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7)
크리스나 가문이 빈켄티우스와의 상호 협력에 관한 조항을 위반했느냐는, 단순히 크리스나가 칼스이턴에 소송을 언제 걸었느냐로는 판가름할 수 없었다.
크리스나에서 이미 그 전에 계약 변경 혹은 해지 통보를 했는데, 칼스이턴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소송까지 가게 된 거라고 하면 조항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조항이 상세하게 쓰여 있지 않고, 빠져나갈 구멍이 느슨하게 되어 있던 까닭이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조항을 그렇게 만든 이유는 간단했다.
크리스나 백작이 그 틈을 노리고 일부러 빈켄티우스와 칼스이턴 사이에서 쟀다가 그 행동을 들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빈켄티우스가 크리스나에게 무조건 베풀어 주었던 그 계약을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크리스나 백작이 조항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전혀 걱정 없는 문제였다.
처음부터, 아테니아가 증인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제게 그러셨잖아요. 대공 전하께서 주신 서류에 날인하고 인장을 찍기 전까지는, 칼스이턴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고요.”
“아테니아! 그 입 다물지 못해!”
크리스나 백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다가오기 전에, 아테니아가 먼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칼스이턴과의 관계도 정리하지 않다가, 대공 전하가 거래 수수료를 면제해 주시겠다고 한 서류를 공증받아 주신 뒤에야 칼스이턴에 소송을 거신 걸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대공 전하, 아테니아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크리스나 백작은 불리함을 모면하기 위하여 제 딸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쟁이로 몰고 갔다.
아테니아는 이제 그게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크리스나에서 칼스이턴에 계약 해지 통보를 보낸 서류가 우편국을 통해 전송된 날짜가 적힌 기록이에요.”
아테니아가 담담히 크리스나 백작의 앞에 다른 증거를 내밀었다.
만약, 그녀가 뒤통수를 칠 줄 알았더라면 백작도 어떤 대응책을 내놓았겠으나 몰랐기에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었다.
“우편국은 제국에서 직접 관리하니, 제가 어떻게 손쓸 수도 없다는 것 아시겠죠.”
그런 상황에서 아테니아가 내민 증거는 너무나 완벽했다.
제 딸에게 완전히 뒤통수를 맞았다는 것을 깨달은 크리스나 백작이 목덜미를 잡으며 그녀를 손가락질했다.
“너…! 너…! 이놈의 자식…!”
크리스나 백작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지금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듯, 백작은 분노로 어쩔 줄 몰랐다.
“네가 감히…! 네가 어떻게, 네 부모의 뒤통수를 쳐!!!”
크리스나 백작이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꽃병이라도 내던지려는 것처럼 집어 들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앞을 막아서자 움찔하던 크리스나 백작은 꽃병을 도로 내려놓았다.
이럴 때마다 아테니아는 무력을 배우지 않은 게 억울해졌다.
물론, 보다 더 힘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행사하려 드는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점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대적인 약자로서 강자의 위협에 노출되다 보면 억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아테니아가 기사였거나, 발레리안처럼 건장한 사람이었더라면 아버지가 쉽게 저런 태도를 보이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 순간, 발레리안이 뒤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마치 아테니아를 보고 있지 않아도, 그녀가 어떤 안 좋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아테니아를 위로해 주듯이.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를 헷갈리게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선언하지 않았나.
아테니아가 울컥했다.
그녀가 발레리안의 손에서 단호하게 제 손을 빼냈다.
그러자 움찔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 클라이브를 유치장에서 빼내 줄 때 제가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고 행동하신 건가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옆으로 빠져나와 크리스나 백작의 앞에 섰다.
그녀는 폭력에 굴복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만약에, 아주 만약의 일이지만 백작이 손찌검한다면 이 일을 가정 폭력으로 끌고 가 치안대에 고발할 다짐까지 했다.
아테니아는 폭력이 그 무엇의 해결책도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제 아버지가 그것을 해결책 삼고자 한다면,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무엇으로든 증명해 줄 셈이었다.
“다 너를 위한 거였다!!! 네가 아비의 마음을 뭘 안단 말이야!”
크리스나 백작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아테니아가 돌연 픽 웃었다.
“저도 아버지를 위한 거였어요.”
어차피, 크리스나 백작은 좋은 말로 설득하거나 논리대로 맞서려 해도 그의 억지 주장을 접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아테니아는 더는 그런 식으로 아버지와 소모적인 언쟁만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빈켄티우스를 속인 일이 제대로 들통나서 혹시 고소라도 당하시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이렇게 계약 파기되는 게 더 낫잖아요?”
