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3)
“말해 보거라.”
크리스나 백작은 방금 아테니아가 해 준 말들로 인해 이제 완전히 제 딸을 신뢰하는 상태였다.
“리안에게 부탁하면 황실과 칼스이턴이 결탁한 증거를 찾아낼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이 증거는 이미 발레리안이 준비해 둔 터였다.
그러니까 빈켄티우스와의 거래 서류부터 하여, 지금의 상황까지 모두… 결국 아테니아와 그가 짜 놓은 덫이라는 의미였다.
누군가는 그래도 아버지인데 너무한 게 아니냐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아테니아에게 아버지는 그녀가 벗어나야 할 대상이었다.
인형극의 주인이 가엾다고 해서, 꼭두각시가 그 줄을 매단 채로 평생을 남의 뜻대로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칼스이턴이 황실에 크리스나와의 대운하 사업에 관한 거래 내용을 발설했다면, 그건 비밀 유지 조항을 위반하는 거잖아요.”
클라이브가 황제에게 계약서를 유출한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의 수익 배분율을 알고, 칼스이턴이 크리스나에 양도할 수익에 맞춰 그것에 합당한 보상을 해 줄 수 있었겠는가.
“비밀 유지 조항을 어기면….”
이어지는 아테니아의 말에 크리스나 백작이 두 눈을 번뜩였다.
“계약 파기와 동시에 그 파기의 책임과 배상금 1000%까지 모두 비밀을 누설한 쪽에서 치러야 하지!”
크리스나 백작은 대단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크리스나에서 들어간 투자금의 10배를 배상하게 되면, 칼스이턴은 대운하 사업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한 손실을 보게 된다.
횡령죄로 재판을 받는 상황에 배상하고 남은 돈으로 대운하 사업을 맡아 봤자, 그 사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해서 볼 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획대로만 된다면, 대운하 사업은 칼스이턴 쪽에서 물러나게 되어 있었다.
백작이 기분이 좋은 틈을 타 아테니아가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빈켄티우스와 손을 잡으면, 황실에 당한 걸 갚아 줄 수도 있고 괜한 돈을 뜯길 염려도 없을 거예요.”
빈켄티우스와 대운하 사업을 함께하게 되면, 황실이 원래 정치적으로 대운하 사업을 쉽게 해 주는 대신 크리스나에게서 뜯어내려고 했던 이윤 일부분을 건네주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크리스나 백작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발레리안이 원하는 바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황실은 가만히 앉아서 얻을 수 있었던 막대한 돈을 잃는 셈이었으니까.
“그래, 그래. 테나, 그건 네가 알아서 잘할 수 있겠지?”
아테니아가 어떤 말을 더 하기도 전에, 크리스나 백작은 그녀를 믿는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그럼요, 아버지. 제가 리안에게 잘 말해 볼게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그리고 클라이브와 내통하고 있던 사람은 생각 외로 쉽게 잡을 수 있었다.
“너…! 너, 이놈의 새끼…! 네가 감히 이런 짓을 해!”
와장창.
아테니아가 외출을 다녀왔다가 돌아온 어느 날의 오후, 크리스나 저택에서 큰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악! 아버지,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 아악!”
“미친놈…! 이런 걸 내가 후계자라고!”
와장창.
크리스나 백작의 집무실 밖으로 도자기가 날아들었다.
아이레스가 그것을 겨우겨우 피하며 싹싹 빌었다.
“저도 뭔가 제 사업을 해 보고 싶어서 그랬어요…! 결코 나쁜 의도가 있어서 그런 건…!”
“너 이 새끼, 그걸 말이라고 해…! 저런 걸 자식이라고! 너 이리 안 와!”
2층에서 끝없는 고함이 오갔다.
그 내용만으로도 아테니아는 상황을 눈치챘다.
아이레스가 제 사업을 하겠답시고 돈이 필요해서 클라이브가 크리스나의 돈을 횡령하는 데 협조한 것이었다.
“…하.”
아테니아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멍청해도 저토록 멍청한 짓을 하는 게 제 동생이라니.
셀레니아를 낳을 때부터,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이미 난산이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가문의 후계자를 위해 또다시 난산을 겪으며 낳은 게 아이레스였다.
그만큼 아버지는 아이레스를 강하게 키우면서도 가장 애지중지했다.
가만히만 있어도 크리스나 백작은 아이레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저런 멍청한 짓을 한 건지, 아테니아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악! 누나, 아버지 좀 말려 봐! 이러다가 우리 가문 독자 죽겠네!”
아버지를 피해 도망을 나온 아이레스가 2층의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며 아테니아에게 소리쳤다.
“너! 어딜 도망쳐!”
아버지가 큰 소리를 내지르며 아이레스를 쫓아오는 게 아테니아의 눈에도 보였다.
