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자기기만 (4)
생각해 보면, 황태자의 치기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발레리안이 이런 짓을 해도 결국 황태자는 이렇다 할 보복을 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황제가 아니고,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의 주인이다.
그 차이는 사실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
발레리안도 상대가 황제였더라면,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황실을 대표하는 이와 빈켄티우스를 대표하는 이가 서로 그렇게 굴었다가는 결국 서로의 명예를 위해 결투라도 하지 않고서는 끝낼 수 없을 테니까.
발레리안은 애석하게도 황태자 같은 천둥벌거숭이가 아니었다.
그가 황태자에게 이렇게 군 것은, 설령 후에 황제가 오늘 일을 문제 삼더라도 충분히 잘 해결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발레리안의 대놓고 무례했던 행동조차도, 이성 아래 철저한 계산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의미였다.
어차피 황제는 자식의 체면보다 황실의 이득을 선택할 작자였으니까.
그래서 아테니아는 그의 약점이 될 수 없었다.
귀중한 것이 약점이 되는 건, 그것을 지키지 못할 만큼 나약한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가만히 안 있으면?”
그러므로 지금 황태자는 완벽히 오판한 것이었다.
그의 말은 방금까지 이성적이었던 발레리안의 분노를 샀으니까.
하지만 말은 내뱉으면,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발레리안이 황태자에게 존댓말을 해 주던 것도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어차피 멋대로 말을 낮춘 것은, 황태자가 먼저이지 않던가.
“황태자, 자꾸 잊어버리는 모양인데.”
발레리안이 돌연 픽 웃었다.
아카데미 시절, 그가 가면 쓰고 살기를 그만둔 뒤부터 그의 웃음은 귀한 것이 되었다.
아테니아의 앞 혹은 다른 한 가지 경우만 아니라면, 발레리안이 웃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후자의 웃음을 바라지 않았다.
평소 무뚝뚝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가 아닌 타인을 보고 웃는다는 건, 그만큼이나 화가 났다는 뜻이니까.
“제국에는 황녀 전하도 계신단 말이지.”
지금 여기서 황녀의 이야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황태자는 발레리안이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다.
발레리안은 그 아둔함에 혀를 찼다.
발레리안이 황태자의 아둔함에 노골적으로 혀를 차며 말했다.
“빈켄티우스는 꼭 베르나도 클레르폰이 아니어도 돼.”
그제야 발레리안의 말을 이해한 듯 황태자의 두 눈이 커졌다.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황태자.”
그러나 황태자가 반발할 새도 없이, 발레리안이 말을 덧붙였다.
“과연 황제 폐하께서… 빈켄티우스가 지지하는 후계와 빈켄티우스랑 척진 후계 중 누구를 지지하실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물음이었다.
발레리안은 황태자의 반응도 보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그 불쾌한 자리를 나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감히 발레리안을 붙잡을 수 없었다.
***
쾅! 쾅! 쾅!
그날, 늦은 저녁.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 대문을 시끄럽게 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도어노커를 얼마나 세게 내리치는 것인지, 문지기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손님이 찾아올 리 없는 늦은 저녁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문지기는 그 불청객을 타운하우스 안으로 들여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 상대가, 이 타운하우스의 주인이 유일하게 절절매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크리스나 영애, 이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집사가 다급히 나와 아테니아를 맞이했다.
발레리안이 눈에 띄게 남들과 차별하여 특별하게 대해도, 늘 타운하우스에서 백작 영애 그 이상으로 행동한 적이 없던 그녀였다.
그런 아테니아가 이런 늦은 시간에 이렇게 무례하게 군다는 게 집사로서도 믿기지 않았다.
솔직히 그동안 봐 온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집사는 아무리 발레리안이 연관된 이라고 해도 이 무슨 무례냐고 한마디쯤은 했을 터였다.
“당장 대공 전하 나오라고 해 주세요.”
아테니아가 더없이 강하고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무언가에 매우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흥분한 아테니아를 진정시키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그녀는 제게 다가오려는 집사를 손짓 하나로 막았다.
“대공 전하가 나오지 않으면, 밤을 새우더라도 여기 서 있을 거니까 그렇게 아시라고 하세요.”
아테니아는 자신의 말을 집사가 발레리안에게 전하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하는 태도였다.
결국 난처한 표정을 한 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잠시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고 계셔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그리로 대공 전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귀족 영애를 1층 홀에 마냥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것도 쫓아내지 못할 손님인 이상, 더더욱.
