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6)
웨일러스 후작이 이어 말했다.
“저희 대공 전하께서 현재 약혼녀도 없으신지라, 되도록 빨리 날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 합니다만.”
웨일러스 후작이 말할수록 크리스나 백작의 표정이 피어났다.
백작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이미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함께 식장에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반대로 발레리안의 표정은 굳어 버렸다.
그가 사나운 눈으로 웨일러스 후작을 노려봤다.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은 발레리안이 얼마나 제 가문을 혐오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절대 결혼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이, 원로들이 발레리안의 결혼을 도리어 더 재촉하게 된 원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웨일러스 후작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결혼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흠, 흠, 저희도 그렇게만 된다면야 정말 좋겠습니다만….”
크리스나 백작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번갈아 쳐다봤다.
노골적으로 눈치를 주는 행동이었다.
이 상황을 자연스레 벗어나려면, 두 사람이 대충이라도 대답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둘 모두 쉽게 대답을 꺼내 놓지 못했다.
그녀는 제 아버지를 잘 알았다.
지금 당장 대충 긍정적인 대답을 꺼내 봤자, 그것은 결국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었다.
한번 결혼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크리스나 백작은 앞으로 매일매일 채근할 터였다.
아니, 그뿐이면 다행이다.
당장 이 자리에서 약혼 날짜라도 잡자고 할지도 몰랐다.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이 발레리안을 채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발레리안대로 망설였다.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그들의 연애가 끝나게 되면 가장 곤란해지는 건 아테니아였으니까.
크리스나 백작의 성정상, 다 잡은 물고기를 놓쳤다고 생각하게 되면 아테니아에게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백작이 한 행적만으로도 발레리안은 그 뒤의 일이 뻔히 그려지는 듯했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또다시 제 부모로 인해 상처받지 않길 바랐다.
그리하여 식탁 위에는 돌연 침묵이 찾아들었다.
그 침묵이 길어지자, 크리스나 백작의 표정이 점차 나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테나, 왜 대답이 없느냐? 지금 당장 결혼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웃고 있는 크리스나 백작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속내가 진실로 미소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백작은 잠깐을 참지 못하고 발레리안에게 물었다.
어느덧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와 포크는 내려놓은 지 오래였다.
“테나, 아버지가 묻지 않으시니. 얼른 대답하렴.”
크리스나 백작의 표정이 점차 좋아지지 않자, 백작 부인이 금세 불안한 표정이 되어 아테니아를 다그쳤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대단히 심약하여, 제 남편의 얼굴이 조금만 안 좋아져도 어쩔 줄을 몰랐다.
이대로 두면 아테니아의 어머니는 식사하다가 체할 것이 뻔했다.
이제 식탁 위 모두의 시선은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에게 쏠려 있었다.
그녀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아테니아를 보며 발레리안의 낯빛 또한 어두워졌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
아득, 발레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웨일러스 후작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발레리안의 시선에 뻔히 들어왔다.
후작은 실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아테니아에게 발레리안이 결혼 의지가 없다는 걸 알려서 그녀 스스로 떨어지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결혼에 관한 대답을 망설이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테니아도 해당 사실을 알고 있던 듯했다.
그녀만 초대했으면, 웨일러스 후작은 오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낭패만 보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 내외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덕에, 후작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쉽게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떼어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쾅!
그리고 마침내, 크리스나 백작이 참지 못하고 식탁을 내리쳤다.
“말해 보십시오, 빈켄티우스 대공. 내 딸과 결혼할 생각도 없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 겁니까? 내 딸을 그런 가벼운 상대로 대하고 있냐는 말입니다, 지금!”
존칭이 빠진 호칭과, 여전히 존댓말인 말의 어미.
그 말투가 크리스나 백작이 현재 화를 겨우 주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결국 아테니아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는 재혼할 생각이 없….”
“예, 저는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말을 끊어 냈다.
그는 방금 망설이던 때와 달리 단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크리스나 백작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드르륵- 쾅!
의자가 끌리는 소리와 함께, 크리스나 백작이 이번에는 두 손으로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로 인해 식탁 위의 그릇들과 식기가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 그럴 거면 내 여식은 왜 만나!”
크리스나 백작은 이제 완전히 존댓말이라고는 잃어버린 채 외쳤다.
그의 어깨가 흥분으로 들썩거렸다.
백작의 얼굴이 더 시뻘게지기 전에, 발레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테니아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그녀가 아니라 그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소리입니다.”
