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6)
아테니아는 정말로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발레리안의 표정이 자신도 모르게 굳었다.
그건 그가 스스로 전혀 의식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하? 제가 혹시 실수를 크게 했나요?”
발레리안이 말이 없자, 아테니아가 대단히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아 버렸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사과할 생각을 하면서도… 아테니아가 어제의 일을 잊지 않길 바랐다.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발레리안이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마른세수했다.
어느덧, 제 욕심이 여기까지 무럭무럭 자라났는가.
그는 일순 두려워졌다.
제가 아테니아를 놓을 수 있을까?
발레리안은 제 안에 떠오른 질문에 흔쾌히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그래서 발레리안은 비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선택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진실을 고백하고도 아테니아가 불쾌해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제 욕심대로 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두 손을 내린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느덧 가면을 덧씌운 것처럼 평온해져 있었다.
“…그, 래요?”
방금 발레리안의 태도를 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게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영 찜찜한 얼굴로 대꾸했다.
“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발레리안이 단호하게 대답했기에, 아테니아는 재차 물을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의 얼굴이 마치 되물으면 안 될 것 같은 표정이었기에, 그녀는 결국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발레리안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으니까….’
무엇보다,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을 믿었다.
설령, 그가 거짓말을 할지라도 어떤 이유가 있었으리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리하여 그녀가 취했던 날의 일은 묻히게 되었다.
***
아테니아가 크리스나 저택에 돌아온 이후, 그녀가 크리스나 백작에게 잔소리를 듣는 일은 없었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가 자신의 저택에서 쉬다 오는 것으로 잘 마무리 지어 놨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아테니아는 평온한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 뒤, 수도는 소란스러운 소식으로 뒤덮였다.
크리스나가 칼스이턴에 소송을 건 것이다.
클라이브는 그 사실을 소문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도착한 소장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로 그는 크리스나 저택으로 달려갔다.
쾅! 쾅! 쾅!
클라이브가 마차에서 직접 내려 저택 대문의 도어노커를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크리스나 저택의 대문은 이전처럼 쉽게 열리지 않았다.
결국, 클라이브가 크리스나 저택 내로 발을 디딘 것은 크리스나 백작이 저택에 돌아온 몇 시간 뒤의 일이었다.
“제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클라이브는 크리스나 백작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참아 왔던 분노를 토해 냈다.
“칼스이턴 후작님, 목소리를 낮추시지요.”
크리스나 백작은 흥분한 클라이브와 상반되게, 차분한 존댓말로 그를 상대했다.
그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에 클라이브는 화내던 것도 잊고 매우 당황하게 되었다.
“왜 이러십니까, 아버님. 제가 왜 갑자기 존대를….”
클라이브는 방금까지 화냈던 주제에, 마치 좋게 좋게 해결하려는 것처럼 억지로 얼굴 위로 웃음을 띠었다.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 모습이 일견, 클라이브를 잘라 내던 아테니아와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칼스이턴 후작님한테 아버님이라고 불릴 사이는 아닌 것 같군요.”
단호하게 클라이브와의 관계를 잘라 내는 말이었다.
그 말은, 또한 자신에게 어떻게 이러느냐는 클라이브의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했다.
크리스나 백작과 클라이브의 관계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행동하시는 거,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때문인 겁니까?”
클라이브가 도로 사나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겨우 클라이브 따위의 기세에 질 크리스나 백작이 아니었다.
백작은 상인으로서 산전수전 이미 모두 겪어 본 인물이었으니까.
“칼스이턴 후작님께서 저희 간의 신뢰를 저버리지만 않으셨더라면, 제 결정이 저어되는 데 한몫했겠지요.”
횡령에, 계약 사항 누설까지.
사실 일반적인 계약 관계였으면 진즉 관계가 깨졌어도 깨졌을 일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나 백작은 정확히 그 점을 지적했다.
발레리안의 탓을 하지 말고 네 잘못이나 생각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크리스나 백작님!!!”
클라이브가 끝내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크리스나 백작이 여전히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이제 볼일이 끝나셨으면, 돌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만.”
클라이브와 더 이상 언쟁조차 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
결국, 크리스나 백작과 클라이브의 기 싸움 끝에 진 것은 클라이브였다.
당연했다.
어쨌든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의 관계에서 잘못한 것은 칼스이턴이었으니까.
그리하여 크리스나는 대운하 사업에 대한 전권을 칼스이턴에게서 넘겨받음으로써, 횡령죄와 비밀 누설로 인한 배상금 문제에 대한 고소를 취하해 주기로 했다.
“뭐라! 결국 칼스이턴이 크리스나에게 굴복했다고?!”
그 소식을 제 시종을 통해 전해 들은 황제는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결국, 발레리안의 경고대로 됐다.
황실은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에게 받을 예정이었던, 대운하 사업의 수익 일부를 전부 날리게 되었다.
