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3)
발레리안이 반사적으로 아테니아를 가리고 섰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히 느꼈다.
웨일러스 원로라고 불린 이가 자신을 어떻게 훑었는지를.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그 경멸 어린 시선.
노신사는 분명히 그런 눈으로 아테니아를 보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헬레나의 말이 옳았다.
아카데미 시절,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은 아테니아를 발레리안에게서 떼어 내기 위해 왔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그와 연애를 한다고 알려진 그녀를 몰아내기 위해 왔으리라.
“웨일러스 원로가 여긴 어쩐 일이지?”
발레리안의 말투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아테니아와 가문의 원로들이 못 만나게 막았던 그였다.
그러니 웨일러스 원로가 무슨 속셈으로 여기에 나타난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발레리안의 굳건한 등이 아테니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키가 작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가 얼마나 단단히 막아섰던지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원로의 눈에 최대한 띄지 않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흠… 헛소문이 도는 것 같아, 확인하러 왔습니다만…. 확실히, 어림도 없는 소문이더군요.”
어딜, 감히.
웨일러스 원로의 말에는 그 두 단어가 빠져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로의 말은, 아테니아의 주제가 발레리안과 소문이 나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었으니까.
“지금….”
발레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에게서 사나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발레리안은 물론,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간과한 게 있었다.
아테니아는 은근 호전적인 사람이었다.
발레리안의 기억에서부터, 아주 오래도록.
그리고 그 기질은 결혼하고 현숙한 귀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억눌렀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그의 말을 막고, 그의 팔에 자연스레 팔짱을 끼며 앞으로 나섰다.
“리안, 누구신가요?”
고개는 너무 치켜들지 않고, 시선은 정면에서 살짝 아래를 보되 상대를 마주하는 순간에는 시선을 피하지 말 것.
손끝은 나비가 꽃에 앉듯이 살포시.
걸음은 질질 끌리는 일 없이 사뿐하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게.
아테니아는 이왕 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자존심은 그런 것들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그래서 아테니아는 예법의 교본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적어도, 사교계에 나가 가장 기본적인 예법으로 무시받는 일은 당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위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 매우 용이했다.
보통, 고위 귀족들은 상대를 처음 본 순간의 가치로 판단을 끝내 버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꼭 그 대상이 아니어도 다가올 자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그건 눈앞의 웨일러스 후작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디에몬트 웨일러스 후작.
그는 대대로 북부에서 빈켄티우스의 교육을 맡아 온 가문의 가주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웨일러스 가문은 대대로 명문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나이대를 보아 아마도 디에몬트가 발레리안의 교육을 담당했으리라 추측했다.
물론, 저런 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예법을 더욱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저런 자일수록, 눈에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크흠… 흠….”
웨일러스 후작이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웨일러스 가문은 교육자 집안인 만큼, 표면적으로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예절과 교육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니 그가 이 상황에 아테니아의 집안을 문제 삼는다면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가치와 어긋나는 셈이었다.
그런데 방금 아테니아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이 말하는 가치에 어긋나는 게 없음을 보여 주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아테니아가 가장 고운 방법으로 웨일러스 후작이 괜한 트집을 잡았다는 사실을 일러 준 것이었다.
발레리안의 두 눈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변했다.
그는 새삼스레, 자신이 아테니아를 뒤로 숨기려 했던 행동이 얼마나 터무니없었는지를 깨달았다.
애초에 그녀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웨일러스 후작, 소개하지 않을 건가?”
발레리안이 나직한 목소리로 웨일러스 후작을 압박했다.
황족들 앞에서는 그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디서든 감히 먼저 입을 떼면 안 됐다.
그렇지만 사석에서, 귀족들 간에 처음 마주할 때는 또 그 예법이 달랐다.
보통 그 경우, 신분이 낮은 사람이 자신을 먼저 소개하면 윗사람이 그것을 듣고 그 소개를 받아 줄지 말지 정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웨일러스 후작의 정체를 발레리안에게 물었고, 그는 후작에게 먼저 소개하라고 명했다.
먼저 그녀가 행동으로 보여 준 바, 아테니아의 예법이 부족할 게 전혀 없다는 건 이미 입증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즉, 그녀는 지금 엄연히 발레리안과 동등하게 교제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스스로 챙긴 셈이었다.
“…디에몬트 웨일러스라고 합니다.”
결국, 웨일러스 후작은 굴욕적인 얼굴이었으나 아테니아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보란 듯이 부드럽게 미소했다.
후작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아테니아를 만족스럽게 했다.