“……하!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건가?”
크리스나 백작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 소리를 냈다.
그는 잔뜩 베베 꼬인 심사를 숨기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하면, 내 딸이랑 결혼하지 않는 결과가 달라지기라도 해? 어쨌든 결혼하지 않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아무리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교제한다지만, 발레리안은 대공이고 아테니아의 아버지는 백작이었다.
아테니아가 웨일러스 후작에게 발레리안의 연인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었던 것은, 후작이 발레리안의 가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크리스나 백작이 제 딸의 연인이라고 해서 대공인 발레리안에게 마음대로 말을 놓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결혼을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앞으로 제 옆에서 가장 많은 것을 누리를 자리는 제 연인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대공 전하!”
“…리안!”
그리고 이어진 말에 이번에 흥분하여 벌떡 일어난 것은 웨일러스 후작이었다.
뒤이어 아테니아 또한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발레리안은 그런 후작의 부르짖음을 가볍게 무시했다.
“저는 테나만 원한다면, 대공비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리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발레리안이 제 옆에 앉아 있던 아테니아의 손을 테이블 밑으로 꼭 쥐며 손등을 다독였다.
자신을 믿어 달라는 의미였다.
“대공 전하,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웨일러스 후작이 재차 발레리안을 목소리 높여 부르며 기겁했다.
아테니아는 후작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아테니아는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발레리안을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꾹 눌렀다.
“……그게 정말인가?”
발레리안의 표정은 진지했고, 웨일러스 후작 또한 심각했다.
그로 인해 한참을 미심쩍어하던 크리스나 백작이 대뜸 물었다.
“빈켄티우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웨일러스 후작이 더는 참지 못하고 크리스나 백작을 향해 소리쳤다.
“크리스나 백작, 되지도 않을 욕심 따위 부리지 마시오. 어딜 감히 크리스나 따위가 빈켄티우스를 탐내!”
“뭐? 크리스나 따위?!”
웨일러스 후작의 적나라하게 드러난 속내에 크리스나 백작이 분노하여 홱 후작을 돌아봤다.
후작과 백작 사이에 사나운 시선이 오갔다.
만찬을 시작할 때의 그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판으로 이어질 뻔한 상황을 끊어 낸 것은 발레리안이었다.
“만약 크리스나 백작님께서 원하신다면, 제 말을 증명해 드리지요.”
웨일러스 후작에게 화가 났어도, 눈앞의 발레리안이 더 중요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크리스나 백작은 빠르게 후작을 무시하고 발레리안을 돌아봤다.
“증명이요? 어떻게 해 주실 겁니까?”
크리스나 백작의 말투는 어느덧 존댓말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발레리안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제가 드리는 서류를 보시면 믿음이 가실 겁니다.”
발레리안이 준비된 서류를 가지고 오라며 제 시종을 마차로 보냈다.
서류.
그 말을 듣는 순간, 아테니아는 그가 노리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그리하여 아테니아는 일부러 그들을 말리는 척, 발레리안과 크리스나 백작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녀의 성격에 가만히 있으면, 백작이 무슨 낌새를 알아차릴까 봐 그런 것이었다.
“지금 두 분, 뭐 하시는 거예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과 크리스나 백작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대번에 백작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테니아, 사내들이 이야기하는데 어딜 재수 없게 계집애가 끼어드느냐! 입 다물지 못….”
크리스나 백작이 아테니아를 거칠게 꾸중했다.
그러나 백작은 두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게 되었다.
쾅.
발레리안이 식탁을 일부러 거센소리를 내며 내리쳤기 때문이다.
“크리스나 백작님, 내가 방금 테나를 대공비처럼 대우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백작께서도 테나를 이렇게 대하시면 안 되지요.”
지금껏 크리스나 백작이 제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점잖던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살벌해졌다.
“흠… 흠, 대공 전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제 딸을 훈계하는데….”
크리스나 백작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완전히 웨일러스 후작은 이 대화에서 이방인처럼 내버려진 채였다.
완벽히 무시당한 후작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공 전하, 서류를 가져왔습… 앗!”
그리하여 웨일러스 후작은 예법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발레리안의 시종이 들고 온 서류를 제가 먼저 낚아채 버렸다.
후작이 서류 봉투에서 곧바로 서류를 꺼내 들어 읽었다.
그리고 곧, 웨일러스 후작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