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위장 스캔들 (14)
“…그게 사실이에요?”
아테니아가 재차 확인하듯이 물었다.
“확실해요, 할머니의 방에서 황제 폐하의 편지를 발견했거든요.”
루이앙스 대부인은 유독 제 손녀에게 유했다.
그래서 세이아나는 제 할머니의 방을 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거기에 크리스나 영애와 칼스이턴 후작을 엮는 소문을 내라고 지시가 적혀 있었어요.”
순식간에 아테니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차라리 루이앙스 대부인과 손을 잡은 것이 황후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세이아나는 황후의 조카니까, 조카에게 좋은 가문의 사내를 붙여 주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수를 쓴 것이 황후가 아니라 황제라니,
‘황제 폐하께서 노린 게 뭐지?’
아테니아의 안에서 물음표가 떠다녔다.
“황제 폐하께서 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가 나를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와 혼인시키려고 한다면, 나는 피할 수 없겠죠.”
애석하게도, 편지에 이유까지는 쓰여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테니아는 아쉬움을 삼키며 세이아나의 말에 집중했다.
지금은 세이아나를 도와주기로 했고 생각은 홀로 있을 때 해도 되니까.
“크리스나 영애는 하나만 도와주면 돼요. 어차피 여행 가려고 돈은 그간 충분히 모아 뒀거든요. 뭐… 미리 받은 유산 덕에 은행 잔고도 넉넉하고요.”
세이아나는 이미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정해 놓은 듯했다.
이미 착실히 준비되어 있어 보이는 모습에, 아테니아가 의아함을 표했다.
“그럼 제 도움은 왜 필요한 거죠…?”
“막 시작한 연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어이없으시겠지만…, 제가 나라를 뜰 때까지, 대공 전하와 헤어지지 말아 주세요. 되도록, 두 분이 잘 지내 주시면 더더욱 좋고요.”
아테니아는 순간 당황했다.
이건 뭐… 들어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런 게 도움이 되나요?”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 확고한 연인이 있으면, 할머니도 억지로 빈켄티우스 가문과의 혼사를 제게 들이밀지는 못하실 거예요. 지금 제게는 그게 제일 절실해요.”
사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연애가 진짜라면 그리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결국 연인끼리 잘 지내라는 말이 아니던가.
두 사람의 위장 연애는 비밀이었고, 그러니 그걸 하기 힘들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최선을 다할게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속으로 찜찜하게 여기면서도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세이아나가 밝은 얼굴로 아테니아의 두 손을 붙잡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두 분 정말 잘 어울려요. 진심으로요. 두 분이 같이 있으니까 꼭 뭐랄까-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들 같았거든요.”
세이아나의 말에 아테니아가 애써 웃었다.
초롱초롱 빛나는 세이아나의 두 눈이 정말 진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 같아 마주하기 부담스러웠다.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연애는 거짓이었으니까.
“이왕이면 두 분이 결혼까지 가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청첩장을 보내 주시면 여행 중이어도 꼭 달려올 테니까요.”
“여행 잘 다녀오세요, 루이앙스 영애.”
결국, 아테니아는 은근슬쩍 말을 돌리고 말았다.
***
황제의 속셈이 무엇일까.
세이아나와의 대화가 끝난 이후, 아테니아는 계속 그것을 곱씹었다.
그녀는 연회가 파하고 돌아갈 때가 된 늦은 저녁까지 그것을 속에 담고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 타자마자, 아테니아는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 혹시 황제 폐하께서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결합을 원하지 않으시나요?”
아테니아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왜냐하면, 황제가 발레리안과 세이아나를 굳이 결혼시켜 이득을 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황후의 든든한 뒷배인 루이앙스 공작가의 세만 불리는 일이니, 정치적으로 외척을 경계한다면 황제가 싫어할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굳이 발레리안과 세이아나를 결혼시키려고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헛소문을 퍼트린 목적 중 남은 것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갈라 놓기 위한 것밖에 없었다.
만약, 황제가 황위 계승권을 가진 발레리안을 견제한다면 빈켄티우스 가문이 세를 불리는 일이 못마땅할 터였다.
빈켄티우스는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부를 지닌 가문이다.
그런데 만약 크리스나와 결합하여 대운하 사업을 성공한다면 제국의 경제는 모조리 빈켄티우스의 손에 들어갈지도 몰랐다.
반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갈라 놓는다고 해서, 세이아나와 그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황제는 우선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을 찢어 놓은 뒤에, 시치미를 떼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니 아테니아가 가진 의문이 비로소 모두 해소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대공 전하를 견제하시나요?”
아테니아는 세이아나도 알고 있던 루이앙스 대부인과 황제의 결탁 사실을 발레리안이 모를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다짜고짜 질문을 건넨 까닭이었다.
