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48화 (48/111)

48.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4)

에스텔라 주점.

거기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의 첫 재회 이후, 추위에 떨던 그녀를 데려갔던 곳이었다.

솔직히 한잔하고 싶다고 해도, 다른 귀족들의 눈에 띄어 두고두고 그 입에 오를 만한 고급 바를 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귀족들이 가는 곳 외에 아테니아가 가도 될 법한 술집을 알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에게 선택지는 에스텔라 주점뿐이었던 것이다.

원래도 다혈질적인 면이 있던 아테니아가 그간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그로 인해 극히 충동적이 된 결과였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주로 와인이나 샴페인만 마시던 아테니아에게, 주점의 맥주나 증류주들이 그녀에게 맞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아테니아는 취했다.

“…테나,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친분 있던 에스텔라 주점의 주인이 연락하여 헐레벌떡 나타난 발레리안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그런 그녀에 반해, 그는 혹시라도 아테니아의 이런 모습을 누가 볼까 봐 이미 주점의 주인에게 부탁하여 테이블 주위로 칸막이를 둔 지 오래였지만.

“어…? 리안! 리안이 왜 여깄어요?”

아테니아가 그렇게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던지라 그녀의 발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멀끔했다.

사실, 지금 상황상 그게 더 문제기는 했다.

자꾸만 술을 홀짝이는 것만 빼면 아테니아는 얼굴이 달아오르지도 않았고, 몸이 휘청거리지도 않아서 완전히 멀쩡해 보였으니까.

그래서 주점의 주인도 괜찮은 건가 싶어 이렇게 술을 내줘 버렸고.

“위험하면 어쩌려고…!”

너무나 태평해 보이는 아테니아의 모습에 발레리안이 울컥했다.

그는 기사 수업을 받기 시작한 이후, 어느 정도 몸에 검술이 익고 나서는 숨이 벅차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발레리안이 숨을 헐떡인다는 건 정말이지 남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다급하게 달려왔음을 의미했다.

심지어 이 거리는 말을 세게 달렸다가는 사람을 치기 딱 좋은 그런 거리라, 거리 안에서 말을 몰 수도 없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에서 바람 소리로 인해 귀가 아플 정도로 말을 몬 후에, 곧바로 내려 또 이 거리 안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리안, 앉아요.”

그러나 취한 사람이 말을 듣는 법을 봤는가?

“빨리!”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울컥한 말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손가락으로 제 맞은편을 가리키며 그에게 앉으라고 명령했다.

걱정되어 달려온 발레리안으로서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부축하려고 했다.

그러나 술 취한 사람은 평소보다 힘이 배로 강해진다고 했던가.

순간, 그녀가 그를 홱 잡아당겼다.

“……테나!”

아테니아의 옆자리에 주저앉아, 그대로 그녀 쪽으로 몸이 기울 뻔한 발레리안이 벽을 짚으며 아테니아를 내려다봤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앉으라니까, 되게 말 안 듣네.”

아테니아는 이제 제멋대로 말도 놓고 있었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그들이 가장 친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리안, 예전에는 내 말 잘 듣더니….”

아테니아가 구시렁구시렁하며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입을 가져다 대기 전에 다급히 맥주잔을 잡아 막은 발레리안이 한숨을 삼켰다.

“결국 테나가 앉혔지 않습니까.”

“맞죠. 내가 앉혔지.”

아테니아가 뿌듯한 얼굴로 발레리안의 말을 따라 했다.

상황이 상황인데도, 그는 순간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발레리안도 언젠가는 상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뒤로,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 아테니아의 귀여운 주정도 보고, 그런 그녀를 챙겨 주는- 그런 상상 같은 것을.

그걸 이런 식으로 이루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나 잠시 소년 시절의 생각에 빠져들었던 발레리안의 의식은 강제로 끌려 나왔다.

나직이 숨을 내뱉은 아테니아가 툭, 그에게로 몸을 기댔기 때문이다.

발레리안의 몸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으로 인해 더욱 꼿꼿이 세워졌다.

그녀는 그의 긴장을 전혀 모르는 듯, 편하게 중얼거렸다.

“근데 당신 요즘 마음에 안 들어, 알아?”

노골적인 투덜거림이었다.

따지는 듯한 아테니아의 말에 발레리안이 움찔했다.

“어허-! 가만히 있어요.”

아테니아의 손이 그런 발레리안의 허벅지를 딱 눌러 못 움직이게 고정했다.

그의 몸은 이제 완전히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반말했다가, 존댓말을 썼다가, 그녀는 아주 말투도 제멋대로였다.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그대로 가만히 있자, 그제야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그 상태로 말을 이었다.

