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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54화 (54/111)

54. 자기기만 (3)

아테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가 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것을 깨닫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러 놓고 잊어먹다니!’

아테니아는 그날, 술을 그렇게 퍼먹은 자신을 저주하고 싶었다.

대체 그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혼란으로 엉망이 되었던 아테니아의 머릿속은 강제로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왜?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아테니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기억이 난 것은,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던 순간뿐이었다.

그 뒤로 어땠는지는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설령, 그 찰나에 잠깐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것이라고 해도… 그게 어떻게 아무 일도 없던 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제 입술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나랑 입 맞춘 게 싫었던 건가? 없던 일로 하고 싶을 만큼?’

아테니아가 아는 발레리안은 절대로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약, 그가 자신의 키스에 응했다면 있던 일을 모른 척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테니아의 머릿속에는 발레리안이 그날 제 행동을 거절했다는 가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를 거절했기에, 그녀가 민망하지 않도록 없던 일 셈 쳐 주는 것.

발레리안이 그런 배려를 한 게 아니라면, 그가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아테니아의 낯빛은 이제 완전히 흙색이 되어 있었다.

“…저, 이만 가 볼게요.”

“어… 어, 가게? 다음에 또 와!”

아테니아가 에스텔라의 주인에게 인사한 후 주점을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주인은 갑자기 홀로 얼굴이 붉어졌다가 낯빛이 어두워진 그녀를 보며 어쩔 줄 모르다가 뒤늦게 마주 인사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에스텔라의 주인은 자신이 잘못한 건가 싶어 찜찜한 얼굴로 아테니아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와 결별설이 난 이후, 황태자에게 끌려다녔다.

황태자가 발레리안과의 친분을 과시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황태자의 말 따위 무시해도 상관없었으나… 발레리안은 어쩐지 수도에 조금 더 남아 있고 싶었다.

그리고 수도에 남아, 황제의 귀찮은 견제를 피하려면 황태자와 적당히 어울려 주는 게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황제를 자꾸 힘으로만 눌렀다가는, 무섭지는 않지만 결국 자꾸만 빈켄티우스를 황제가 경계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저번에 그렇게 발레리안에게 말로 당하고도 종종 자제할 줄을 몰랐다.

“형님, 형님의 전 애인이 된 영애가 이번에 봉변을 당했다죠?”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놓아주기 위하여 그녀가 스스로 잘 대처하겠거니, 그렇게 넘기던 주제를 굳이 황태자가 입에 올린 것이었다.

“…그렇군요.”

발레리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기기 위하여 표정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그가 아테니아에게 미련이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곤란해지는 건 그녀였다.

빈켄티우스 대공이 크리스나 영애에게 미련이 있다더라.

그 말이 도는 순간, 권력자의 눈에 들기 위하여 아테니아를 발레리안에게 붙여 주려는 사람부터 그녀를 질시하는 사람까지 많은 이들이 아테니아를 괴롭힐 터였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 살롱에 당장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더라도, 발레리안은 티를 낼 수 없었다.

“칼스이턴 대부인도 그렇고, 칼스이턴 후작도 그렇고 정말 다들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황태자는 아테니아에 관한 주제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칼스이턴 대부인은 크리스나 영애를 두고 집안을 망쳤다고 하더니, 칼스이턴 후작은 영애가 석녀라고….”

쾅!

더는 아테니아와 관계없는 척하려 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황태자가 감히 아테니아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을 두 번은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왜 다들 자기 주제를 모르는지.”

발레리안이 황태자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러나 실은, 그 주변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딱히 작지 않은 목소리였다.

순간, 황태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러나 딱히 발레리안에게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지난번, 황후의 연회에서 발레리안과 정면으로 맞섰다가 그와 부딪히지 말라고 황제에게 주의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 하, 역시 뜬소문은 믿을 게 못 되지요.”

그리하여 황태자는 방금 자신이 말을 꺼낸 주제에, 저는 그 소문을 전혀 믿지 않는 사람처럼 말을 돌렸다.

자존심이 상했으나, 제 아버지인 황제의 말은 무서워하는 황태자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황태자는 어차피 이 정도 도발이야 자신이 늘 해 오던 짓이었고, 그랬기에 제가 이쯤에서 그만두면 발레리안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아시는 분이, 그런 말을 그리 쉽게 입에 올리십니까.”

하지만 발레리안은 이대로 넘어갈 생각 따위 없었다.

그는 원래, 아테니아를 위해 그녀와 연관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방금 보인 황태자의 행동이 발레리안의 생각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발레리안은 황태자가 절대 자신의 말에 수긍하여 물러난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황태자의 표정에 가히 불만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황태자가 물러났다면, 그건 그가 두려워하는 황제의 명령 탓일 가능성이 컸다.

