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8)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어요.”
아테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누군가가 제게 마음이 없다고 하여, 그것으로 화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화가 났다.
이럴 거면 제게 그렇게 잘해 주지나 말지.
자신이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알고 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테니아는 더는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런 걸로 발레리안에게 화내는 모습을 더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테나, 잠깐만요…!”
발레리안이 다급하게 아테니아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언제든 그녀가 원하면 뿌리칠 수 있을 만큼 아주 약한 힘이었다.
그에게는 아주 다행히도,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모든 행동이 단 하나의 결론을 가리켜도, 말 한마디가 그 결론을 틀어 버릴 수 있었다.
인간에게 말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그전까지 무엇을 했던 간에 말로서 어떤 관계로 정의하는 순간, 그제야 그 관계는 시작되기도 한다.
발레리안과 아테니아 사이에는 그런 게 없었다.
“…그것이.”
그리고 끝내,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에게 대답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사이는 여전히 아무것도 아니었고, 시작되지 않았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대공 전하.”
탁.
아테니아는 이번에는 발레리안의 손을 쳐 냈다.
그녀는 그대로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를 떠나 버렸다.
***
그대로 발레리안은 웨일러스 후작을 찾아갔다.
“큽…!”
아까 시종을 시켜 제압했던 것과 달리, 웨일러스 후작은 발레리안의 그림자 기사단에 의해 무릎 꿇려졌다.
당연히도, 분위기는 정오와 같지 않았다.
그림자 기사단은 빈켄티우스의 뒷일을 처리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불러냈다는 건… 발레리안이 후작을 소리 소문 없이 치워 버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순간, 웨일러스 후작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무섬증이 섬뜩하게 일었다.
“전하…! 제게 이러시면 안…!”
웨일러스 후작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콱.
그 순간, 발레리안의 검이 순식간에 발도되어 웨일러스 후작의 무릎 앞에 던져졌다.
그것은 단단한 바닥에도 불구하고 튕겨 나가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기행이었고 미친 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단 하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원로, 내가 왜 그동안 원로들이 빈켄티우스의 이름으로 하나, 둘 뒷돈을 받아먹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는지 아나?”
그 짧은 시간 사이에도 발레리안의 그림자 기사단은 상당히 많은 정보를 물어 왔다.
그리고 그 속에는 발레리안의 예상대로, 원로들이 빈켄티우스의 이름으로 자행한 월권행위들이 적혀 있었다.
예를 들어, 빈켄티우스가 가지고 있는 영지가 워낙 광활했기 때문에 빈켄티우스는 모든 영지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 대리인을 두었는데 거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대리인은 주로 전문 영지 관리인이었다.
그런데 요즘 종종, 그 대리인이 돌연 사임하는 경우가 생긴 것이었다.
그 뒤에, 몇몇 원로들의 수작이 있었다.
기존의 대리인에게 돈을 쥐여 줘 내보내고 저들이 원하는 자를 앉힌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착복한 돈이 상당했다.
물론, 빈켄티우스가 워낙 부유했기 때문에 그 정도의 돈은 티도 나지 않았다.
원로들도 그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으니까.
그 돈이 없다고 빈켄티우스가 망하지도 않고, 어떤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다.
결론은 적당히 봐주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빈켄티우스에서 내킬 때의 문제였다.
“원로들을 쳐 내는 건 나에게 너무 쉬운 일이기 때문이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체스판 위의 체스 말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
발레리안은 솔직히, 원로들이 빈켄티우스를 망쳤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가문에 대한 그의 미움은 겨우 그 정도로 희석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하필 웨일러스 후작이 오늘 일을 쳐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웨일러스 원로, 당신이 굳이 내가 그 쉬운 일을 하게 만들었어.”
웨일러스 후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태어나자마자 빈켄티우스의 스승으로 내정되는 가문에서 태어난 후작이었다.
심지어 그는 그런 가문의 주인이 될 장자였다.
그러니 어디 가서 이렇게 하찮다는 취급을 당해 봤을 리 없었다.
그래서 찰나에 욱하여 웨일러스 후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대공 전하, 저를 이렇게 대하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그 순간, 웨일러스 후작의 발악에 그림자 기사들이 그를 제압하려던 것을 발레리안이 손짓으로 막았다.
“후회? 무슨 후회.”
발레리안이 픽 웃었다.
그는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한없이 오만한 얼굴이었다.
감히 너 따위가 자신을 후회하게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그 확신이 들어 있는 표정에 웨일러스 후작은 기어코 선을 넘고 말았다.
“빈켄티우스 일가가 그 가문의 안주인들을 어떻게 잡아먹었는지, 크리스나 영애가 알게…!”
쿵.
