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5)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테니아가 낮에만 해도 마주했던 목소리였으니까.
“자고로 암탉이 울면 집안이 기우는 법이랬다.”
크리스나 백작이 끌고 들어가려던 응접실에서 칼스이턴 대부인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식의 단속에 힘을 좀 쓰셔야겠습니다, 크리스나 백작.”
크리스나 백작의 표정이 굳었다.
백작이 사납게 제 딸을 돌아보았다.
본래가 자존심이 강한 크리스나 백작이었다.
그는 여자가 남자 하는 일에 끼어들면 되던 일도 안 된다는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표본적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집안일에 대하여 여자인 칼스이턴 대부인에게 충고를 들었으니, 자존심이 상했을 터였다.
“딸은 시집가면 가문 밖의 사람이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저는 분명 시집보내기 전까지는 완벽히 교육했다 자부합니다.”
역시나, 크리스나 백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는 아테니아를 칼스이턴 쪽에 떠넘김으로써 제 책임을 회피했다.
물론, 아테니아로서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나 칼스이턴 대부인이나 마치 아테니아가 대단한 골칫거리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암탉 하나가 울어서 기울 집안이면 기울어야지요.”
그리하여 아테니아가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이젠 제 아버지나 칼스이턴 대부인의 장단에 맞춰 줄 생각도 없었다.
무엇보다, 만약 이 두 가문 사이의 열쇠가 아테니아라면- 두 사람의 말마따나 그녀가 막 나간다고 한들, 그들이 뭘 어쩌겠는가.
“저… 저…! 되바라진 것!”
거침없는 아테니아의 대꾸에 칼스이턴 대부인이 목덜미를 잡으며 소리쳤다.
“아테니아!”
지금까지 얌전한 며느리로 잘만 살던 제 딸이 보이는 모습에 기겁한 것은 크리스나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들을 어른으로 못 만드신 분께서, 제 단속에 힘쓰라고 하시다니 참- 민망하지도 않으신가 봐요.”
그러나 아테니아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낮에 칼스이턴 대부인이 남자들은 평생 애라고 했던 발언을 두고 비꼬았다.
아테니아는 칼스이턴 대부인이 아주 기가 팍 질려서 두 번 다시 이곳에 찾아오지도 못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보세요, 크리스나 백작! 시어미한테 눈꼬리 치켜뜨고 눈 부라리는 꼴을요! 너는 시어미 말꼬리나 잡으라고 배웠더냐!”
칼스이턴 대부인이 아테니아를 손가락질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크리스나 백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백작은 늘 시어른에게 순종적으로 굴고, 여자는 집안에서 목소리를 키우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아테니아의 행동은 그와 모든 게 어긋났으니, 크리스나 백작이 생각하기에도 제 딸의 행동이 되바라지기 그지없었다.
백작은 한참을 칼스이턴 대부인과 아테니아를 번갈아 보다가, 아테니아에게 소리쳤다.
칼스이턴 대부인에게 사과하는 것보다, 제 딸에게 한 소리 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아테니아, 너 이게 무슨 버릇이냐!”
“두 분 다 논리에서 지면 그렇게 배웠냐느니 하며 버릇 타령하는 것 좀 그만두세요. 그런다고 제가 할 말 못 할 것처럼 보이세요?”
아테니아는 데자뷔를 느꼈다.
제 아버지에게 이미 한 번 그놈의 버릇 타령 그만두시라 말했는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하긴, 한 번 말했다고 변할 아버지였으면 지금 일을 이 지경으로 끌고 왔겠느냐마는.
정말이지, 아테니아는 이 상황이 지겨웠다.
이전에는 같은 상황을 또 반복하는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남편이 바람을 피운 걸 알면서도 매번 하소연만 하는지.
왜 부모님과 끊임없이 다투면서도 좀처럼 괜찮아지질 않는지.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란 건, 아무리 지겨워도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그렇기에 상황도 변하지 않으니까.
지금, 아테니아의 가족들이 그렇듯이.
인생이란 참 모를 일이었다.
언젠가는 그저 답답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어쩌다 보니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오니까.
“오늘 오실 손님이 칼스이턴 대부인인 줄 알았다면, 더 늦게 들어왔을 거예요.”
아테니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차라리 아예 안 들어오고 싶었다는 소리였다.
아까 낮에, 호수 공원에서 칼스이턴 대부인과 마주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테니아는 가문의 마차를 타고 나오면서 미리 마부에게 행선지를 일러둔 터였다.
그러니 크리스나 백작이 그녀가 갈 장소를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칼스이턴 대부인에게 아테니아가 어디 있는지를 일러준 것은 분명 아버지의 소행일 터였다.
제 아버지는 대체 어디까지 딸을 실망하게 할 참일까.
그녀가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때, 크리스나 백작가의 집사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백작님…! 지금 밖에… 밖에!”
집사의 얼굴은 매우 기뻐 보였다.
