에서 쫓아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감히…! 지금 외부인 앞에서 네가 나를 어쩌겠다고? 이 고얀 놈!”

쾅!

선선대 대공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바닥을 찍어 누르며 소리를 높였다.

지팡이라기보다는, 그런 형태를 한 검이었으니 실질적으로 무게가 그리 가볍지 않을 텐데도 적지 않은 나이에 그는 손에 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휘둘렀다.

선선대 대공이 얼마나 정정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내 몸에 손대기만 해 보아라. 천한 네놈 손목을 베어 버릴 테니!”

선선대 공작이 세바스찬에게 으름장을 놨다.

세바스찬은 본디 평민으로, 이전 빈켄티우스의 집사들과는 그 신분이 달랐다.

평민인 세바스찬을 전대 대공비가 데려왔고, 발레리안이 곁에 타운하우스의 집사로 두었을 때 선선대 대공이 얼마나 노발대발했던가.

그러니 세바스찬이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세바스찬에게 선선대 대공은 무서운 대상이었으니까.

아, 알 수밖에 없었다.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자신과 어떤 관계가 되기를 망설였던 이유 중 하나에 분명히 선선대 대공이 있다고 확신했다.

“…당장 나가십시오.”

발레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선선대 대공의 팔을 잡아끌었다.

황제와도 아무렇지 않게 대면하는 발레리안이었건만, 지금은 마치 치부를 들킨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어딜 버릇없게…!”

그 순간, 선선대 대공이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쫘악!

강렬한 파열음과 함께 발레리안의 고개가 사정없이 돌아갔다.

“리안!”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선선대 대공은 이미 발레리안의 뺨을 내리쳐 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숨을 거칠게 씩씩거렸다.

“…하.”

발레리안이 아테니아가 앞으로 나서지 못하게 막아서며, 선선대 대공을 등지고 돌아섰다.

그녀의 시선이 붉어진 발레리안의 뺨에 닿았다.

선선대 대공의 손놀림이 얼마나 거침없었던지, 발레리안의 한쪽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져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테나.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 식사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황이었다.

축객령 같았으나, 아테니아는 울 것 같았다.

왜냐하면… 자신 같아도, 이런 모습을 발레리안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리안.”

아테니아가 손을 뻗어 발레리안의 부은 뺨을 감쌌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게요. 그렇지만….”

뒤에 있는 선선대 대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테니아의 신경은 오로지 부어 있는 발레리안의 뺨에 쏠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번 다시 맞아 주지 말아요.”

아카데미 시절에도 날아오는 검조차 잘만 피하던 발레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정정하다지만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손 하나 못 피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결론은 발레리안이 일부러 맞아주었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아테니아의 앞에서 할아버지와 대놓고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던 것이리라.

무슨 이유인지 그녀도 알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싫었다.

“…네, 그러겠습니다.”

아테니아의 말에 두 눈이 커졌던 발레리안이 미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세워 두고 저들끼리 잘도 속닥거리는구나.”

그리고 그 모습조차도, 선선대 대공은 불만스러웠던 듯 뒤에서 타박이 돌아왔다.

아테니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가 발레리안의 옆으로 비켜서 선선대 대공을 마주했다.

곧바로 발레리안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닿았으나, 그녀는 그의 손을 잡아 줄 뿐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옆에 있었기에 노인이라지만 정정한 선선대 대공이 무섭지 않았다.

“빈켄티우스 경, 오늘 만나 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아테니아가 정중하게 치맛자락을 잡으며 무릎을 굽혀 선선대 대공에게 인사했다.

“저…!”

정중하지만, 그에 대한 존중은 없는 인사에 선선대 대공이 아테니아를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빈켄티우스 대공은 발레리안이었기에, 선선대 대공의 공식적인 호칭은 빈켄티우스 경이라고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대부분 빈켄티우스의 선선대 대공에 대한 경의를 표하기 위해, 전대 대공들을 전하라고 호칭했다.

지금 아테니아는 간접적으로, 선선대 대공에게 존경심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었다.

선선대 대공의 표정이 굳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꾸짖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전하라고 부르는 것이 예외의 일이었고, 아테니아는 정석적인 예법을 따랐을 뿐이니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테니아가 식당을 나섰다.

뒤에 남아 있는 발레리안이 걱정되었으나, 그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

아테니아가 제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저택 안에는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아가씨, 오셨어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아테니아가 도착하자 제미니가 헐레벌떡 뛰어나와 그녀를 마주했다.

“제미니, 이 냄새는 뭐야?”

아테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제미니가 걱정이 되는 건지, 감동을 먹은 건지 애매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가씨가 제대로 식사하지 못하셨을 거라면서, 대공 전하께서 빈켄티우스가의 주방장과 그 아래 요리사들, 그리고 식자재들을 모조리 챙겨 보내셨어요.”

아테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아테니아보다 그녀의 저택에 더 빨리 도착했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는 건, 발레리안이 정확히 언제 명령했는지는 몰라도 거의 선선대 대공의 등장과 함께 사람을 보낸 모양이었다.

“…본인도 식사를 제대로 못 했으면서.”

아테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선선대 대공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아침 식사를 중단하게 된 것은 발레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주방장과 그 아래 요리사들까지 모조리 딸려 보냈다고 한다.

즉, 지금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는 식은 음식을 다시 준비할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제 식사는 이토록 챙겨 주면서, 정작 자신의 아침은 제대로 챙기지 못했을 그가 예상되자, 그녀는 괜스레 속상해졌다.

“우선 식사하세요, 아가씨.”

울적해 보이는 제 아가씨를 제미니가 달래 식당으로 이끌었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그러길 바라셔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내 주셨는데 걱정하느라 제대로 못 드셨다고 하면 마음이 좋지 않으실 거예요.”

제미니의 말이 옳았기에, 아테니아는 순순히 식당으로 향했다.

아무리 그녀보다 먼저 도착했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을 터인데, 발레리안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보냈는지 벌써부터 식탁은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테니아는 기다리지 않고 아침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