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자기기만 (2)
칼스이턴 대부인의 입이 강제로 다물리고, 그녀가 곧바로 기절했다.
아테니아의 두 눈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커졌다.
주변에서도 놀라 숨을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신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귀부인의 목을 내리치다니.
덕분에 아테니아의 명예와 체면이 이 이상 상할 일은 없게 되었으나, 남자의 명예와 체면은 생각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잠시 기절한 것뿐이니, 마차를 불러 귀부인의 저택으로 모셔다드리게.”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무렇지 않은 듯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예… 예.”
시종들 또한 이런 귀족은 처음 보았던지, 당황한 태도로 남자의 말을 따랐다.
남자는 시종들과 함께 칼스이턴 대부인을 끌고 살롱을 나갔다.
그 덕에 사람들의 시선이 거기로 따라붙어, 아테니아는 주목받는 상황에서 벗어나 조용히 살롱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뒷수습은 헬레나가 해 주기로 하여, 고맙다는 말을 한 뒤 아테니아는 저택의 입구에서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찾았다.
다행히도, 남자는 아직 가지 않고 이제 막 칼스이턴 대부인을 태운 마차를 보낸 터였다.
아테니아는 혹시라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지 않도록, 시종들이 저택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까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테니아가 왼쪽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재차 인사를 했다.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레이디를 돕는 건 마땅한 신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도 도와주신 덕분에 난감함을 덜었습니다. 혹시 성함을 알려 주실 수 있을는지요? 보답하고 싶습니다만.”
아테니아는 남에게 빚을 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남자는 이번에도 손사래를 쳤다.
“저는 엘리후 에덴트라고 합니다. 사례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니, 크게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아테니아에게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녀가 두 눈을 크게 뜬 채, 다급히 허리를 숙였다.
엘리후 에덴트.
그것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섬나라, 무역 강국 에덴트의 왕자가 가진 이름이었다.
“에덴트 왕국의 2왕자님을 뵙습니다. 저는 크리스나 백작가의 아테니아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에덴트 왕실의 사람들은 대체로 아주 옅은 머리칼에, 푸르거나 녹빛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아테니아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대체로 자신의 사람이 아닌 이에게는 무관심한 탓에, 눈치채는 게 늦은 것이었다.
“그렇게 딱딱하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사절단을 데리고 온 게 아니고 그냥 저 홀로 제국에 놀러 온 것이니까요.”
엘리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아테니아에게 최대한 무거운 왕족의 분위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실제로, 제국의 황실에서도 제가 온 것을 모릅니다. 이 살롱의 주인인 호세아니 남작 부인과 따로 친분이 있어서, 제국에 도착하자마자 살롱으로 왔거든요.”
한 마디로 왕족인 걸 그렇게 티 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테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저에게는 왜?”
엘리후가 자신이 왕족임을 숨기고 싶었다면, 아테니아에게도 굳이 밝힐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을 덧붙여 가면서까지 엘리후가 제 정체를 밝힌 것이 의문스러웠다.
“음… 크리스나 영애에게는 굳이 숨겨 봤자, 아마 소용없을 테니까요?”
아테니아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선문답 같은 대답이었다.
“아마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엘리후가 회중시계를 보며 말했다.
대화 중 시계를 보는 것은 이만 자리를 떠나야 함을 의미했다.
궁금증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를 도와준 사람을 그 이유로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이만 헤어져도 좋다는 뜻으로 말을 꺼냈다.
“제가 바쁘신 분을 너무 붙잡아 뒀네요. 저도 이만 가 봐야 할 듯합니다.”
실제로, 아테니아는 엘리후와 상당히 대화를 나누었다.
발레리안과의 결별설이 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테니아가 사내와 단둘이 있다가 남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예, 그럼 다음에 뵙지요.”
엘리후는 마치, 그들이 꼭 볼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저희가 또 뵐 일이 있을까요?”
아테니아가 굳이 반문한 것은 그 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의아쩍었기 때문이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질문에도 불구하고, 엘리후의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의뭉스레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만약,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저를 엘리후라 불러 주시겠습니까?”
엘리후는 오늘, 아테니아의 은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에덴트의 왕자와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다시 만난다면, 왕자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크리스나 영애. 그럼 다음에 뵙죠.”
엘리후는 아테니아의 긍정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곧, 입구의 앞으로 그가 부른 마차가 도착했다.