황태자는 그런 인간이었다.

타당한 논리 같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굴복하는 인간.

그래서 발레리안은 황태자를 굴복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헤어진 연인이라고는 하나, 크리스나 영애를 굳이 제 앞에서 언급하신 것은….”

발레리안은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황태자를 쳐다봤다.

발레리안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고, 그가 이렇게 적나라하게 매서운 시선으로 황태자를 대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주변의 모든 귀족이 저들도 모르게 긴장했다.

“크리스나 영애가 아니라, 제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의도하신 게 아닙니까?”

“형님, 무슨 그런 말씀을…!”

황태자가 당황하여 벌떡 일어났다.

발레리안이 오늘따라 적당히 넘어가지 않자, 황태자는 당혹스러우면서도 화가 났다.

“저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한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황태자는 금세 황제의 경고도 잊고 소리쳤다.

“칼스이턴 후작이 크리스나 영애가 석녀라고 떠들고 다니는 걸, 전들 어쩌겠습니까. 후작이 후작 입으로 떠들겠다는…!”

“태자 전하…!”

주변에 있던 황태자의 측근이 그를 말리고자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황태자 전하.”

발레리안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황태자의 말을 끊었다.

“저는 사실 그보다도, 황태자 전하가 걱정되는군요.”

그리고 발레리안의 입에서 정말이지 뜬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잔뜩 흥분해 있던 황태자가 어쩐지 이 상황에서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발레리안의 모습에 멈칫하여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이십니까, 형님?”

“황태자 전하께서 그리 인기가 많으신데도….”

발레리안이 일부러 말끝을 늘어트렸다.

그럴수록 모두의 이목이 쏠렸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께서 원하시는 소식은 들려오질 않으니까요.”

황후가 오래도록 제 아들의 자리를 굳건히 해 줄 아이를 바라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황태자비와 사이가 좋지 않은 황태자는 매번 밖으로만 나돌기 일쑤였다.

그러니까 지금, 발레리안은 황태자더러 지금껏 그 무수한 영애들과 밤을 보내 놓고도 이렇다 할 소식 하나 없는 것이 사실은 황태자의 문제가 아니냐고 지적한 셈이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지금 무슨 헛소리를!”

귀족들의 수군거림에 황태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소문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소문으로 그것을 덮는 일이었다.

화제를 간단히 던져 주기만 해도 말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는 게 사교계였다.

발레리안이 일부러 목소리를 줄이지 않은 이유였다.

“황태자 전하.”

발레리안이 그의 의도대로 잔뜩 흥분한 황태자의 목소리를 끊어 냈다.

“예우받고 싶다면, 제게 제대로 된 예우를 갖추는 것이 좋을 텐데요.”

툭, 발레리안이 앞에 놓인 찻잔을 손가락 하나로 밀어 넘어트렸다.

순식간에 테이블을 타고 흐른 찻물이 황태자의 바지를 적셨다.

“헉…!”

그 순간, 주변의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이렇게- 실수를 할지도 모르지 않겠습니까.”

“이익…! 너…!”

황태자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레리안을 삿대질했다.

발레리안은 앉은 채로 느긋하게 말했다.

“제 이름을 멋대로 부르신 것은 조금 전의 제 실수와 퉁친다고 치고… 방금 너라고 하대하신 건, 어떻게 갚으려고 그러십니까?”

발레리안이 조곤조곤 말했다.

마치 그 말투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를 가르치는 듯하여, 황태자는 더욱 수치심으로 몸을 떨었다.

어차피 지금 일어난 일은, 황태자가 가서 황제에게 애처럼 이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황제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그렇지만 이제, 모조리 귀찮을 지경이었다.

황실의 견제가 성가셔서 일부러 몸을 낮춰 줬더니 황제부터 황태자까지 하나하나 죄다 기어오르는 게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장단을 맞춰 주려고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발레리안은 그간 적당한 말로 그들의 견제질에 무수하게 어울려 주기도 했고, 좋은 말로 경고도 이미 한 터였다.

그게 아니라면 빈켄티우스를 좋아하지도 않는 발레리안이 지난 5년간 무엇 하러 북부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며, 무엇 하러 곧바로 행동하지 않고 지난번 황제에게 경고하는 정도의 대화로 끝내려 했겠는가.

그런데 황실의 인간들은 그 모든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게 안 통한다면 결국 해결 방법은 찍어 누르는 것밖에 더 있으랴.

그러니까 오늘날의 이런 꼴을 자초한 것은 황실이요, 황태자였다.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아테니아 크리스나를 가만히 둘 줄 알아?!”

황태자가 분노로 노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는 기어코 이성을 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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