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56화 (56/111)

56. 자기기만 (5)

사실, 에스텔라 주점에서의 일만 없었어도 아테니아는 오늘 이렇게 발레리안에게 따지러 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입 맞춘 일은 없던 일로 치부해 놓고 오늘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발레리안의 행동들은 자꾸만, 그에게 마음이 없다면 할 수 없는 것들로 이어졌다.

그러나 마음이 있다면, 에스텔라 주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발레리안 때문에 그녀의 머릿속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다.

“……기억이, 나셨습니까?”

발레리안이 크게 움찔했다.

그는 술 취한 아테니아를 잡아먹을 듯 굴었던 스스로의 행동이 떠올라 멈칫하고 말았다.

“왜요, 계속 두고두고 기억 못 하길 바라셨나요? 없던 일로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움찔한 이유가 숨기고 싶던 것을 들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그녀의 말투가 자신도 모르게 뾰족뾰족해졌다.

“그런 게…! 그런 게 아닙니다.”

발레리안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그는 아테니아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테나, 그날 그대와 입 맞춘 건… 철저히 제 의지였습니다.”

잔뜩 전투태세를 갖추고 왔던 아테니아의 어깨에 순간 힘이 빠졌다.

이 상황에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가 발레리안을 억지로 붙들고 입을 맞춘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날, 어디까지 기억이 나셨는지 모르겠지만….”

발레리안이 차마 아테니아를 마주 보지 못하겠다는 듯,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말을 이었다.

“술에 취한 그대를 놓지 못하고 끝까지 입을 맞춘 건, 저였어요.”

아테니아가 크게 움찔했다.

그제야, 막혀 있던 그 뒤의 기억이 어렴풋하게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제 목덜미와 뺨을 뜨겁게 감싸던 커다란 손,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던 감각, 저를 가두던 그 단단한 품까지… 일순, 많은 것들이 아테니아의 기억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기억보다 선명한 그 찰나의 감각들이 아테니아를 사로잡았다.

“죄송합니다, 그대는 그때 취했었으니 제가 조심했어야 했는데… 제 잘못입니다.”

그러나 발레리안이 사과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붕 떠올랐던 아테니아의 마음은 저 바닥으로 내쳐졌다.

쿵.

소리가 마음에 무겁게 울렸다.

“……후회하시나요?”

한참의 침묵 끝에 아테니아가 물었다.

그녀의 손끝이 긴장으로 곱아들었다.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드레스 자락을 말아 쥔 채, 숨을 죽이고 발레리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발레리안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테니아가 생각하던 최악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테나가 제대로 생각이 불가할 때, 제 욕심을 채웠으니까요.”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마음에 한해서만큼은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더는 제 마음을 부정하기를 그만뒀다.

그녀가 제 대답 하나에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잊었던 기억이 돌아왔을 때, 아테니아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얼마나 혼란스럽고 서글펐을지 미안함이 치솟았다.

그것을 알면서, 그녀에게 상처 줄 수는 없었다.

“…그 말은.”

발레리안의 말에 아테니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결국 매번 감추기만 했던 제 마음을 드러냈다.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테나.”

아테니아라는 존재를 인지하고부터, 아카데미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변한 적이 없던 마음이었다.

발레리안은 그 마음을 마침내 처음으로 입에 담았다.

그녀가 그 순간, 휘청거렸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도 힘이 풀린 탓이었다.

“…테나!”

“잡지 마세요.”

그러나 아테니아는 옆의 소파를 짚고 몸을 바로 세우며 발레리안의 부축을 거부했다.

그가 저를 마음에 두었다는 소리에 온몸이 심장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격한 박동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화가 난 탓이었다.

“그럼 왜 저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날, 대답하지 않으셨어요?”

아테니아가 울분에 차 물었다.

그녀는 홀로 대체 자신과 발레리안의 관계는 무엇이며, 그가 제게 가진 감정이 무엇일지 고뇌하던 모든 날이 바보 같다고 느껴졌다.

분명히, 아테니아가 그렇게 물었던 때가 아니어도 그들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던 순간들은 많았다.

그런데도 발레리안은 그 모든 순간을 넘기고서, 결국 끝내 그녀가 추궁한 뒤에야 마음을 털어놓은 셈이었다.

아테니아는 그런 그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발레리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결국 이번에도 대답을 내놓았다.

“…제가, 테나가 원하는 것들을 줄 수 없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거요?”

