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38화 (38/111)

38. 그들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 (2)

발레리안은 속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아테니아의 얼굴이 또다시 울지도 못하는 그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매서운 시선이 칼스이턴 대부인을 향했다.

발레리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을 때였다.

“그냥 보내 주세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그가 늘 그랬듯이, 제 편을 들어주리란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는 호수 공원에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전 시어머니와 대립하는 것은 사교계의 구설거리만 만들어 주는 셈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그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대체 제게 뭘 바라는지 모를 것 같은 발레리안의 마음이, 지금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동정심을 품은 거라면 너무 슬플 것 같았으니까.

“칼스이턴 대부인.”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등을 돌리고 대부인을 마주했다.

그녀의 표정은 그가 발견했을 때와 달리, 어느덧 단단해져 있었다.

“착각하시는 게 있는데.”

아테니아는 자신이 입은 상처와는 별개로, 기묘한 힘을 얻었다.

“제 존재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아니고 같은 걸로 정의되지 않아요.”

발레리안의 앞에서 칼스이턴 대부인의 폭언에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일부러 더욱 당당한 표정과 곧은 자세를 취했다.

“타인에게 받는 사랑의 유무와 무관하게, 저는 제 삶이 단 한 번도 부끄러운 적 없었고 늘 그 가치를 중시할 거예요.”

때로는, 스스로 내뱉은 말이 자신에게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그런 제 삶을 겨우 그런 말로 휘두르려 하지 마세요.”

지금 이 순간이 그랬다.

아테니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래, 클라이브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발레리안이 자신을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것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런다고 아테니아 크리스나의 삶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타인의 악의 어린 말 따위에 함부로 휘둘리는 것은 여태껏 살아온 자신에 대한 실례였다.

특히나 헬레나와 친구들처럼, 저를 자랑스럽게 여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더욱 그래서는 안 됐다.

“…흥! 말만 번지르르하구나!”

칼스이턴 대부인은 당당한 아테니아의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대부인은 저주를 퍼부어도 통하질 않자, 도망치듯 홱 돌아서 자신의 마차로 돌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제야 잔뜩 힘주고 있던 아테니아의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자신이 이겼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그것만으로도 칼스이턴 대부인의 폭언에 불쑥 찾아온 우울감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어느덧 훨씬 나아진 얼굴로 발레리안을 돌아봤다.

“죄송해요, 대공 전하. 기다리시게 해서….”

그러나 발레리안을 마주한 순간, 아테니아는 갑자기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가 너무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는 처음부터 그랬죠.”

당황한 아테니아와 달리, 발레리안은 그녀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웃고 말았다.

마치, 차마 미소를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어쩌면 처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그녀를 쫓게 된 순간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온 순간처럼 하나의 각인과 같았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그 순간을 아주 또렷이 기억했다.

아테니아가 그에게 처음부터 특별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같은 수업에서 교수에 의해 과제를 같이하도록 짝지어진 상대였을 뿐이었다.

그는 아카데미 졸업 후 바로 대공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 둬야 했다.

그리하여 발레리안이 정치학, 법학, 경제학, 외교학 등등 온갖 수업을 들었기 때문에 겹친 우연에 불과했다.

‘왜 유난이야?’

‘그럼, 나도 너처럼 치사한 사람이 되라는 거니?’

그래도 짝이라고,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자주 보게 되면서 그녀가 사람들과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 2명의 학생을 상대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듣게 된 건 우연이었다.

‘솔직히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그거 다 가식이라니까?’

‘맞아, 넌 꼭 이 상황에 그 영식 편을 들어야겠어? 우리 친구 맞니?’

‘친구라고 생각하니까 하는 말이야. 왜 앞에서 못 할 말을 뒤에서 하고 있어?’

대화의 내용은 2명의 학생이 발레리안을 욕하자 아테니아가 편을 들어준 듯했다.

평소에 그녀와 친하지는 않았으나, 그게 의외이지도 딱히 관심이 가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도 발레리안의 추종자는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되도록 번잡한 상황을 피해 가려 했다.

‘너 진짜 짜증 나!’

그러나 아테니아와의 말싸움에서 진 2명의 학생이 돌연 성큼성큼 걸어 모퉁이를 돌면서 그를 발견하는 바람에, 발레리안의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귀찮게 되었다.