그는 제 허벅지를 누르고 있는 아테니아의 손과,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체향, 그리고 오늘따라 넥라인이 넓은 그녀의 드레스 탓에 도대체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모를 지경이었다.

“제멋대로 도와주더니, 제멋대로 끝내재. 아카데미 시절에도 그러더니, 사람이 변한 게 없어, 변한 게!”

발레리안은 불편해 죽겠는데, 아테니아는 한없이 편안한 자세로 그에게 기댄 채 말을 쏟아 냈다.

“솔직히 아카데미 시절에도- 내가 고백한 거, 다 당신 탓이잖아.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홀라당 거절해 버리면 난 어쩌라는 거야?”

아테니아가 그 당시에는 삼켰던 말을 토해 냈다.

“졸업하고 인사도 없이 북부로 돌아가 버리고… 우리 사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아테니아의 얼굴이 돌연 울상이 되었다.

그러자 잔뜩 굳어 있던 발레리안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달랬다.

“그럴 리가요…! 테나는 단 한 번도 제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럼! 그럼 왜 그랬는데.”

그러나 이어지려는 발레리안의 변명을 그에게 기댄 채로 퍼뜩 고개만 들어 올린 아테니아가 끊어 놓았다.

“내가 당신이 그렇게 간 1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그리고 이어지는 아테니아의 말은 발레리안이 몰랐던 클라이브와의 이야기였다.

“클라이브 자식이 위로한답시고 그 틈을 파고들어서는… 솔직히, 내가 그렇게 힘들지만 않았어도 그 나쁜 놈한테 그렇게 쉽게 넘어가진 않았을 텐데.”

순간, 발레리안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클라이브는 늘 발레리안에게 열등감을 가졌었다.

그런 클라이브가 어느 날인가부터, 아테니아를 탐내는 눈으로 봤더란다.

클라이브는 원래 그녀가 말한 그녀의 이상형과 꽤 동떨어져 있었다.

심지어, 그 인성도 결국 이렇게 엉망이라는 게 증명되지 않았나.

그런 클라이브 주제에 아테니아와 어떻게 결혼했나 했더니, 그런 내막이 있었던 것이다.

발레리안은 다시 한번 제가 죽일 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갑자기 내 삶에 불쑥 나타나더니, 마음대로 끝내재.”

아테니아는 말이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제 말로 인해 오히려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투덜거림에 불과했던 그녀의 음성이 어느덧 욱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가만히 기대 있던 아테니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홱 발레리안의 멱살을 잡았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일이었다.

“왜? 왜 헤어지재?”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술기운 탓에, 그녀의 억눌려 있던 다혈질적인 본성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평소의 아테니아라면 절대 내뱉을 일 없던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와 그는 진짜로 연애를 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술에 취한 아테니아는 제 억울함이 중요하지, 그런 사실이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해?”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테니아가 툭, 발레리안의 멱살을 놓으며 시무룩해졌다.

“내가 그렇게 당신한테 가치가 없어요?”

아테니아가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발레리안의 마음속에 죄책감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런 게 아닙니다, 테나.”

발레리안이 나직하게 아테니아의 말을 부정했다.

그의 세계는 그녀를 인지한 후로, 단 한 번도 아테니아의 주변을 맴도는 궤도원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만약,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그의 세계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었다.

“…거짓말쟁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아테니아가 또 홱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다시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말했다.

“리안,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그의 말을 믿겠는가.

마음을 준 듯하다가도,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다가가면 도로 멀어져 버리는 게 발레리안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그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심어 있었다.

그리고 대체로 술 취한 사람은 설득하기도 어렵고 제 고집도 꺾지 않는 법이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강하게 이야기해도 잘 통하지 않을 판에, 발레리안은 차마 아테니아에게 당신은 내게 유일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 정신이 든 그녀가 제 말을 기억할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가문 같은 진창에 아테니아의 발을 들여 더럽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그녀에게 약속할 수 없는데, 그런 말로 아테니아를 또 헷갈리게 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안 믿어요.”

“제발, 믿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사이에 쓸모없는 설전만이 오갔다.

그가 자꾸만 안 믿는다는 제 말에 반박하자, 그녀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발레리안을 쳐다봤다.

“그럼, 증명해 보든가요.”

“……증명이요? 어떻게 말입니까?”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속을 까발려 보여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민은 아주 빠르게 부질없어졌다.

“이렇게 증명하면 되잖아.”

순간, 아테니아가 그의 제복 옷깃을 홱 잡아당겼기 때문이다.

그 순간, 발레리안의 상체가 그녀에게로 기울었다.

찰나에, 그의 두 눈에 아주 가까워진 아테니아의 하얀 얼굴이 들어왔다.

알싸한 술의 향이 숨결을 따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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