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7)
발레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로,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굳어 버린 웨일러스 후작의 정신을 발레리안의 싸늘한 목소리가 깨웠다.
직- 찌익-
그리고 그 순간, 후작의 손에 의해 계약서가 갈기갈기 찢겼다.
“웨일러스 원로!!!”
발레리안이 분노하여 소리쳤다.
가신이 감히 가주의 개인적인 서류를 찢다니!
위계질서가 엄한 빈켄티우스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웨일러스 후작이 발레리안을 우습게 보지 않고서야, 이런 짓을 할 리 없었다.
그간 발레리안이 가만히 있었더니, 그게 진짜 그가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크리스나 따위가 뭐라고, 빈켄티우스 상단과의 거래에서 모든 수수료를 면제해 준다는 말입니까!”
크리스나 백작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빈켄티우스 상단은 클레르폰 제국뿐 아니라 대륙 전역에 가장 많은 손길을 뻗친 상단이었다.
하물며 아주 작은 촌락에서조차 빈켄티우스 상단을 알았다.
즉, 빈켄티우스와의 거래를 할 때 수수료를 물지 않을 수 있다는 건 대륙 어디에 가나 일방적인 이윤을 볼 수 있다는 의미였다.
빈켄티우스가 크리스나 상단이 성장하는 데 받침대가 되어 주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빈켄티우스 상단이 굳이 손해 보는 일을 해야 할 이유가 무엇 있습니까, 절대 안 되는…!”
쿵.
그 순간, 발레리안의 눈짓에 의해 그의 시종이 웨일러스 후작을 제압해 무릎 꿇렸다.
건국 초기, 북부가 안정되기까지 북부는 이민족들의 가장 많은 침입을 받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빈켄티우스의 고용인들은 다른 가문의 고용인들과 달리, 그들 또한 약간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말을 조심하십시오, 웨일러스 후작님. 감히 대공 전하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시다니요.”
시종이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발레리안의 서늘한 시선이 웨일러스 후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으나, 굳이 발레리안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웨일러스 후작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감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발레리안의 마지막 경고라는 사실을.
웨일러스 후작의 입이 다물렸다.
아무리 그가 발레리안이 하는 행동에 반대를 하고 싶어도, 제 목숨은 귀중한 법이었다.
초대 황제에게 받은 권리에 따라, 빈켄티우스에는 여전히 북부 귀족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북부가 크고 난 후에 황실이 빈켄티우스를 견제하여 뺏으려고 한 권리 중 하나였으나, 결국 뺏지 못한 권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 모습에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제야, 발레리안이 자신을 얼마나 봐주고 있었던지를 백작은 체감했다.
이래 봬도 상인으로 오래 살아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있다고 자부했던 크리스나 백작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의 아버지라는 이유 덕에 존중받았음을 깨달았다.
발레리안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굳이 시종이 웨일러스 후작을 제압하게 만들었다.
그건 후작의 입장에서는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다.
또한, 아무리 굴욕적이어도 발레리안에게 맞설 게 아니라면 시종을 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 굴욕을 당해도 입도 벙긋할 수 없는 것.
그게 빈켄티우스의 이름이 가진 무게였다.
발레리안은 후작이 그것을 수치와 무력감으로 직접 겪게 했다.
웨일러스 후작에 대한 존중 따위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후작에게도 저러는데, 크리스나 백작에게 그러지 못하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백작은 운이 좋게 발레리안이 그러지 않는 상대였을 뿐이었다.
“서류는 다시 작성하여, 나중에 아테니아와 만날 때 보내 드리지요.”
순식간에 차분해진 분위기에 발레리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테니아 없이는 서류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예, 감사합니다.”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은 반발할 수 없었다.
발레리안에게 감히 반발했다가 어떻게 되는지 방금 두 눈으로 직접 본 터였다.
그러니 아무리 자존심이 강한 크리스나 백작이라고 해도,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아진 것이다.
그날의 식사는 그렇게 엉망이 된 채로 끝났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 대하여 이견을 표하지 못했다.
그리고 워낙 정신이 없는 탓에, 크리스나 백작은 제 딸이 오늘따라 얌전했다는 사실 또한 잊어버렸다.
***
점심에 있던 식사였기에, 아테니아는 발레리안과 데이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좀 더 함께 있다 가기로 했다.
그리고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로 오자마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 식사 자리에서 하신 말씀, 아무리 저희 아버지께 서류를 넘기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너무 과하셨어요.”
사실, 아테니아가 웨일러스 후작의 타운하우스에서부터 계속 하고 싶던 말이었다.
