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자기기만 (1)
아테니아의 삶은 평화로웠다.
혹시라도 클라이브가 찾아올까 싶어, 그녀는 자신의 저택을 지켜 줄 용병 몇을 고용했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발레리안을 겁낸 탓인지, 아테니아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와 발레리안은 잘 지내던 연인들이 갑자기 이별했다고 하면 의심을 살 테니, 한 달간 점차 만남을 줄여 갔다.
그러나 이미 서로 위장 연애를 끝내자고 합의를 본 뒤였기에, 만나서도 다정한 말을 건네거나 서로를 챙기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심지어는 만나는 날에도, 서로 오래 함께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결별설이 가십지에 올랐을 때 두 사람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대공 전하.”
“…저야말로. 잘 지내세요, 크리스나 영애.”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마지막 데이트 때 서로에게 건넨 인사는 이게 전부였다.
그 뒤로는 서로 만나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아테니아는 이별한 여자로서 스스로의 사랑을 애도하는 척, 한동안 저택에서 칩거했다.
딱히 답답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그간 하지 못했던 경제학 공부를 다시 손에 잡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칩거 기간, 아테니아는 작게나마 단기적인 투자를 하여 상당한 돈을 벌어들이기도 했다.
크리스나 상단의 서류들을 통해 현재 수도의 경제적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괜찮은 투자처들을 찾아낸 덕이었다.
그녀는 경제학 교수들이 아쉬워했던 학생인 만큼, 투자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아테니아는 이제 있는 돈을 쓰기만 할 게 아니라, 돈을 굴려서 조금 더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그녀가 가진 돈도 낭비하지 않고 적당히 소비하며 살아간다면 귀족 영애 한 명이 평생 쓰기에 부족할 게 없었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제 이혼을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것처럼 인생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다시는 이혼할 때처럼 크리스나 백작가의 도움 없이는 금전적인 난항에 부딪힐까 봐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칩거한 지 또다시 한 달쯤이 흘렀을 때, 아테니아는 오랜만에 외출을 하기로 했다.
헬레나가 이번에 새로 열린 살롱에 초대받았다면서 아테니아와 함께 가자고 제안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헬레나가 가문에서 타고 온 마차로 함께 살롱에 가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 내내 아테니아가 쉬도록 내버려 두었던 헬레나는 그제야 그간 묻고 싶었던 것을 입에 담았다.
“테나, 있잖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헬레나의 조심스러움이 느껴져서, 아테니아로서는 조금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궁금증 해소와 걱정은 그 근원부터가 달라서, 아테니아는 지금 헬레나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이 질문을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공 전하와 진짜로 헤어졌냐고?”
그래서 아테니아는 먼저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예상과 달리, 헬레나가 물으려던 건 그게 아니었다.
“아니, 네가 그런 걸로 농담할 사람이 아닌 건 알아. 그냥… 왜, 헤어졌나 해서.”
아테니아는 잠시 헬레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두 눈을 깜박였다.
처음, 발레리안과의 가짜 연애를 제안한 건 헬레나였다.
그러니 헬레나도 아테니아와 그의 연애가 언젠가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헬레나가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아테니아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가짜 연애니까, 끝나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테니아가 꺼내 놓은 대답은 고작 이랬다.
그러자 헬레나의 미간이 곧바로 찌푸려졌다.
“테나, 너는 왜 이상한 데서 답답하게 굴 때가 있더라.”
헬레나가 제 답답함을 숨기지 않고 푹 한숨을 쉬었다.
“너랑 대공 전하가 한 게 어떻게 가짜 연애야?”
아테니아의 두 입술이 꾹 맞물렸다.
사실, 그건 그녀도 늘 긴가민가했던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이 가짜라기에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대하던 모든 순간이 너무 꿈결같지 않았던가.
마치, 그는 이미 그녀가 원하던 연애가 무엇인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테나, 너랑 대공 전하가 한 게 연애가 아니면 나는 평생 혼자였다~?”
헬레나가 어이없음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다들 대공 전하가 너한테 푹 빠졌나 보더라고 얼마나 수군거렸는데. 남들이 느끼기에도 부러울 만큼 연애해 놓고, 어떻게 그게 가짜야?”
사람들이 괜히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열애설을 믿은 게 아니었다.
솔직히, 초반에는 막 이혼한 그녀가 빈켄티우스 대공과 만난다니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다들 쏙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건 발레리안이 숨기려고 노려해도 채 숨기지 못할 만큼 아테니아를 좋아하는 티를 팍팍 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세간에서 아테니아가 이혼 후 인생을 피고 싶어서 빈켄티우스 대공을 꾀어냈느니, 그런 식으로 속닥거려도 눈앞에 진실이 있는 걸 어쩌겠는가.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관계에서 아쉬운 건 그녀가 아니라 그였다.
다들 그걸 느끼는지라 소문은 결국 쏙 들어가 버렸다.
그 빈켄티우스를 욕하기에는 솔직히, 무섭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말해 봐, 왜 헤어졌어?”
헬레나가 재차 물었다.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헬레나의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왜 발레리안은 이별을 고한 걸까?
