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2)
아테니아는 순간, 자신을 휩쓰는 충격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발레리안이 아까부터 풍기던 뉘앙스를 생각해 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할 말은 아니었다.
심지어, 예고된 끝이었다.
시작부터가 위장 연애였으니까.
그녀는 애써 의연함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만약, 아카데미 시절의 아테니아였다면 지금 이 순간 발레리안에게 물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테나의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습니다.’
‘……왜요?’
어린 날, 아테니아의 고백을 거절했던 발레리안에게 그렇게 물었듯이.
그러나 그런 무모함은 지금보다 아는 것이 적고 그리하여 용기가 많던 그 시절의 특권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이 더 중요하고, 그래서 그런 이유조차 솔직하게 물어볼 수 없는 어른이었다.
“…그래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게 머릿속이 복잡한 그녀가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으므로.
***
“흠… 이 조건은 조금 그렇구나.”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받아 온 서류를 내려다보던 크리스나 백작이 서류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실 그냥 받기만 하면서 조건을 따지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그녀는 제 아버지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척 물었다.
“어떤 조항 말씀이세요?”
“여기, 상호 협력 관계에 있어서 빈켄티우스 가문을 항상 최우선으로 한다는 것 말이다.”
역시나,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일부러 넣어 둔 조항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그녀는 못 알아듣겠다는 척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여자애가 똑똑해서 뭐 하냐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아버지였다.
아테니아는 제가 모른다고 한들 크리스나 백작이 그리 의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이 조항이 발휘되면, 칼스이턴과 나누었던 모든 계약을 재조정해야 할 거다.”
역시나, 크리스나 백작은 아무 경계심 없이 아테니아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녀가 노렸던 것이 그 점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기색이었다.
하긴, 보통 딸이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준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테니아도 제 아버지가 자신이 아닌, 바람피운 남편의 편을 들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크리스나의 장부를 살펴보면서 아, 그녀가 정말로 순수하게 장부만 봤냐고 하냐면 당연히 아니었다.
아버지의 집무실에는 장부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아테니아는 그중에 칼스이턴에 관한 서류를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그녀는 제 아버지가 서류를 어떻게 분류해 두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크리스나 상단의 딸로서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 않아서, 늘 바쁘신 아버지를 뭐라도 돕고 싶어서… 그래서 어릴 적, 종종 아버지의 일을 간단하게나마 도와 온 덕이었다.
물론, 여자애가 이런 부분으로 너무 잘 알면 나중에 사내가 하는 일에 간섭해서 귀찮게 굴기만 한다면서 매번 간단한 서류 분류만 돕게 하는 게 다였지만.
어쨌든 아테니아는 기억력이 비상한 사람이었고, 그 경험 덕에 짧은 시간 안에도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의 거래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사업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상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대다수의 귀족은 크리스나처럼 직접 상단을 운영하기보다, 투자자로서 사업을 하는 쪽에 가까웠다.
지금이야 달라졌다지만, 한 세대 전에만 해도 상업은 귀족들 사이에서 천시받았다.
그러니 상단을 차려 대놓고 하는 것보다 뒤로 투자를 하는 방법이 귀족들 사이 성행했던 것이다.
칼스이턴도 그중 하나였다.
칼스이턴의 영지에는 남부의 제법 비옥하고 넓은 평야가 속해 있었다.
칼스이턴은 그곳에서 나온 자금으로 크리스나에 투자를 했다.
그러면 크리스나가 그 투자금으로 물건을 사고팔아 나오는 수익을 다시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나누어 가졌다.
이때, 그들 사이 거래에 조항이 있었는데 투자와 수익 배분에 있어 항상 서로가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었다.
즉, 먼저 칼스이턴과 계약한 조항과 현재 발레리안이 준 서류의 조항이 맞부딪히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칼스이턴과의 모든 계약을 재조정한다는 건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칼스이턴으로서는 이 최우선 순위라는 조항을 포기할 리 없으니, 결국 거래는 깨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함께하는 대운하 사업도 당연히 어그러지게 된다.
대운하 사업은 완성만 하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노다지가 될 사업이었다.
그렇게 되면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은 애써 조율해 둔 조건을 모두 엎고 저들 간에 더 가져가기 위해 싸우게 될 터였다.
최악의 가정은, 아예 한쪽이 이 사업에서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은 한쪽이 사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정말 일이 엉망이 되는 셈이었다.
아무리 발레리안의 제안이 엄청나다고 해도, 대운하 사업을 걸어야 한다는 점은 크리스나 백작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대운하 사업 말인데요, 꼭 칼스이턴과 같이 해야 하는 건가요?”
크리스나 백작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는 척하던 아테니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발레리안에게 오늘 들었는데… 칼스이턴에서 우리 상단 쪽에 이윤을 더 주겠다고 한 말, 아무래도 황실과 공모한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크리스나 백작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이제 귀족들이 황실을 무조건 무서워하는 시대는 오래전에 지나갔다.
