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위장 스캔들 (13)
세이아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변에 있던 모든 귀족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아테니아는 의외로 순순히 세이아나에게 끌려가 주었다.
왜냐하면 막무가내로 군 것치고는, 사실 아테니아를 잡고 있는 세이아나의 손에는 힘이 그다지 세게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이앙스 공작 영애와 대화할 일이 생긴다면 되도록 둘이 깔끔히 마무리 짓길 바랐으나, 눈앞의 세이아나가 자신에게 안 좋은 짓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건 그저 아테니아의 직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직감이 들어맞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둘만 휴게실에 남자, 아테니아의 손을 조심스레 놓은 세이아나가 돌연 태도를 바꾸었으니까.
“어떻게 해, 크리스나 영애, 아픈 건 아니죠? 조심히 잡는다고 잡았는데….”
곧바로 아테니아의 손을 놓은 세이아나가 그녀의 손을 살폈다.
정말로 아테니아가 제가 끌고 온 것 때문에 아프진 않을까 걱정되는 모양새였다.
아까 세이아나가 사람들 앞에서 한없이 까칠하고 도도하게 굴던 것과는 아주 상반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진짜 모습인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쩔 줄 몰라 하는 세이아나를 아테니아가 달래며 물었다.
두 사람은 그리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휴게실로 들어왔다.
괜히 오래 있었다가, 루이앙스 영애와 크리스나 영애가 심각하게 싸웠다더라, 같은 소문이 퍼지길 바라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되도록 아테니아와 세이아나의 대화가 빨리 끝나는 게 좋았다.
“아, 아… 그렇죠, 있어요!”
세이아나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크리스나 영애.”
정말이지, 뜬금없는 도움 요청이었다.
그러나 괜히 하는 말이라기엔 세이아나의 얼굴이 더없이 진지하고 심각했다.
아테니아는 어쩐지, 그 얼굴이 클라이브의 바람과 가족들의 배신으로 발레리안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자신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들어 보고, 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요.”
“오직 크리스나 영애만이 절 도와주실 수 있어요.”
세이아나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확 피어올랐다.
그녀가 냉큼 아테니아를 이끌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사실, 저는 결혼하기 싫어요.”
세이아나의 입에서 그간 참아 왔던 것처럼 말이 곧바로 튀어나왔다.
아테니아는 순간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헷갈렸다.
그녀 같은 백작가 정도만 되어도, 혼인은 의무로 여겨졌다.
그래서 아테니아의 아카데미 시절 친구 중에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무려 공작가의 영애가 혼자 살 생각을 하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결혼하기 싫어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고 말았다.
자신에게는 너무 당연했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건 기분이 묘해지는 일이었다.
“그거야 전 여행을 떠날 거니까요! 결혼하면 집안에만 얽매여야 하잖아요.”
세이아나의 두 눈은 설렘으로 반짝거렸다.
꿈에 젖은 그 시선은 이미 이곳이 아니라 멀리 떠나 있는 듯했다.
“난 돈도 많고 젊어요. 그런데 이런 내가 한 가문에 갇혀서 안주인으로만 살아가는 게 말이 되나요?”
세이아나의 말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테니아에게 충격적이었다.
아테니아는 늘 누리는 만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녀도 그것에 이견을 갖지 않았다.
엄하지만 부족함 없게 자라도록 해 주신 아버지, 유약하지만 상냥한 어머니, 자신만을 사랑하는 남편.
아테니아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으니까.
그러나 생각해 보면, 훌륭한 맏딸, 좋은 아내가 되려던 건 그들의 바람이었지, 아테니아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무엇이 되고 싶었더라.
그녀는 스스로 떠올린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루이앙스 공작님과 공작 부인은 영애의 생각을 알고 계시나요?”
“아니요, 모르실 거예요. 이야기한 적이 없으니까. 아마 기겁하실걸요?”
“…공작 부부께서 실망하시면요?”
“누구한테요? 나한테요?”
“걱정되지 않아요?”
제 선택의 결과로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아테니아에게 절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체로 어딜 가나 당당하고 자신감 있다는 평을 듣는 그녀였지만, 실은 아테니아도 실망시키기 싫어서 인내해 온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아테니아는 사실 시끄러운 파티나 사람 많은 사교 모임은 반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크리스나 가문의 장녀로서, 칼스이턴 후작 부인으로서 늘 왕성한 사교 활동을 했었다.