물론, 그것도 발레리안이 서류 뭉치를 웨일러스 후작 앞에 던져 놓기 전까지만이었다.
서류를 내려다본 후작의 얼굴이 방금과는 180도 다르게 뒤바뀌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웨일러스 후작이 손을 덜덜 떨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서류의 가장 윗 제목에는 ‘웨일러스 후작가의 비리 내역’이라고 적혀 있었다.
쾅.
“대공 전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웨일러스 후작이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서류의 내역이, 후작만의 비리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웨일러스 가문을 탈탈 털어 오게 했다.
그것은 여차하면 후작뿐 아니라, 웨일러스 가문도 쓸어 버려 재기할 여지조차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고작 잘못했다는 말 하나로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도 없을 텐데, 내가 굳이 원로 같은 인간들을 더 참아 주어야 하나?”
웨일러스 후작의 늙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았다.
감히 그의 앞에서 빈켄티우스의 죽은 안주인들과 아테니아를 동시에 언급하다니.
심지어, 그 안주인들의 죽음에 일조한 원로 주제에!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발레리안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웨일러스 후작에게로 다가왔다.
그러자 그림자 기사들이 후작의 상체를 홱 들어 올렸다.
이마가 잔뜩 붉어진 웨일러스 후작이 잔뜩 두려운 눈으로 발레리안을 쳐다봤다.
발레리안이 친히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 후작과 눈높이를 대략 맞추었다.
“가서 말해 봐. 빈켄티우스 가문은 사람을 잡아먹는 재주가 있다고.”
발레리안이 픽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이 더없이 섬뜩했다.
그 안에 증오가 펄펄 들끓고 있었다.
쾅!
“제가!”
웨일러스 후작이 허겁지겁 기사들을 뿌리치고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잘못했습니다!”
쾅!
웨일러스 후작의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후작을 멈추지 않았고, 웨일러스 후작도 그 행동을 멈추지 못했다.
결국 후작이 기절할 때까지, 후작의 집무실을 울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물론, 그러고도… 발레리안의 표정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지만.
***
빈켄티우스가의 타운하우스로 돌아온 뒤, 발레리안은 테라스에 놓인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아테니아가 달빛이 내려오는 자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도 그녀를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이 자리를 찾고는 했는데, 그게 어느덧 발레리안이 이렇게 생각할 때면 이곳에 오는 습관이 배어 버린 것이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대공 전하.”
집사가 발레리안이 물고만 있는 궐련에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내밀었다.
그러나 그 끝에 불이 붙자마자, 발레리안은 그것을 재떨이에 꺼 버렸다.
“테나가 싫어해.”
그 음성이 매우 단호했다.
정확히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빈켄티우스의 본가로 돌아온 이후부터 피우기 시작한 궐련이었다.
그전까지는 피우면 안 된다는 생각도, 끊을 생각도 없었다.
물론, 아등바등 오래 살 생각 따위 발레리안에게 없었기 때문에 끊을 생각이 없는 것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저- 아테니아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녀가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심지어 아테니아는 후각이 예민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저택에 왔다가 그녀가 혹시라도 궐련의 남은 향을 맡게 되는 것조차 그는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수도에 오기 전부터 궐련을 단 한 대도 피우지 않았다.
혹시라도 어쩌다 아테니아와 마주치는 우연이라도 생기면, 그 우연한 만남에서 그녀에게 털끝만큼의 불쾌한 인상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갑자기, 계속해서 피우지 않다 보니 발레리안에게도 어쩔 수 없이 금단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그는 결국 궐련에 불도 붙이지 않고 그 끝만 잘근잘근 씹고 있던 중이었다.
‘빈켄티우스 일가가 그 가문의 안주인들을 어떻게 잡아먹었는지, 크리스나 영애가 알게…!’
그리고 금단 현상은 웨일러스 후작이 떠들었던 말이 발레리안의 머릿속을 울릴수록 더욱 심해졌다.
발레리안은 정말이지, 빈켄티우스가 끔직이도 싫었다.
자신이 빈켄티우스가 아니었으면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만약, 조모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서 발레리안에게 한 부탁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진즉에 제 가문 따위 내팽개쳐 버렸을 터였다.
발레리안은 새 궐련을 빼내어 또다시 그것을 문 채로 끝을 잘근잘근 씹기만 했다.
그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발레리안도 알고 있었다.
‘대공 전하, 절 좋아하세요?’
아테니아의 그 질문에 대하여 자신이 어떻게 대답해야만 했던지.
발레리안도 멍청이가 아니었으니 잘 알았다.
그가 어차피 피지 못할 궐련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고 마른세수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발레리안은 마침내 내일 아테니아를 만나 해야 할 말을 정했다.
기어코 새벽빛이 밝아 와 달빛이 숨어 버린 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