그리고 그건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황실에게 대운하 사업으로 인한 이윤을 일부 헌납하려고 했던 것은 황실에게 정치적으로 방해받을 시간에 차라리 돈을 주고 사업을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 훨씬 이득이 크기 때문이었다.
즉, 황실이 크리스나 상단을 무너트릴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황실이 칼스이턴과 공모하여 어떤 수작을 부리려 든다?
이건 분명 선을 넘는 일이었다.
칼스이턴도, 황실도.
“아마도 황실에서 대운하 사업이 성공한 이후 칼스이턴이 황실에 헌납하려고 했던 부분을 면제해 주기로 한 것 같아요.”
“황실에서 무엇 때문에?”
크리스나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렇게 하면 물론 칼스이턴이 10%쯤 이익 배분을 크리스나에 더 주는 것은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그러니 클라이브가 뜬금없이 백작에게 한 말도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 황실이 이득 볼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저희 가문이랑 빈켄티우스 가문이 손을 잡으면 이 나라의 경제는 빈켄티우스 가문에게 쥐어지는 셈이잖아요.”
쾅!
그 순간 크리스나 백작이 분노하여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그가 이를 악물며 제 딸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황실에서 우리와 빈켄티우스의 결합을 막기 위하여 이런 짓을 벌였다는 말이냐?”
크리스나 백작으로서는 당연히 분노할 일이었다.
황실 때문에 지금 그가 칼스이턴과는 비교도 안 되는 대어인 빈켄티우스를 놓치게 생겼다는 말이 아닌가!
“사실, 리안이 아버지께 부담드리기 싫다고 말씀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리안이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한 거, 아무래도 황실 탓인 거 같아요.”
아테니아가 크리스나 백작의 분노에 불을 붙이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고 그녀와 발레리안은 이 일이 끝나면 헤어질 것이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그 사실 따위는 목 뒤로 꿀꺽 삼켜 버렸다.
“그가 크리스나 상단이 칼스이턴과 상당히 얽혀 있는 것을 뻔히 아는데, 아버지께 칼스이턴을 모조리 끊어 내라고 말씀드리기에는 너무 월권행위 같다고 했거든요.”
크리스나 백작이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황실과 칼스이턴 때문에 빈켄티우스와 사돈이 될 수 있던 기회를 놓쳤다.
그렇게 생각하자 너무 아까워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저는 칼스이턴을 끊어 내지 않아도 걱정이에요….”
아테니아가 한숨을 푹 쉬며, 아주 조심스러운 듯이 말을 덧붙였다.
“황실이라는 뒷배를 얻은 칼스이턴이 지금 당장은 우리 쪽에 이윤을 더 주겠다고 나선다지만… 제가 발레리안과 혹시라도 헤어진다면 그 후에 본색을 드러내면 어쩌죠?”
크리스나 백작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는 제 딸의 말이 충분히 일리 있다고 여겨졌다.
황실에게서 특혜를 받은 주제에, 그런 적 없는 척, 손해 보는 척하며 아테니아와 재혼을 하기 위해 수작을 부리던 클라이브가 아닌가.
크리스나 백작은 클라이브가 지금도 벌써 자신을 속이려 드는데,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작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갔다.
만약 그렇다면, 칼스이턴과는 다시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이야 크리스나와 칼스이턴 사이 균형이 맞아 서로 공평하게 나눈다지만, 황실이 개입하면 칼스이턴의 쪽으로 무게가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거래에 있어서 자신이 손해 보는 거래는 절대로 하지 않는 철저한 상인이었다.
톡. 톡. 톡.
크리스나 백작이 소파의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들기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것은 백작이 깊이 생각하는 것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아테니아는 숨죽이고 아버지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나 백작의 입에서 그녀가 원하던 말이 떨어졌다.
“아무래도 칼스이턴과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
그 말에 아테니아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티 내지 않은 채로, 크리스나 백작에게 물었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으세요?”
“칼스이턴 후작이 크리스나의 돈을 횡령한 것에 대하여 소송을 걸 생각이다.”
클라이브가 장부에 물품의 금액을 다르게 기입하여 차액을 챙긴 것은 대단한 수작은 아니었다.
실제 물품의 금액이 적힌 거래 내역서들은 모두 크리스나 백작의 손에 있었다.
그러니 크리스나 상단 내부에서 클라이브가 잘못 적은 물품의 금액대로 승인해 준 내부 첩자만 잡는다면, 클라이브의 죄를 입증하는 것은 쉬웠다.
크리스나 백작은 클라이브가 감옥살이를 하고 싶지 않다면 제 말을 들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그보다도 더 확실히 하고 싶었다.
“아버지, 거기에 더해서… 제가 제안드릴 방법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