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33화 (33/111)

33. 위장 스캔들 (12)

현재의 루이앙스 공작은 현 황후의 사촌이었다.

본래는 백작가에 적을 두었던 현 황후가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루이앙스 공작가의 덕이 컸다.

그래서 발레리안은 루이앙스 공작가의 뒤에 황후가 있으리라 짐작했다.

제 부족한 아들을 염려하여 발레리안을 경계하는 건 황후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짐작과 확인한 사실은 달랐다.

빈켄티우스의 눈과 귀는 어디에든 있었고, 그것은 루이앙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대부인이 명령받은 편지의 필적 확인 결과… 편지를 쓴 사람은 황제였다.

발레리안이 대부인의 편지 중 빼돌린 것을 품 안에서 꺼냈다.

“발뺌은 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굳이 여기서 필적 감정을 하실 게 아니라면요.”

펼쳐진 편지에는 황제의 인장은 없었으나, 글씨체가 황제가 내리는 칙서에 있는 것과 똑같았다.

황제의 얼굴이 곧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가 쾅! 하고 황좌의 손잡이를 내리쳤다.

“그래서! 지금 빈켄티우스 대공, 네가 감히 내가 한 일에 토를 달겠다는 것이냐?!”

정곡을 찔린 자답게, 황제는 홀로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에 반해 발레리안은 한없이 차분하다 못해 싸늘했다.

“토만 달겠습니까?”

발레리안이 편지를 느릿느릿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갈기갈기 찢었다.

방금까지 황제의 편지였던 것이 발레리안의 손에 종이 쪼가리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지만, 다음에는 증거가 얌전히 사라지는 일 따위 없을 겁니다.”

대놓고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은 발레리안의 경고였다.

또한 언제든 다시 손에 넣을 수 있는 증거였기 때문에, 그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 건방진…!”

황제가 분을 참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황제는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하진 못했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고, 황권은 절대적이지 않았다.

나라의 치안은 황실 기사단이 아니라 따로 꾸려진 치안대가 관리했다.

그러면서 황실의 권한도 많이 축소되었고, 황실이 하는 일이 줄었으니 황실에서 걷는 세금도 감소했다.

그에 반해 빈켄티우스는 그 세가 조금도 줄지 않고 여전히 쟁쟁했다.

북부는 대체로 산지였고, 혹한의 계절이 길었다.

그 탓에 애초에 북부는 농업보다 상업에 공을 들였다.

북부의 귀족들이 상행하러 다니고 무역을 나설 때, 상업은 상인들이나 하는 천한 것이라며 비웃던 이들은 더 이상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륙 내의 풍조는 그 무엇보다 자본이 가장 중요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북부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게 빈켄티우스였다.

초대 황제가 관리하기 힘든 북부의 땅에 관한 전권을 빈켄티우스에게 넘겨 버린 탓이었다.

이전에는 북부에 무슨 일이 생겨도 빈켄티우스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함이었으나, 지금 와 보니 그게 수많은 상권을 쥐고 흔드는 북부의 귀족들을 빈켄티우스의 손에 싸그리 쥐여 준 셈이 된 것이다.

클레르폰 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상단은 크리스나와 빈켄티우스를 포함하여 총 다섯 곳이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 빈켄티우스의 저력은 지금까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이미 빈켄티우스가 손에 쥔 것도 많은데, 물 밑에 얼마나 더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알고 있는 황제는 발레리안을 막 대할 수 없었다.

“폐하, 아테니아 크리스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씩씩거리는 황제를 상대로 이번에는 발레리안이 대놓고 경고했다.

황제의 꽉 쥔 주먹이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렸다.

“지금까지 저는 황제 폐하의 충직한 신하로 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테니아와의 위장 연애는 대부분 발레리안의 사심 탓이 컸으나, 또한 황제에게 보내는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다.

“절 계속 충직한 신하로 있게 해 주시길 바랍니다, 폐하.”

괜히 벌집을 들쑤셔서 이런 역효과를 내지 말라는 그런 협박.

“하…! 아테니아 크리스나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내게 이리 굴면 안 될 텐데?”

황제도 이쯤 되니,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작금의 상황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렇게나 아테니아를 마음에 두고 있으면서 지금까지 멀리했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그녀를 황제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음이라.

즉, 황제는 발레리안이 말을 듣지 않으면 아테니아라는 약점을 건드리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발레리안이 픽 웃어 버렸다.

그 예기치 않은 반응에 황제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폐하, 그녀가 제 약점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인제 와서 숨겨 봐야 소용없다. 네가 아테니아 크리스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이미 명백한 사실….”

발레리안에게 마치 허세를 그만 부리라고 하는 듯한 황제의 말을, 발레리안이 끊어 버렸다.

“아테니아 크리스나가 어떻게 제 약점입니까.”

황제는 또 착각하고 있었다.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황제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고 한 건 맞았다.

그러나 그건 그녀가 제 약점이 될까 봐가 아니었다.