엘리후는 마차에 오르면서도 끝까지 아테니아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넨 후 사라졌다.
이상할 정도의 호의와 확신을 보이는 남자였다.
아테니아에게 그때까지 엘리후의 인상은 딱, 그정도였다.
***
살롱에서 예기치 않게 일찍 나오는 바람에, 아테니아는 시간이 붕 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에스텔라 주점으로 향했다.
지난 두 달은 외출을 삼가야만 했기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자신이 취했던 날 주점의 주인이 발레리안에게 연락해 준 덕분에 어쨌든 아테니아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그녀는 지금이라도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에스텔라 주점으로 들어섰다.
“어머, 오랜만이야 아가씨!”
아테니아가 오자마자, 친화력 좋은 에스텔라의 주인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아테니아가 굳이 자신이 귀족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주인 또한 제법 편한 말투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늦게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테니아가 겸연쩍은 얼굴로 주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가 취했을 때, 연락을 주셔서 감사했어요. 덕분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진작에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변명 같겠지만 일이 있어서요.”
“됐어, 됐어. 주점을 운영하다 보면 그런 일은 수두룩해.”
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녀가 힐끔, 아테니아의 뒤를 바라봤다.
“그런데 오늘도 아가씨 혼자야? 리안이랑은 같이 안 온 건가?”
주점의 주인은 발레리안이 빈켄티우스 대공임을 모르는 건지, 혹은 알면서도 편하게 대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를 상당히 친근하게 여기고 있었다.
발레리안이 주점의 주인과 친분이 있다더니, 그 친분이 꽤 깊은 모양이었다.
“음… 그렇게 됐네요.”
대뜸 주인에게 가짜 연애가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아테니아는 그저 웃고 말았다.
“아이고, 둘이 싸웠구먼? 연인끼리 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그러나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눈치가 느는 것인지, 주인은 그것만으로도 둘 사이가 신통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질질 끌수록 오해만 깊어져. 아예 리안을 여기로 불러 줄까? 둘이 한잔하고 털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아테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면 아카데미 시절부터 이번에 한 재회까지, 그래도 꽤 시간이 있었는데 둘이 술 한 잔을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또 못내 아쉬웠다.
“으음… 심각하게 싸웠어? 그날, 둘이 분위기 좋더구먼….”
에스텔라의 주인은 아테니아의 낯빛이 좋지 않자, 멋쩍은 얼굴로 권하던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녀가 주목한 것은 주인의 뒷말이었다.
“…혹시, 그날 저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나요? 제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기억이 안 나서요.”
아테니아가 은근슬쩍 기대를 품으며 물었다.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설령 거짓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 까닭이 있겠지만… 아테니아는 어쩐지, 무언가 찜찜했다.
그녀는 그날 그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 없었든 확실히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글쎄 나야 모르지…? 그날, 리안이 오자마자 칸막이를 쳐 달라고 해서 그 안에 아가씨와 리안만 있었으니까.”
그러나 주점의 주인에게서 돌아온 말은 아테니아의 기대를 무참히 배신했다.
그녀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모르시면 할 수 없죠.”
아테니아의 표정에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에스텔라의 주인이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열었다.
“그…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아가씨가 그날 일을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고 몰라서 답답한 듯 보이니까…. 내가 아는 것만 말해도 될까?”
주인의 말에 아테니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녀로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의 단서라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럼요. 저야 뭐라도 이야기해 주시면 감사하죠.”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고도, 에스텔라의 주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절대 내가 말하는 것의 뜻을 곡해하면 안 돼. 난 오해하거나, 상상하려던 게 아니고 사실을 전달하는 것뿐이니까….”
아테니아의 표정이 점차 묘해졌다.
그녀는 대체 주인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소리를 먼저 하는지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절대 그럴 일 없을 테니까, 아는 게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날, 리안이 아가씨를 데리고 나가는데… 나름 정리하기는 했지만, 아가씨의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어. 그리고, 리안의 얼굴도 잔뜩 붉어져 있었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제가 그날 술을 먹었던 자리를 휙 쳐다봤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이렇게 증명하면 되잖아.’
발레리안의 제복 옷깃을 홱 잡아당기던 제 손길.
그리고 겹쳤던 두 입술.
아주 찰나에, 그날의 생생했던 감촉이 아테니아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