“빈켄티우스 가문의 웨일러스 원로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아테니아의 표정은 말 그대로 썩어 들어갔다.
***
웨일러스 후작의 선택은 탁월했다.
기껏 저녁 식사를 들자고 해 놓고는, 어째서인지 제법 쉽게 물러난다 싶더라니… 웨일러스의 타운하우스에서 식사하자는 초대장을 크리스나 백작에게 직접 보내온 것이다.
백작은 웨일러스 후작의 사람이 들고 온 초대장을 보자마자, 그것을 승낙했다.
칼스이턴 대부인이 보고 있다는 사실 따위, 빈켄티우스의 이름 앞에서는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크리스나 백작의 태도에 자존심이 상한 칼스이턴 대부인은 괜히 면만 구긴 채로 백작저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작은 그 후 쭉 기분이 좋았다.
오죽하면, 아테니아가 자신과 맞섰던 것도 잊어버린 듯 굴 지경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뛰어난 상인이었고, 그런 그는 웨일러스 가문이 대대로 빈켄티우스의 교육을 맡아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작은 웨일러스 후작의 초대가 크리스나와 빈켄티우스 가문 사이 인연을 맺는 일에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웨일러스 후작이 자신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크리스나 백작 일가만 웨일러스의 타운하우스에 가게 되면, 후작이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그리하여 결국 발레리안도 이 초대에 응하게 되었다.
웨일러스 후작이 호수 공원에서 원하던 대로 된 셈이었다.
물론, 발레리안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곧바로 빈켄티우스의 그림자 기사단을 불러들였다.
“지금 당장 웨일러스 후작가를 전부 털어 와. 그곳의 먼지 한 톨까지 전부.”
그림자 기사단은 외부에 드러난 공식적인 기사단과 달리, 정보를 수집하고 대공가의 뒷일을 처리하는 등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사항들을 담당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발레리안이 그들을 부른 것은 아테니아의 이혼을 도와주는 일을 포함하여, 황제와 칼스이턴의 결탁을 알아낸 일, 그리고 오늘을 포함하여 딱 세 번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림자 기사단이 필요할 만큼, 그가 어떤 일에 절실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안은 빈켄티우스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가 지금까지 북부의 귀족 중에서 점점 배가 불러 날뛰려는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둔 이유였다.
그들을 휘어잡아 빈켄티우스의 위상을 지킬 만큼의 열의 따위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결코 발레리안이 원로들이나 북부의 귀족들을 억압할 수단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웨일러스 후작은 벌집을 들쑤신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작은 아테니아를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물론, 이미 저지른 짓을 되돌릴 수 있는 재주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지만.
“그리고 북부를 정리해야겠다.”
발레리안이 평이한 어조로 덧붙였다.
그만큼이나, 그에게는 어려울 게 없는 일이었다.
“존명.”
그림자 기사단이 재빠르게 사라졌다.
***
그로부터 이틀 뒤의 정오.
웨일러스 가문의 타운하우스에는 크리스나 백작과 백작 부인, 아테니아 그리고 발레리안을 포함한 네 명이 모이게 되었다.
“만나서 반갑….”
그리고 발레리안을 제멋대로 편하게 대하려던 크리스나 백작의 계획은 완전히 허사가 되었다.
클라이브와 달리 발레리안은 180 후반대의 장신인 데다가, 기골이 장대했다.
게다가 애초에 아카데미의 깐깐한 교수들조차 어린 시절에도 어려워했던 발레리안이지 않은가.
그와 마주하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질 판에, 크리스나 백작이 제멋대로 굴 수 있을 리 없었다.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발레리안이라고 합니다.”
“흠흠, 크리스나 백작가의 오시어드라고 하오.”
그나마 두 사람의 대면은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아버지라는 점을 존중하여 존댓말을 써 주었기에, 크리스나 백작이 조금은 덜 민망해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딸의 연인을 편하게 대하지 못할 게 뭐냐며 큰소리 떵떵 쳤던 일이 더 부끄러웠을 테니까.
“벨르아나 크리스나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저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
그 후,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어머니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것을 바라보는 아테니아의 기분은 기묘했다.
언젠가는 바랐고, 언젠가는 절대 이루어질 리 없다고 생각한 장면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녀는 그 기묘함을 외면했다.
어차피, 오늘이 아니면 볼 일 없는 광경이었다.
그 뒤로 네 사람은 웨일러스 가문의 집사에게 안내받아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에는 긴 테이블 위에 완벽한 정찬이 차려져 있었다.
“모두 어서 오십시오.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웨일러스 후작은 정원에서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후작과 백작 내외가 인사를 나누고, 정찬이 시작되었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걱정과 달리, 정찬은 매우 매끄러웠다.
“혹시 대공 전하와 크리스나 영애의 결혼은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물론, 평화롭게 끝날 일 없다는 듯이- 곧 웨일러스 후작이 모두의 한가운데로 폭탄을 집어 던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