아카데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가정학과 경제학 중 흥미가 있던 것은 경제학이었으나, 귀족 영애로서 소양을 익히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라 내색하지 않고 가정학을 선택했다.
졸업하던 순간까지도 사실, 아테니아는 취직과 결혼을 두고 고민했다.
그녀도 자신이 상업 쪽으로 감각이 있음을 알았다.
남들이 가 보지 않은 길일지라도 제 능력을 인정받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결국 결혼을 하고 남편의 내조에 집중하는 정숙한 귀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늘 제 갈망과 타인의 기대 속에서 후자를 선택했다.
아테니아가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을 수 있던 것은, 제 선택이 늘 누군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어서였다.
잘나고 착한 딸, 현명하고 아름다운 아내.
단 한 번도 그들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한 적이 없고, 어딜 가나 그들의 자랑이 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앞에서 당당하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도달해서야, 아테니아는 그간 자신이 이혼 후 위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혼은 모두가 가는 길대로 잘 따라가고 있던 아테니아를 단번에 궤도에서 이탈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세이아나가 걱정됐다.
자신만 해도, 이혼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사교계에서 시달리고 있던가.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건 그런 거였다.
“실망하실 수도 있겠죠. 부모님도 제게 기대하던 바가 있을 테고, 어쩌면 부모님이 정한 길이 제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세이아나의 입장에 몰입하여 그녀를 매우 걱정하던 아테니아의 착각을 깨 버리듯, 세이아나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지만 그건 부모님의 기대고, 부모님의 감정이지 내 것이 아니잖아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에요.”
세이아나는 아테니아보다 2살이 어린 것을 감내하더라도, 상당히 어리게 생긴 외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이아나는 전혀 어려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 선택은 온전히 내 손에 달린 거잖아요. 주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든, 결국 결정하는 건 나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라고요.”
세이아나는… 그래, 그녀의 말대로 한 가문에만 얽매여 있기에는 너무 아까워 보였다.
“책임이란 게 얼마나 무거운데, 거기에 후회까지 얹고 싶지는 않아요.”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게 두렵지는 않아요?”
아테니아는 어쩐지 목에 메어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면 이혼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자신의 바람으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마치, 세이아나의 말이 자신에게 잘한 선택이라고 말해 주는 듯했다.
“두려워요.”
이어지는 세이아나의 대답은 또다시, 아테니아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렇잖아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미혼으로 혼자 사는 여자한테 박한지. 여자가 나이 들어서까지 결혼하지 않고 있으면 집안에 민폐라는 둥, 그 나이까지 결혼하지 못한 여자는 하자가 있는 거라는 둥….”
세이아나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늘어놓았다.
주변 왕국들은 요즘 달라지고 있다지만, 제국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의 가장 큰 의무는 집안 살림과 내조 그리고 육아를 완벽히 해내는 데에 있다고 여기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 나라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곱게 여길 리 만무했다.
그건 여성이 취직하든 안 하든 마찬가지였다.
일로 바쁘게 지내는 여자들에게도 사회는 네가 그러니까 결혼을 하지 못하는 거라는 등의 이야기를 퍼부어 댔기 때문이다.
세이아나는 현재 혼인 적령기의 나이였다.
이곳저곳 여행하다 보면, 그 기간이 훌쩍 넘을 것이 뻔했다.
그때, 세상은 그녀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워도 어쩌겠어요. 내 행복의 목적지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과 다른걸.”
세이아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쨌든 내가 계속 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건, 언젠간 나도 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거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아, 세이아나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너처럼 살 수는 없으니까, 아테니아.’
그제야, 아테니아는 앨리스가 지난 날 제게 했던 말을 이해했다.
모두가 세이아나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처음으로, 아테니아는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가 부러워졌다.
“그럼… 루이앙스 영애,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요?”
그리고 아테니아는 자신을 돕고자 했던 헬레나와 친구들의 마음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테니아는 세이아나처럼 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가진 용기가 꺾이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진심으로 세이아나를 돕고 싶어졌다.
“나는 조만간 제국을 떠날 예정이에요. 아무래도 황제 폐하까지 나서서 우리 할머니와 무언가 일을 꾸미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기가 무섭게, 아테니아는 전혀 예기치 않은 정보를 듣게 되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갑자기 등장한 황제의 존재에 아테니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반응에 세이아나가 다시 대답을 내놓았다.
“…몰랐어요? 크리스나 영애를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에게서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 꾸민 일, 황제 폐하와 저희 할머니의 합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