그리고 역시, 아테니아의 짐작은 모두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그가 쉬이 대답하지 못했으니까.
“……누가 그런 소리를 테나에게 합니까?”
발레리안은 이 사실에 관해 아테니아와 그다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은근슬쩍 대화의 방향을 바꾸려 들었다.
그러나 알게 된 이상, 그녀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리안, 대답해 줘요. 제 일이기도 하잖아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재촉했다.
그녀가 피할 생각은 말라는 듯이 계속해서 빤히 쳐다보자, 결국 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나의 추측이 모두 맞습니다. 황제 폐하는 제가 황태자의 자리를 노릴까 봐 이전부터 늘 저를 경계하셨어요.”
황위 계승권을 확 포기해 버리면 좋겠지만, 황위 계승권은 그렇게 제멋대로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국법상 황위 계승권의 포기는 다음 세대에 황위 계승권자가 세 명 이상 나올 때나 가능했다.
두 세대 전, 황위 전쟁으로 황족이 모두 죽고 그나마 남은 이는 황위 계승권을 포기한 자뿐이었다.
그로 인해 제국은 누가 황위에 오르냐를 두고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혼란에 빠졌었다.
그때 이후, 그런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는 황위에 관심이 없으신 거 아닌가요?”
아카데미 시절부터, 발레리안은 황권은커녕 빈켄티우스 가문이 가진 것들에도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그런 그를 왜 굳이 황제가 견제하는지, 아테니아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황태자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다만, 남은 아들이 현 황태자뿐이라 그 자리에 두시는 거지요.”
제국 역사상 지금까지 황녀가 보위에 오른 적은 없었다.
여인의 역할은 집안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데 있다고 여기는 제국의 풍조가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현재 황제의 밑으로 그 자식은 황후 소생의 베르나도 황태자와 황비 소생의 렉산드라 황녀가 있었으나, 황제는 렉산드라를 황위 계승 후보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현 황태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발레리안의 말대로 황태자로 내버려 두는 것이었다.
“그럼 황태자 전하께서 아까 대공 전하께 그런 행동을 하신 이유도…?”
“황태자가 술을 먹고 취한 날 제게 말한 적이 있는데… 황제 폐하께서 저와 황태자를 많이 비교하신 모양이더군요.”
발레리안이 재차 한숨을 쉬었다.
부자간의 일은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왜 자꾸 자신을 끌어들이려 드는지 피곤했다.
“그래서 황태자는 대범한 사람인 척 저를 회유하려 들다가도, 그렇게 종종 제게 본심을 드러냅니다.”
발레리안에 대한 황태자의 태도는 끊임없이 왔다 갔다 했다.
황태자는 황제가 그렇게 출중하다고 여기는 발레리안을 제가 포용함으로써, 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발레리안에 대한 강한 열등감에, 황태자는 매번 그를 이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래서 북부에만 계신 건가요?”
아테니아는 그제야 발레리안이 아카데미 졸업 후 모든 연락을 딱 끊고 북부에 틀어박힌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수도에 자주 들락거리면, 분명 제게 불순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황위에 오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아무래도 중앙 귀족들이었다.
수도에 오면 그들을 어떻게든 만나게 될 텐데, 발레리안은 그렇지 않아도 민감하게 구는 황제에게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럼 절대 저와 결혼할 일이 없다고 하신 것도 황제 폐하 때문이시겠군요.”
발레리안이 움찔했다.
그가 아테니아와 절대 결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그러나 그 상세한 내용을 그녀에게 까발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발레리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만 그런 이야기를 듣게 해서 미안합니다.”
발레리안이 세바스찬과의 대화 중에, 또 황태자에게 아테니아가 들은 말에 대하여 사과했다.
“결코 테나를 거부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제가 어찌 감히.
발레리안은 애써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럼… 대공 전하와 제가 위장 연애하는 것은 괜찮은 건가요?”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는 거짓임을 알고 있지만, 황제에게 두 사람의 연애는 진짜다.
황제가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결합을 그토록 견제했는데, 그 엇비슷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녀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이래서, 아테니아가 황제에 관한 일을 모르길 바랐다.
그녀가 알게 된다면 지금처럼 이 관계에조차 괜찮은지 의구심을 품을 테니까.
“그건 괜찮습니다.”
발레리안은 머릿속이 새하얘진 채로 애써 괜찮다 대답했다.
그가 오늘 황제에게 톡톡히 경고해 두었으니 어쩌면 이후로 황제가 아테니아를 건드릴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황제에게서 보호할 필요도 없었고, 위장 연애를 지속할 핑계도 사라졌다.
그걸 알면서도, 발레리안은 거짓을 말했다.
“저희가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연애니까요.”
발레리안은 스스로의 변명이 참으로 조악하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아테니아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게는 테나가 필요합니다, 황제 폐하 때문이라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