그러니 제대로 된 대접이라도 하기 위하여 집사가 시녀를 시켜 아테니아를 안내하라 일렀다.
“……집사님을 믿을게요.”
고민하는 듯 잠시 멈칫했던 아테니아가 시녀의 뒤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그리고 집사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곧, 막 씻은 듯 보이는 발레리안이 허둥지둥 가벼운 옷만 걸친 채로 응접실에 나타났으니까.
“크리스나 영애, 여기는 어쩐 일로….”
발레리안이 주저하며 아테니아에게로 조금 다가갔다.
그는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했는지, 그의 머리칼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눈이 돌아간 아테니아의 시야에 그런 게 보일 리 없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아테니아가 발레리안과 대조되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발레리안을 지척에 두자마자,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에요?”
아테니아의 목소리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으나, 채 숨겨지지 않은 듯 미묘하게 격앙되어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발레리안은 뜬금없는 아테니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아테니아가 폭발하듯이 따지고 들었다.
“당신이 뭔데 나를 비호하겠다고 황태자랑 싸우냔 말이에요!”
아테니아가 분노로 인해 흥분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어깨가 그에 따라 들썩거렸다.
“클라이브든, 황태자든, 누가 나를 석녀로 하든 말든 간에!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당신이 무슨 상관이라고 끼어들어!”
아테니아는 본디 다혈질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늘 오후에 발레리안과 황태자가 싸웠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참지 못했다.
다퉜다기보다는 발레리안이 일방적으로 황태자를 짓누른 것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그 시발점이 아테니아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정말이지, 그녀를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테니아와 입을 맞춰 놓고도 나 몰라라 한 남자가 아니던가.
그런 남자가 왜 그녀가 없는 자리에서 그녀 대신 화를 내 주고 있는가!
그것도 황족을 상대로!
“아테니아, 잠시 진정하고….”
단언컨대, 아테니아는 아카데미 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발레리안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그녀를 제대로 인지한 뒤에는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전에는, 애초에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 이런 상황을 처음 마주하는 그로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며!”
그러나 아테니아는 더는 참지 않았다.
그녀는 그간 발레리안에게 따지고 싶었던 모든 것을 쏟아 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테니아는 오늘 아주 끝장을 볼 지경이었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가짜 연애니까 끝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자꾸 내 일에 신경 끄질 못하는 건데!”
아테니아는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오늘 하루는 아주 엉망이었다.
첫째는 발레리안이 자신과 입 맞췄음을 알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가 그러고도 모르는 척을 한 탓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조차, 발레리안이 자신 때문에 황족과 싸웠다는 소문이 그 이유였다.
엉망인 까닭 모두 발레리안이 이유가 아닌 게 없었다.
발레리안.
그는 겨우 저런 기억 하나, 소문 하나 그런 것들로 아테니아를 뒤흔들었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는가.
K22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추궁했다.
그 이유라도 들어야 오늘 밤,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행동은 너무 모순적이었다.
헬레나를 포함한 많은 이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행동이 연애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자신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또 그래 놓고, 발레리안은 그녀가 욕먹는 모습을 두고 보지 못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해석하고 정리해야 할지, 아테니아는 매번 고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결코 대답을 해 주지 않을 것이니까.
그렇지만 사실 뻔히 답을 구할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빙빙 돌아가는 건 결국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오늘, 발레리안을 탈탈 털어서라도 어떻게든 답을 들을 생각이었다.
“아테니아, 그러니까, 그건….”
발레리안은 순간 눈앞이 캄캄한 것을 느꼈다.
아테니아의 말이 맞았다.
거리를 두려고 한 주제에, 그 선을 자꾸만 넘고 있는 것은 그였다.
발레리안은 애매한 변명 따위, 이제는 그녀에게 먹히지 않으리란 것을 깨달았다.
발레리안은 이제 자신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판단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 이유만 빼고 자꾸 다른 것을 말하려고 하니 말하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발레리안, 당신 정말.”
발레리안이 이렇게까지 몰아붙였는데도 대꾸하지 않고 망설이자, 아테니아가 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그럼 다른 걸 묻죠.”
이것만큼은 아테니아도 자존심상 묻고 싶지 않았으나, 발레리안의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는 이 질문밖에 없었다.
“에스텔라 주점에서 내가 당신한테 입 맞춘 거, 왜 아무 일도 없었다고 거짓말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