“누나! 도와달라니까?!”
아이레스가 신경질적으로 아테니아를 향해 재차 외쳤다.
잘못은 제가 해 놓고, 아버지를 붙들어 말려 주지 않는 그녀를 원망하는 모양새였다.
정말이지,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아테니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계단으로 올라섰다.
아이레스가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누나, 어디 가!”
그러나 아테니아는 2층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다음 층계를 올랐다.
아이레스가 멈칫하며 어이없다는 듯이 제 누나를 불렀다.
하지만 아테니아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나!!!”
“너 이 자식, 잘 걸렸다!”
“아아! 도와달라니… 악!”
그리고 그사이에, 아이레스는 크리스나 백작의 손에 귀가 잡혀 다시 집무실로 끌려갔다.
아테니아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3층에 있는 제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제 동생이지만, 아이레스는 혼이 좀 나야 했다.
***
“테나, 네가 아이레스를 끼고 좀 가르쳐라.”
그러나 어떤 일은, 또 아테니아의 예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크리스나 백작이 아테니아를 불러 놓고 한 말이 그랬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테니아가 잘못된 말을 들었다는 듯 반문했다.
그녀는 아이레스가 한동안 외출 금지령을 받거나, 혹은 크리스나 백작의 화를 산 대가로 어쨌든 한동안 집안에서 고생을 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저번에 보니 네가 장부를 보는 법을 제법 잘 알더구나. 칼스이턴의 장부와 크리스나의 장부를 대조하여 정리해 놓은 기록을 보니, 그것 또 꽤 잘 해 놨어.”
크리스나 백작은 본래 좀처럼 여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백작은 그저 여자는 집안 살림살이 맡은 바를 다하고 내조와 아이들의 교육에만 힘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크리스나 백작이 아테니아의 능력을 인정하다니,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녀는 기쁘지 않았다.
“크리스나 상단의 후계자가 장부 보는 법도 모른다고 어디에 소문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네가 가르치는 게 좋겠지.”
그 인정은 그저, 아테니아를 이용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아카데미에서도 경제학을 꽤 좋은 성적으로 수료하지 않았더냐.”
보라, 좋은 성적인 것만 기억할 뿐-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가 경제학과에서 내내 학년 수석을 한 사실 또한 몰랐다.
“…하, 아버지. 아이레스는 크리스나의 돈을 빼돌렸어요. 그런 아이에게 지금 장부를 보는 법을 가르치라고 하신 거예요?”
아테니아는 조금 전의 난리보다 지금이 더욱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이번에야, 장부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아이레스의 일 처리가 미숙하여 내통자도 빠르게 알아냈다고 쳐도 다음에 또 그러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런 상황에서 아이레스가 장부까지 다룰 줄 알게 된다면 다음에는 정말로 들키지도 않고 일을 벌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제 딴에는 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뭐 어쩌겠느냐.”
하지만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가 얼마나 어이없는지 같은 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백작은 놀랍게도 오히려 아이레스의 역성을 들었다.
“녀석이 아직 제 사업할 능력이 안 되는 듯하여 사업 자금을 안 대 주고 있었다만… 녀석은 제게 기회도 주지 않는 듯하여 그게 서운했던 모양이야.”
아테니아는 순간, 눈앞의 사람이 자신의 아버지가 맞나 싶었다.
제 아버지가 본디 원래 이렇게 인자하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던가?
그녀는 제가 이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크리스나 백작이 어떻게 반응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장부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어느 정도 지금보다 괜찮아졌다고 판단되면 사업 자금을 대 주기로 했다.”
크리스나 백작은 사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깐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고를 친 아이레스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그것도 사고를 쳐 놓고도 오히려 제 말을 들어 주지 않아서 그랬다면서 찡찡대는 방식으로 얻은 기회.
“사내자식이 살면서 사고 한 번은 치는 거지. 다행히 큰돈을 잃은 것도 아니고 말이야.”
큰돈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아테니아가 막았을 뿐이었다.
“겨우 그런 걸로 사내놈의 기를 죽여서야 쓰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에게 한마디 수고했다는 말도 없던 아버지는 오히려 사고를 친 남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다.
“배우면 저도 제대로 된 구실을 할 때가 오겠지.”
그래서 아테니아는 순간, 자신이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잊어버렸다.
아, 그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가슴 한구석이 턱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네, 아버지 뜻 알겠어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애매한 말만 남겨 놓은 채로 크리스나 백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대로, 크리스나 저택에서 또한 뛰쳐나왔다.
그 후 아테니아는 지나가던 공용 마차를 잡아탔다.
“어디로 갈까요?”
마부가 물었다.
사실,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고 나왔던지라 아테니아는 잠시 주저했다.
“…에스텔라 주점으로 가 주세요.”
문득, 한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충동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