그때 발레리안이 한 생각은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학생들 따위 무시하고 여전히 가던 길을 가고 싶었다.

‘빈켄티우스 영식, 혹시나 말하는 건데… 영식을 위해 싸운 게 아니에요.’

그러나 의외로 발레리안에게 말을 붙인 것은 아테니아였다.

‘관심 없습니다.’

‘아는데 들어요.’

단언컨대, 발레리안한테 그렇게 말한 사람은 교수도 없었다.

당시, 아카데미 시절의 아테니아는 지금보다 훨씬 다혈질적인 면이 있었다.

‘솔직히, 나도 영식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날 영식의 추종자로 착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굳이, 제 친구들과 싸워 가면서 아무도 듣지 않는 데서 발레리안의 편을 들어주고 나서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은 아주 쉽게 깨어졌다.

‘빈켄티우스 영식, 내가 경제학 수업의 짝이라서 장단은 맞춰 주지만 사실 내 말 딱히 안 듣잖아요.’

당시의 발레리안은 그래도 고등부도 진학하지 않은 나이였던지라,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도 제법 좋은 사람인 척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두 학생의 말대로 가식이 맞았다.

아테니아가 제 편을 들길래 모르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도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이랑 딱히 친하게 지낼 생각 없어서 굳이 말할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딱, 지금처럼만 지내요.’

이어지는 아테니아의 말은 또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기분 나쁘니까 거리를 두자거나,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할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발레리안이 어떻게 행동하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 같았다.

‘그럼, 왜 저들이 날 욕할 때 막아 준 겁니까?’

‘막아 준 게 아니라니까요. 난 내 행동이 부끄러워지는 게 싫을 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아테니아의 기저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는 당당함이 내재되어 있었다.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으니까.

아테니아는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대공 전하? 처음에 제가 뭘 그랬는데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의 말에 의아한 듯 물었다.

그녀는 그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테니아는 그들이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녀는 으레 그 나이대의 학생들이 그렇듯이, 자신과 발레리안이 첫눈에 서로를 알아봤다고 기억했다.

그렇지만 사실, 그는 아테니아에게 그렇게 관심이 생긴 이후로 단언컨대 인생에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아등바등해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한 번 관심을 두지 않기로 한 상대에게는 철저히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아테니아가 기억하는 서로 사이가 특별했던 그 시점에 가기까지는 발레리안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조차도 귀엽다고 생각했다.

원래가, 다들 첫사랑은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그냥, 특별한 건 아니고 아카데미 시절이 생각나서요.”

그러나 발레리안은 자신이 떠올린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꺼낼 모든 말은 결국 아테니아를 좋아한다는 말이었으니까.

두 사람의 현재 관계가 서로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발레리안은 그 사실을 톡톡히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러나 여상스러운 대답을 했다고 여긴 발레리안과 달리, 아테니아는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칼스이턴 대부인의 말들 때문에, 발레리안이 제게 가진 마음이 무엇일까 괜스레 고민했던 아테니아였다.

어차피 그와는 이루어질 관계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하필 아카데미 시절을 회상하며 저토록 웃고 있으니, 그녀는 기분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루두루 친구를 사귀었던 아테니아와 달리, 그는 오직 그녀와만 교류를 했다.

오죽하면 교수님들도 아테니아를 통해 발레리안에게 말을 전달했겠는가.

그러니 발레리안이 떠올릴 학창 시절이라고는, 아테니아와의 시간뿐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은, 결국 그녀와의 일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놓고 특별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한다.

아테니아는 그의 말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충동에 시달렸다.

자신은 이혼한 지 얼마 안 됐고, 발레리안은 미혼에 빈켄티우스 대공이다.

그러니 위장 연애 그 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시간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웃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그 충동 위로 찬물을 덮어씌우는 일은 너무나 간단했다.

“대공 전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왜냐하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가 발레리안을 불렀기 때문이다.

“…웨일러스 원로.”

발레리안이 그 노신사를 알아보고 어두운 얼굴로 상대를 불렀다.

눈앞의 노신사는 헬레나의 말에 의하면… 아마도, 아테니아를 탐탁지 않게 여길 빈켄티우스의 원로 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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