“헛소리! 애초에 아테니아, 네가 칼스이턴에게 소송을 걸게 만들지만 않았어도…!”
“그것도 아버지를 위한 거죠. 크리스나를 등쳐 먹으려는 칼스이턴을 제가 크리스나에서 깔끔하게 떼어 드렸잖아요.”
아테니아가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서운하다는 듯이 제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저는 다 아버지를 위해 한 건데, 아버지께서는 딸의 마음도 몰라주시고… 정말 속상하네요.”
당연히, 누가 봐도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을 위해서 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녀가 이 모두가 아버지를 위한 일이라고 우기자, 크리스나 백작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너… 너….”
크리스나 백작이 어버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우기는 사람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그걸 역으로 당하고 있자니 골이 띵할 지경이었다.
“너, 내 집에서 당장 나가!!!”
결국 크리스나 백작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아테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예, 그렇지 않아도 이만 제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여기 있다가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거든요.”
아테니아가 태연한 낯빛으로 대꾸했다.
이미 필요한 짐은 모두 자신의 저택으로 옮겨 두었다.
애초에 크리스나 백작저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어서, 짐을 많이 챙겨 오거나 늘리지도 않았다.
간단히 챙기면 될 작은 짐들조차 제미니가 이미 마차에 실어 놓은 뒤였다.
그러니 곧바로 출발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아테니아가 서류를 크리스나 백작의 앞으로 내밀었다.
빈켄티우스가 크리스나와 거래 시 모든 수수료를 면제해 주기로 했던 계약에 대한 파기 확인서였다.
“여기에 날인하시고 인장 찍어 주세요, 아버지. 그렇지 않으면 계약 내용을 어기신 것에 대한 고소장이 날아들 거고, 대운하 사업에 대해 빈켄티우스와 함께하실 수 없을 거예요.”
이미 준비된 것들이 많았으니 고소장이 날아들면 크리스나가 무조건 지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크리스나라도 대운하 사업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황실이 끼어든 판을 크리스나가 독점하지 않았나.
빈켄티우스의 도움이 없으면, 크리스나 또한 대운하 사업을 말아먹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까 이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아테니아!!!”
크리스나 백작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저택이 떠나가라 고함을 재차 내질렀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끝내, 제 아버지에게서 날인과 인장을 받아 내었다.
***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그녀의 저택 응접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거기서 먼저 말문을 연 것은 그녀였다.
“이제 정말 모두 끝났네요.”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의 사이는 이로써 완벽히 정리되었다.
아니, 그사이에 법정까지 다녀왔으니 이제는 서로 원수나 마찬가지였다.
황제 또한, 발레리안을 건드리면 엄청난 손실을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테니 이제는 얌전해질 터였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위장 연애를 하고자 했던 목적을 모두 이룬 것이다.
즉, 이제는 그들이 관계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테나.”
발레리안이 멈칫하며 아테니아를 불렀다.
이렇게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게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되니, 숨이 턱 막혔다.
진부하지만 그랬다.
그는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자신은 그 누구도 아테니아만큼 사랑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제 세상이 아름답길 바라서, 제 존재를 정의해 주는 그 세상조차 떠나고자 하는데- 어떻게, 보다 더 사랑한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간 감사했어요, 전하.”
그러나 아테니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발레리안이 조만간 이별하자고 했던 그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마음을 다잡아 왔기 때문이다.
아니, 실은- 그와 함께하는 매 순간순간에도 아테니아는 이별을 생각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더 잘 알게 되었다.
발레리안 빈켄티우스와 아테니아 크리스나 사이에 놓인 간극은 절대 좁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아테니아를 둘러싼 모든 것이 미치광이 소굴 같지 않던가.
바람피운 남편을 두고도 딸을 팔아먹으려고 이혼하지 말라던 가문이었다.
지금은 척졌다지만, 필요하다면 그녀에게 또 들러붙어 이용하려 들기를 망설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발레리안 같은 남자와 이 이상 더한 교제를 한다고 치면- 제 집안이 그를 그냥 둘 리 없었다.
아테니아는 냉소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가족이 저를 두고 발레리안에게 장사하리라 확신했다.
그것도 두고두고, 단물을 빨아먹을 수 있을 때까지 영원토록 쭉.
그러니 여기서 이별하는 게 맞았다.
“저희 이제, 가짜였지만… 이 연애를 끝내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들 사이로 떨어진 말이 그의 가슴속으로 쿵 내려앉았다.
발레리안은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녀의 앞에서, 티를 내서는 안 될 감정이었으니까.
“예. 그렇게… 하도록 해요, 테나.”
그렇게 발레리안 또한, 이별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불러 보는 아테니아의 애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