어차피 웨일러스 후작이 발레리안과 교제한다는 이유만으로 아테니아를 곱지 않게 대할 거라면, 그녀 또한 교제 사실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가 무지해 보였다면 차라리 예법을 모른다, 그렇게 업신여기기라도 할 터였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아테니아의 예법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것 또한 후작이 스스로 무지하다고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결국, 웨일러스 후작은 그녀가 예법에 따라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음을 강제로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웨일러스 후작이 백작 영애에 불과한 아테니아에게 존댓말을 쓴 것은 그런 연유였다.
“만나서 반가워요, 웨일러스 후작님. 크리스나 백작가의 아테니아라고 합니다.”
심지어 웨일러스 후작은 일부러 자신의 직위를 빼고 말했으나, 아테니아는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
중앙 귀족들이 북부의 귀족들을 존중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날의 일이 아니었다.
중앙 귀족들은 황실을 중심으로 오래도록 권력의 척도가 되는 콧대 높은 집단이었다.
그런 이들이 귀족들의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상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북부 귀족들을 좋게 봤을 리 없었다.
그리하여 북부 귀족들의 위세가 올라간 지금도, 중앙 귀족 중에는 그들의 계보를 모르는 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예법상, 모든 귀족의 계보를 외우는 것이 기본이라고는 하나 애초에 모든 사람이 모두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예우를 다할 사람만을 골라서 외우고 다니는 이들이 좀 많던가.
적어도 아테니아는 그게 아니라는 점을 증명했다.
방금 아테니아와 한마디도 나눠 보지 않고, 겨우 그녀에 관해 들은 정보들로만 아테니아를 무시했던 웨일러스 후작과 달리.
순간, 후작의 얼굴이 시뻘게진 것은 수치를 아는 자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웨일러스 원로, 지금 데이트하던 중이었는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발레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후작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었다.
빨리 꺼지라는 소리였다.
“…흠흠, 요즘 대공 전하의 스캔들에 관하여 원로들 사이에 말이 많습니다.”
뒤늦게 부끄러움에서 빠져나온 웨일러스 원로가 굴하지 않고 말했다.
“무슨 말이 많은데요?”
그러나 대답한 것은 발레리안이 아니었다.
아테니아가 태평한 얼굴로 웨일러스 원로에게 물었으니까.
“…크리스나 영애께서는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웨일러스 후작이 멈칫하며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 아테니아가 수그러들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애초에 얌전히 있을 것이었다면, 저를 가려 주는 발레리안의 앞으로 나서지 않았으리라.
“웨일러스 후작님께서 대놓고 제 앞에서 제 이야기를 하시니 모른 척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테니아와 웨일러스 후작 사이에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다.
그 신경전을 끝낸 것은 의외로 웨일러스 후작 쪽이었다.
“……무슨 말들이 오가는지 궁금하시다고 하셨습니까?”
신경전 속에서 한참을 침묵하던 웨일러스 후작이 돌연 되물었다.
아테니아는 움찔할 뻔한 것을 애써 참았다.
갑자기 후작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나오는지 미심쩍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호의적인 게 단 하나도 없던 사람이 아닌가.
그런 자가 갑자기 제 질문에 얌전하게 대답을 해 오니, 어찌 의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궁금하시면 오늘 저녁, 제 타운하우스에서 함께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웨일러스 후작은 침묵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돌연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아 말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발레리안이 먼저 미간을 찌푸렸다.
아테니아가 자신이 후작을 상대하길 원했기에, 뒤에 가만히 있던 발레리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웨일러스 원로, 그 초대는 지나치게 급작스럽군. 원로답지 않은 일이야.”
본래 귀족 간의 식사는 최소한 일주일의 텀을 두고 초대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토록 예절을 중시하는 웨일러스 후작 가문의 가주가 하기에는 발레리안의 말대로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안 계신 마당에, 원로인 제가 북부를 오래 비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웨일러스 후작의 변명은 꽤 그럴싸했다.
“며칠 내로 웨일러스의 본가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늙은이가 급한 마음에 그런 것이니, 양해해 주시길.”
확실히 오래도록 빈켄티우스의 교육을 담당해 온 가문의 가주인 만큼, 웨일러스는 발레리안의 지적을 능구렁이처럼 잘도 빠져나갔다.
발레리안이 표정을 굳혔다.
솔직히 그는 황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의 앞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원로들이 그녀를 얼마나 적대하는지를 알리고 싶지 않은 것만 아니었다면, 웨일러스 후작 따위 단번에 꺼지라고 으름장을 놓았을 터였다.
“어떻습니까, 크리스나 영애?”
물론, 이 구렁이 같은 작자는 발레리안이 축객령을 참고 있는 이유를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웨일러스 후작은 굳이 아테니아를 콕 집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