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그대 발끝조차 닿지 않을 음지가 되리 (1)
“아테니아, 오늘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 그 서류를 받아 오거라.”
아테니아가 아침 식탁에 앉자마자, 크리스나 백작이 말을 꺼냈다.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지난 밤에는 어떻게 참았는지 모르겠다.
아테니아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하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일 터였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위한 것이라고 못 박은 데다가, 그녀가 어제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크리스나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 전에, 칼스이턴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 주세요.”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나 백작이 곧바로 반박했다.
“빈켄티우스와 혼약이라도 맺을 수 있을 것처럼 굴더니, 그것도 아니지 않았더냐. 이미 한번 말을 어긴 너를 내가 뭘 믿고 서류를 받기도 전에 칼스이턴을 잘라 낸단 말이냐.”
이성적으로 말하자면, 크리스나 백작의 말은 옳았다.
아테니아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웨일러스 후작이 거기서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후작 때문에 괜스레 이런 언쟁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결혼으로 가져올 것보다 못한 걸 가져왔던가요?”
아테니아는 어쩐지 입맛이 썼다.
그래서 결국 오늘 아침도 식욕을 잃어버렸다.
어쩌다가 아버지와 딸 사이에 이런 대화만 오가게 되었던가.
어느 날에는 그들 사이에도 살가운 대화가 오갔던 적이 있었거늘.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그럼 빈켄티우스를 놓치시든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전처럼 순한 딸이 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길을 와 버렸지만.
“아테니아!”
“식탁 위에서 언성 높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버지세요.”
아테니아가 평상시 크리스나 백작이 아이들에게 근엄하게 일컫던 교육 방식을 들먹였다.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나 그도 더 이상 제 딸에게 윽박만 질러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터였다.
“큼, 크흠… 잘 생각해라. 크리스나에 좋은 게 네게도 좋은 거야.”
그래서 크리스나 백작은 방법을 회유로 바꾼 듯 돌연 제법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도 든든한 친정이 있어야 좋을 게 아니냐.”
식욕이 없어, 스테이크를 먹지는 않고 조각조각 계속해서 자르기만 하던 아테니아의 칼질이 뚝 멈췄다.
든든한 친정.
그래, 언젠가는 그녀도… 그게 제게 좋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이제 바뀌었고, 그래서 이제 그녀는 크리스나 백작의 말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아테니아는 어느덧 자신이 크리스나 저택을 자신의 집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문득, 이미 어른이 된 지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잃은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돌아갈 곳은 필요했다.
그것을 잃은 기분은 처참했다.
그러나 이제 아테니아는 그런 기분쯤은 숨길 수 있게 되었다.
냉정한 현실은 한 사람을 그렇게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렇겠죠.”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건 백작을 속이기 위해 그런 척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 결혼도 하지 않는데 어느 날 빈켄티우스 대공이 마음이 변한다고 생각해 봐라.”
아테니아가 제 말에 긍정하는 태도를 보이자, 크리스나 백작은 그녀가 제 말에 설득된다고 느꼈는지 부드러운 태도로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그 속에서 상대가 제 뜻대로 되고 있는 것에 대한 제 아버지의 채 감추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그럼 네가 의지할 곳은 결국 이 아비뿐이다. 나는 너를 생각해서 칼스이턴을 남겨 두려는 거야.”
그리고 이어진 말은 더없이 끔찍했다.
너를 생각해서, 너를 위해서.
왜 다들 한결같이 그 말로 아테니아를 휘두르려 드는지 알 수 없었다.
아, 정말이지… 그녀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아버지의 뜻은 잘 알겠어요. 그럼, 아버지께서는 제가 정확히 어떻게 하길 바라시는 건가요?”
아테니아는 반발심이 완전히 수그러든 것처럼 차분하게 크리스나 백작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의 속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보통의 부녀 사이였다면 이런 식으로 서로 이용하고 속이려 들었을까?
불쑥 아테니아의 안에 원망이 치솟았다.
왜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어서, 자신이 이런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지.
조금 더 나은 아버지일 수는 없었던 걸까?
그저 평범하게, 옳지 않은 상황에서 적어도 남의 편은 들지 않는 그런 아버지일 수도 있었지 않았나.
왜 아버지는 그 평범조차 되지 못해서- 그래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시는가.
아테니아가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꽉 깨물었는지, 입 안에 비릿한 맛이 맴돌았다.