“지키고자 하면- 못 할 짓이 없어지고, 내게는 빈켄티우스가 있는데.”

발레리안이 황제의 반대를 핑계로 아테니아와 가까이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지킨다는 이유로, 그녀가 제 곁에서 겪을 모든 상황을 모른 척하고 제 옆에 붙잡아 둘까 봐 두려웠다.

방금 내뱉은 대로, 그에게는 빈켄티우스가 있었으니까.

그리하여 발레리안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으므로.

“빈켄티우스 대공!”

황제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게, 가 아니라 내게.

그 또한 발레리안이 사실은 황제를 그만큼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였다.

“황제 폐하.”

발레리안은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한 발 황제에게로 다가갔다.

사실, 발레리안의 행동에는 황제의 허락 따위 하등 필요 없었으니까.

“원래 하시던 대로, 저와 빈켄티우스만 건드리십시오.”

발레리안이 황제에게 새겨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그건 얼마든지 참아 줄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았다.

“제 허용한 선은 거기까지입니다.”

그 건드려도 괜찮은 범위 안에, 아테니아는 없었다.

“그럼 이만, 제 연인이 기다려서.”

제가 할 말을 모두 내뱉은 발레리안이 이번에도 황제의 허락 없이 제멋대로 돌아섰다.

발레리안이 나가고 알현실의 문이 닫히는 순간, 안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 따위가 들려왔다.

***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자리를 비운 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는 처음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와 달리,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는 아테니아에 관한 소문에 입각해 그녀가 일찍이 발레리안을 꼬여 낸 게 아니냐는 냉담한 시선이 상당했다.

그러나 이어진 발레리안의 행동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아테니아에게 먼저 구애했다고 여기게 했다.

그게 그녀에 대한 시선을 바꿔 놓은 것이다.

“어머, 어머… 그 무뚝뚝한 대공 전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줄 몰랐지 뭐예요.”

“정말로 대공 전하께서 그간 첫사랑을 못 잊으셔서 결혼을 안 하신 게 맞나 봐요.”

“크리스나 영애는 좋으시겠어요.”

“맞아요, 부러워요.”

그러나 아테니아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긍정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녀가 발레리안이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신과 연인이 되었다고 해서 혹시나 안 좋은 소리를 듣지 않을까 우려를 했던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도리어 그가 로맨틱하다며 추켜세웠다.

발레리안이 욕을 먹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확실히 이런 반응들은 아테니아를 당황스럽게 했다.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발레리안이 짐작보다 훨씬 그녀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데에 있었다.

대공이 저렇게나 아테니아를 좋아하는데, 빈켄티우스와 크리스나의 결합이 실제로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두 가문이 결합하면 제국 전반적인 경제를 쥐고 흔들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만에 하나라도 이제부터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미움을 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발레리안과의 결혼을 추호도 상상해 본 적 없던 아테니아만이 사람들이 이러는 이유를 쉽게 깨닫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그런 계산들 덕에 그녀의 주변을 둘러싼 분위기는 제법 훈훈했다.

“황후 폐하의 연회에서 시끄럽기 그지없군.”

누군가가 나타나 그 분위기를 깨 버리기 전까지는.

제 아들의 행태에 화가 난 황후는 베르나도를 이끌고 연회장을 비운 상태였다.

그런데 굳이 황후를 들먹이는 건, 사실 아테니아를 둘러싼 무리에 시비를 털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이앙스 공작 영애, 그게….”

그러나 갑작스레 당한 시비에도 사람들은 절절맬 뿐 불쾌감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 날카로운 말을 내뱉은 상대가 루이앙스 공작 영애였기 때문이다.

아테니아로서는 처음 보는 영애였다.

루이앙스 공작 영애는 황실 연회처럼 아주 중요한 연회가 아니면 대체로 사교계에 발걸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교계에만 나오기만 해도 어느 정도 추종자가 생기고는 하는 고위 귀족가의 영애치고는 드문 행동이었다.

루이앙스 공작 영애는 사교계에서 얻을 수 있는 명성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그녀는 루이앙스가의 유일한 딸이었다.

그리하여 루이앙스 공작 영애가 아테니아에게 다가올수록, 좌중은 마치 모세의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양옆으로 갈라졌다.

“크리스나 영애라고 했던가?”

아테니아에게 묻는 루이앙스 공작 영애의 목소리가 여전히 까칠했다.

“예. 아테니아 크리스나라고 합니다, 루이앙스 공작 영애.”

그러나 아테니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황궁 연회에 오는데, 루이앙스 공작가의 일원을 마주하리라 생각해 보지 않았겠는가.

그러니까 아테니아가 당황스러운 것은, 루이앙스 공작 영애의 다음 행동이었다.

“좋아, 난 세이아나 루이앙스라고 해. 크리스나 영애, 나와 대화 좀 해야겠어.”

돌연, 세이아나가 아테니아에게 통보하다시피 말을 꺼낸 후 다짜고짜 아테니아를 끌고 갔다.

귀족 간의 예법이라고는 깡그리 무시한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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