다만, 발레리안이 크리스나 백작에게 건넬 서류가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의 결별에 시발점이 되어 줄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칼스이턴 대부인이 찾아왔던 그날,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황제가 칼스이턴의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황제가 결국 노리는 것은 발레리안이었고, 칼스이턴은 결국 그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칼스이턴만 떼어 내 봤자, 어차피 황제가 앞으로 발레리안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면, 그는 계속해서 이런 상황에 직면해야만 할 터였다.
이번에야 황제가 노린 게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관계였다지만, 다음에는 또 무엇에 손을 뻗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을 끊어 냄과 동시에, 황제에게도 타격을 줄 방법을 강구했다.
그러니까 결국, 아테니아에게 대공비의 권한을 누리게 해 주는 척했으나 크리스나 백작에게 서류를 건네는 것은 애초부터 정해 둔 일이었다는 것이다.
“……제 말이 그렇게나 과했습니까?”
발레리안이 잠시 멈칫하더니, 아테니아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또 말을 이었다.
“그게 진짜이면 안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죠. 뻔한 거 아닌가요?”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는 재고의 여지도 없다는 듯이 두 번 못 박았다.
“제 것이 아닌데, 제가 그런 권리를 휘두르는 건 저한테도 리안에게도 좋지 않아요.”
발레리안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아테니아의 말에 반박했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발레리안과 조금만 얽혀도 그에게서 무언가라도 얻어 내려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달랐다.
그게, 발레리안에게는 마치 아테니아가 이 이상 그와 얽히고 싶지 않아 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왜 매번 테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래서 발레리안은 울컥하고 말았다.
아무리 그들이 과거처럼 가까워질 수 없다지만, 이렇게 매번 아테니아에게 선을 긋는 듯한 말을 듣는 게 쉽지 않았다.
“왜 그렇게 화를 내듯이 말씀하세요?”
그러나 아테니아는 도리어 발레리안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제 것이 아니니까요.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렇게 기분이 상하실 일인가요?”
몰이해는 감정의 풍랑을 불러왔다.
아테니아는 애초에 자신이 왜 이런 걸로 발레리안과 이런 말을 나누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제가 그냥 드리고 싶다면요?”
그러나 발레리안도 오늘만큼은 좀처럼 지지 않았다.
그도 사실,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와 아테니아의 연애조차 가짜였으니, 결국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닌 셈이었다.
그런 사이에 이런 건 아테니아의 말대로 과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발레리안은 여태껏 내내 그녀에게 많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
드레스나 오늘 일 같은 건 그가 주고 싶은 것들의 아주 일부분일 뿐이었는데, 그조차 거절당하니 발레리안은 마치 자신이 거절당한 기분이었다.
충분히 아테니아가 그럴 수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그의 감정이 치솟는 것은 애석하게도 철저히 별개의 문제였다.
“…그러니까 왜요? 왜 주고 싶으신데요?”
계속되는 발레리안의 고집에 답답해진 것은 아테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감정도 점차 격해졌다.
그가 보이는 모습들은 아테니아로 하여금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어쩌면 그녀가 한 착각을 사실로 만들 수 있는 순간에도, 입 한 번 벙긋하지 않았다.
그건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자꾸만 아테니아를 착각하게 만들 듯한 그의 행동에 아테니아는 화가 나고 말았다.
“저희가 무슨 사이라고요.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이런 말은 어떤 사이에서도 좋을 게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가 빈정거리듯 말을 내뱉은 이유였다.
화가 났다.
자신 혼자만, 매번 감정이 들썩거릴 거라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저희가, 아무 사이도… 아닙니까?”
그런 상황에서, 마치 상처 입은 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발레리안의 얼굴은 아테니아의 화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녀가 마른세수했다.
손을 내린 아테니아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의 시선은 발레리안에게 도망갈 한 치의 틈도 주지 않으려는 듯 단호했다.
“대공 전하, 절 좋아하세요?”
어쩌면, 진즉에 물었어야 할 질문이었다.
아테니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이렇게까지 도와주고 이렇게까지 위해 주는 발레리안이… 실은 그냥, 첫사랑에 대한 동정일 뿐이라고 할까 봐.
그래서 차마 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발레리안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 찰나에, 그의 머릿속으로 황제부터 가문의 원로들, 그리고 그의 가문에 얽힌 비밀까지… 아주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는 필연적으로 이 이상 그녀와 가까워지게 될 터였다.
그렇게 되었을 때, 발레리안은 아테니아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잘 알겠어요.”
그리고 어떤 물음에는 침묵이 긍정이 되지만, 또 어떤 물음에는 침묵이 부정이 되기도 하는 법이었다.
지금은 후자에 가까웠다.
담담히 대답한 아테니아가 홱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