“일단, 칼스이턴과의 관계는 정리한 척하고 대공 전하께 서류를 받아 오너라.”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서로 좋아 연애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걸 알면서 지금, 그녀에게 발레리안을 속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 나는 당신께 대체 얼마나 더 실망해야 하는가.
아테니아의 시선이 저 아래로 내리깔렸다.
지금은 당장, 제 아버지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이제 더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향한 어느 날의 존경과 어느 날의 사랑은 마침내 그 자리에서 폭삭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의 종말은 지극히도 슬픈 법이었다.
지금 아테니아가 하려는 일은 결국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었다.
애석하게도 방금, 그에 대한 마지막 망설임이 그녀의 안에서 사라졌다.
“서류를 통해 수수료에 관한 계약이 끝나고 나면, 그 후에 대공 전하께 들키기 전에 칼스이턴과의 관계를 정리하면 된다.”
들키기 전.
참으로 모호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들키지 않으면 빈켄티우스와 칼스이턴 사이에서 단물을 빨아먹겠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럼, 아버지만 믿을게요.”
아테니아는 고민하는 척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테나, 드디어 네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하지만 평소라면 지금까지 아테니아가 한 태도를 생각해서 제 딸의 결정을 한 번쯤 의심해 봤을 크리스나 백작은 이미 눈앞에 다가온 이득에 잔뜩 취한 모양이었다.
그는 아테니아가 기껏 연기한 보람도 없이 대번에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인간의 탐욕은 참으로 끝이 없었다.
그리고 그 탐욕은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평소에 하지 않던 실책을 하게 만든다.
지금의 크리스나 백작이 딱 그러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그런 아버지의 행동을 말리지 않았다.
자업자득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입안은 지나치게 썼다.
***
“…아테니아, 어제는 제가 미안했습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와 만나자마자, 마치 이러기로 준비해 왔던 것처럼 그녀에게 사과를 건넸다.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나 백작과 아침에 있었던 일 때문에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던 아테니아였다.
만약 발레리안도 평소 같았다면, 그런 그녀의 기색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도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자신을 바라보는 아테니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음을 몰랐다.
‘빈켄티우스 일가가 그 가문의 안주인들을 어떻게 잡아먹었는지, 크리스나 영애가 알게…!’
웨일러스 후작의 말에 담담히 대처한 척했지만, 사실 발레리안은 내도록 그 말이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건 발레리안이 살면서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은 적이 없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조모도, 그의 어머니도- 빈켄티우스만 아니었다면 돌아가시지 않았을 것이다.
빈켄티우스가 그들을 죽였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까지 그렇게 만들 수 없었고, 아테니아가 그 사실을 영원토록 알지 못하길 바랐다.
“…무엇이 미안하시다는 건데요?”
그래서 어두워진 아테니아의 안색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발레리안은 말을 이었다.
그는 잠깐의 단꿈에 취한 자신을 책망하며, 최대한 자신으로부터 그녀를 떨어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아테니아를 헷갈리게 했습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아테니아를 욕심내다니.
정말 되지도 않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에 묻혀 그런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요?”
그로 인해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발레리안이 말할 때마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와르륵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아테니아는 자신이 그들의 관계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녀는 자신이 이토록 비참한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내게 보였던 감정들은 결국 불쌍해진 첫사랑에 대한 동정에 불과했던가?
아테니아가 입 안쪽 살을 짓씹었다.
아침에 이어 또 연달아 그러니, 나중에 보면 입안이 너덜거릴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현재 그녀의 기분보다 더 너덜거리지는 못할 터였다.
“황제의 만행을 막고, 칼스이턴을 떨어트려 놓은 후에….”
발레리안의 안에서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그의 이기심은 눈앞의 상대를 보내지 말라고 속살거렸다.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를 증오했다.
그러는 그조차, 결국 망할 빈켄티우스였다.
아카데미 시절은 발레리안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정확히는, 아테니아를 제대로 인지하고 난 후부터가 그랬다.
그의 세계는 그 순간, 타인에 의해 뒤바뀌었다.
한 인간의 축이 다른 존재를 기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절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아테니아와 함께 있을 때면, 발레리안은 자신이 빈켄티우스임을 잊고는 했다.
그래, 그 순간만큼은 그리하여… 자신이 증오스럽지 않았다.
그래서 합리화라도 해서 아테니아의 곁에 있고 싶었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는 그 감각은 너무나도 지나치게 달콤했으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제 진창에 들여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후에, 이 계약 연애도 끝을 냈으면 합니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한 음절 한 음절이 제 숨구멍을 갈기갈기 찢으며 흘러나와도, 기어코 그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