쾅!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황제가 분노하여 황좌의 손잡이를 강하게 내리쳤다.
감히 자신에게 경고 따위를 하길래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자신만 우스워지지 않았나!
황제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아테니아를 건드리지 않고 가만히 있기라도 했다면, 차라리 뭐라도 얻었을 터였다.
이건 명백히 황제가 괜히 발레리안을 견제하다가 단 하나도 못 얻어먹은 셈이었다.
“이 나라의 황제인 내가 지금 무슨 꼴이야!”
쾅!
황제가 다시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아무리 화풀이를 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황제는 제 우스워진 꼴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번 일로, 황제는 발레리안이 가진 전력에 대해 새삼스레 다시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아직 가지지 않은 것을 빼앗겼다지만, 다음에는 발레리안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훗날 무언가를 하더라도, 발레리안이 잔뜩 경계를 올리고 있는 지금은 이대로 넘어가는 게 좋다는 것쯤 황제도 알았다.
하지만 역시, 얌전히 있기에 황제는 속에서부터 부글부글 들끓는 분노가 치솟았다.
“내게 이런 모욕감을 주다니…! 칼스이턴은 대체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냔 말이다!”
결국, 황제의 분노가 불똥 튄 곳은 칼스이턴이었다.
크리스나는 발레리안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건드릴 수 없었고, 발레리안을 직접 건드리는 건 현재 상황상 더더욱 말이 안 됐다.
빈켄티우스가 황실의 수작에도 쉬이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지 않았나.
그리하여 황제는 비교적 분노하기 쉬운 대상을 찾은 것이었다.
“시녀장! 루이앙스 공작 부인에게 오늘부터 칼스이턴 대부인을 멀리하라고 이르라!”
그리하여 황제는 칼스이턴을 향해 참지 않고 제 분노를 터트렸다.
“시종장, 재상에게 전달하도록! 칼스이턴을 탈탈 털어서 그간 제대로 내지 않은 세금이 있다면, 과징금까지 부과해 모조리 받아 내 버려!”
명확하게도, 모조리 황제의 화풀이였다.
보통은 황제가 이렇게 사교계에 직접 개입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업을 하는 귀족이 직접적으로 황실의 돈주머니를 채워 주는 대신 세금을 적게 내는 건 그간 있어 온 일이었다.
그걸 지금에 와서 탈탈 털겠다는 건, 결국 황제의 분풀이가 아니면 일어날 리 없는 일이었다.
“예, 폐하.”
황제궁의 시녀장과 시종장이 각각 황제의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자리를 벗어났다.
그들이 명령받고 나간 뒤에도, 황제는 화가 풀리지 않는 듯 한참을 씩씩거렸다.
***
크리스나 백작은 요즘 인생이 즐거웠다.
오늘, 빈켄티우스와 대운하 사업에 관한 계약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대공 전하!”
그리하여 크리스나 백작은 저택으로 찾아온 발레리안을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쩐지 오랜만에 다시 뵙는 듯하군요, 크리스나 백작님.”
발레리안이 크리스나 백작의 환대에 인사치레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두 사람이 도착한 크리스나 백작의 집무실에는 이미 서로가 계약서의 내용에 날인하고 가문의 인장을 찍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하하, 빈켄티우스 가문과 대운하 사업을 함께하게 되다니… 이거 아주 영광입니다.”
발레리안이 자리에 앉자마자, 그 맞은편에 앉은 크리스나 백작이 입을 열었다.
그냥 농담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빈켄티우스 상단은 그 어떤 상단과도 이런 관계를 쌓은 적이 없었다.
한마디로, 크리스나 상단은 현재 남들이 그간 가지고 싶어 하던 그 특권을 이렇게 딸을 잘둔 덕에 쉽게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확인하자, 크리스나 백작은 그제야 제 딸도 자랑스러워졌다.
“예, 저도 크리스나 백작님과 좋은 사업을 함께할 수 있게 되어 좋군요.”
발레리안이 크리스나 백작의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끝까지 모두 들어 봐야 안다고,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 전에, 우리 서로 간에 따져야 할 게 있을 듯합니다만.”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돌연 서늘해졌다.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크리스나 백작이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난감한 얼굴로 발레리안을 쳐다봤다.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대공 전하.”
“분명, 제가 먼저 드린 계약서에 적어 놓지 않았던가요? 어떤 거래를 하든, 상호 협력에 있어 저희 가문과 크리스나 가문이 서로의 최우선이 되어야만 한다고.”
발레리안의 말에 크리스나 백작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백작이 다급하게 변명했다.
“저희는 칼스이턴과의 계약을 대공 전하와 계약하기 전에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칼스이턴 쪽에서 그것을 거부하여 거래 파기가 늦어졌을 뿐입니다.”
크리스나 백작의 말만 들어 보면, 크리스나 가문이 대단히 억울해 보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그 억울함이 가짜임을 증명해 버렸다.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마시죠, 아버지.”
아테니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