아테니아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가 아니니까.
“…아니야, 나와 대공 전하 진짜로 연애한 적 없어.”
그래서 아테니아는 헬레나의 말을 부정했다.
발레리안의 행동을 납득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났으니까, 가짜였던 관계도 정리한 거야.”
아테니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 답답해!”
그러자 헬레나가 답답해 죽을 것처럼 제 가슴을 두들겼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두 사람은 살롱에 도착해 있었다.
“그만 답답해하고 내리자. 어차피 끝난 일이야, 레나.”
아테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헬레나를 달랬다.
당사자들이 끝났다는데, 헬레나가 아무리 답답해 한들 어쩔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한숨을 푹 쉰 헬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테니아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
아테니아와 헬레나 또래의 젊은 남작 부인이 꾸몄다는 살롱은 제법 볼거리가 많았다.
그림부터 시까지, 살롱의 벽면을 이룬 액자들에 쫙 장식되어 있었다.
아테니아는 요즘 문학 쪽으로 투자하는 것에도 관심을 두었던 터라, 살롱을 제법 즐기고 있었다.
“이러지 …시오! 아무리 …이시라고 할지라도 여기… 초대… 분들만 올 수 있는….”
살롱의 입구가 시끄러웠다.
아테니아와 헬레나는 그 소란이 곧 진정되리라 생각했다.
누군가 초대받지도 않고 억지로 살롱에 들어오려고 하는 모양인데, 저렇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으니 창피해서라도 돌아가지 않겠는가.
“어딜 들어가십니까!!!”
그러나 두 사람의 예상은 어긋났다.
불청객은 기어코 입구의 시종들을 뚫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경악 어린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아테니아의 뒤를 덮쳤다.
“아악!”
누군가가 비명을 내질렀다.
살롱의 회랑에서 그림을 보고 있떤 아테니아가 놀라 홱 뒤를 돌았다.
“…칼스이턴 대부인!”
그리고 곧, 아테니아의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칼스이턴 대부인의 몰골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퀭하고 거뭇해진 눈 밑,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 다소 밋밋한 드레스와 어딘가 서투른 화장은 이전의 칼스이턴 대부인과는 완전히 달랐다.
심지어 대부인은 취했는지, 술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테니아에게로 뻗어진 칼스이턴 대부인의 손을 가차 없이 잡아 제압한 남자가 그녀에게 물었다.
대부인의 손 높이를 보아, 아무래도 뒤에서 아테니아의 머리채라도 잡으려다가 남자에게 딱 걸린 모양이었다.
“…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테니아가 왼쪽 심장 위에 손을 얹고 인사를 했다.
구릿빛 피부에 짧은 은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강한 악센트 억양.
그녀는 대번에 남자가 외국에서 온 손님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방금, 아테니아의 인사법은 에덴트 왕국의 것이었다.
단번에 제 출신을 알아보고 그에 걸맞은 예법으로 인사하는 아테니아의 모습에 남자의 두 눈이 순간 반짝거렸다.
“이거 놔! 저년이 우리 가문을 망쳤다고!”
그러나 아테니아와 남자가 서로를 소개할 시간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놓아주자마자, 칼스이턴 대부인이 바락바락 소리를 내질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아테니아와 칼스이턴 대부인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테나…!”
그 소란에 저쪽에 떨어져 있던 헬레나 또한 아테니아에게로 놀라 달려왔다.
“감히 우리 가문을 망쳐 놓고 저는 여기서 희희낙락 놀아나다니! 옛말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더니, 내 진작 저것의 목을 꺾어 놔야 했어!”
칼스이턴 대부인이 길길이 날뛰며 고래고래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는 흡사 광인 같아서, 다들 질린 얼굴로 쉽게 대부인에게 다가가지조차 못했다.
귀족으로서의 체면이고, 최소한의 명예고 모조리 땅바닥에 처박아 버리는 행동이었다.
“당장 이 사람을 내쫓지 않고 뭐 하는 거예요!”
헬레나가 기겁하며 시종들에게 소리쳤다.
아테니아가 여기서 칼스이턴 대부인과 말을 섞어 봤자, 그 또한 그녀의 손해였다.
애초에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아테니아의 머리채를 잡으려던 칼스이턴 대부인은 이미 잃을 게 없다는 듯 굴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목소리를 키우며 아테니아의 험담을 해 대는데, 미치광이의 행동에 어울려 거기에 열을 내 봤자 함께 비웃음이나 살 터였다.
아테니아의 입장에서는 무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시종들에게 두 팔을 잡혀서도 칼스이턴 대부인은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다.
대부인은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악담하려는 듯 계속해서 목에 핏줄을 세우며 고함쳤다.
“여자가 센스가 없으니 남자 맘을 못 잡아 두지! 며느리 복도 지지리 없어서 내가 이 꼴을…!”
칼스이턴 대부인의 말마다 아테니아의 명예와 체면이 뚝뚝 깎여 나가는 듯했다.
그 순간, 아테니아를 도와줬던 남자가 대부인의 목 뒤를 가볍게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