“화목한 가정에서 아이들을 낳고 행복해지는 게 테나의 바람 중 하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테니아가 움찔했다.

그건 아카데미 시절, 스쳐 지나가듯 했던 말이었다.

그것을 발레리안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그녀도 몰랐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여전히,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결혼이 실패한 것과는 별개로, 그리고 더 이상 한 가문의 안주인으로만 살고 싶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자신을 닮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가정을 원했다.

클라이브로 인해 결혼에 학을 떼고 나서 재혼할 생각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것이었지만.

“저는 테나를 사랑하지만… 그대와 결혼할 수는 없어요. 설령, 결혼한다고 해도 아이를 낳고 싶지 않습니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가진 이유의 일부만 털어놓았다.

차마, 아테니아의 앞에서 제 가문의 끔찍함에 대해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치고 혐오해 봤자, 그 또한 빈켄티우스였으니까.

“테나, 저는 그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제 마음 하나 가지고, 그대를 욕심내겠습니까.”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행복을 훼방 놓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는… 차라리 죽고 싶을 것 같았다.

“…왜 결혼과 아이가 내 행복의 전부라고 단정 지어요?”

그렇게 발레리안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아테니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마치 결혼하여 아이를 낳지 않으면 그녀가 불행할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겨우 그 정도로 불행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지금 이혼했고, 아이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불행해 보이나요?”

아테니아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물론, 클라이브와의 이혼 과정은 그녀를 행복하지 않게 만들었다.

가족과의 일도 여전히 혀끝에 가시처럼 마음에 걸리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이제 자신만의 평화를 찾았고, 슬슬 하고 싶은 일도 찾아 가는 중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그렇듯이, 많은 요소에 의해 일순간에는 행복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게 불행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

어느 순간에는 행복하지 않지만, 결국 행복을 맞이하면서.

결혼과 아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혼, 하면 좋겠죠. 아이도 있으면 행복할 거고요. 그렇지만 나는 그 외에도 좋아하는 게 많아요.”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해도 아테니아는 아테니아였다.

얼마든지 자신을 위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테니아 크리스나.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이룰 한 가지 요소가 없다고 해서 불행해지지 않았다.

“요즘, 처음으로 투자라는 걸 해 보고 있어요. 교수님들이 왜 제게 취직을 권유하셨는지 알 거 같더라고요. 또, 헬레나와의 사이도 전보다 좋아졌고 다른 친구들과도 잘 지내요.”

아테니아는 조곤조곤하게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늘어놓았다.

“그리고… 근래에 리안, 당신과 함께 한 시간 모두 나는 행복했어요.”

누군가는 아테니아에게 너무 빠르게 마음이 변했다면서 그녀를 비난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마음의 빈틈에 사랑이 파고드는 건 언제나 갑작스러운 사고와 같은 일이었다.

“리안이 있어서, 나는 불행해질 뻔한 순간마다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발레리안이 제멋대로 판단하여 마음고생한 것은 살짝 분했지만, 그래도 그간 그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다.

그러니 아테니아의 마음이 그리는 정답은 결국 하나였다.

“좋아해요, 리안.”

아테니아의 두 눈이 똑바로 발레리안을 직시했다.

아카데미 시절, 소녀가 소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발레리안은 그 시선에 사로잡힌 듯, 아테니아에게서 도저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린 날의 소년도 그랬었다.

실은, 소녀의 고백에 심장이 뛰고 붉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감추었더란다.

그런 마음으로, 소녀의 고백을 거절했던 소년의 심장도 그날 처참히 찢겼었다.

”리안, 당신은 결혼과 아이 외에 날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없나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손을 가만히 잡아 왔다.

아, 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발레리안은 도저히 그녀를 이길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결혼과 아이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 외에도 무수한 문제점이 떠올랐다.

끝없이 자신을 견제하는 황실, 빈켄티우스의 핏줄에 미친 원로와 선선대 대공, 그리고… 아버지까지.

발레리안에게는 무수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이 문제들을 끌어안고 아테니아와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문제들이 자신을 넘어 그녀를 괴롭히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발레리안은 결심했다.

“테나, 그대를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습니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손끝에 긴장으로 인해 힘이 들어갔다.

“테나에게 모두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마음 놓고 서로를 사랑하기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어요.”

발레리안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그런 심정을 드러내듯, 그녀의 손가락에 얽혀 들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분에 넘치는 욕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레리안은 바랐다.

아주, 간절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