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32화 (32/111)

32. 위장 스캔들 (11)

또 한 번 연회장이 크게 술렁였다.

발레리안과 황후, 그리고 아테니아의 표정 또한 동시에 싸늘하게 굳었다.

지금, 베르나도는 황제와 발레리안이 단둘이 나눈 이야기를 발설했다.

이건 베르나도가 황제에게 간자를 심어 두었거나, 혹은 황제가 비밀을 유지하지 않고 떠벌렸다는 이야기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황실 이미지에는 좋지 않았다.

그렇기에 황후는 제 아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겨우 발레리안 한 명 도발하겠다고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이다니.

황제가 알게 되면 베르나도에게 불호령이 떨어질 일이었다.

그러나 후일의 일이 어쨌건, 지금 당장 연회장 안의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발레리안의 대답이었다.

그를 난감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베르나도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입니다만.”

그러나 베르나도가 지은 승리의 미소는 너무 이른 것이었다.

발레리안이 아무렇지 않게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군중들은 모조리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그 뒷이야기는 모르시나 봅니다.”

“뒷이야기요? 그런 게 있을 리가….”

“뒷이야기가 있고 없고는, 폐하와 이야기를 나눈 당사자인 제가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발레리안이 차분히 베르나도의 부정에 반박했다.

어차피 발레리안이 무슨 말을 하든, 도를 넘지만 않으면 황제는 그게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발레리안과 황제, 단둘만이 알고 있어야 할 대화 내용을 멋대로 유출한 것이 황태자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부모로서 그 잘못의 책임을 나눠 가져야만 했다.

애초에, 황가가 빈켄티우스를 자꾸 건드리는 데 발레리안이 참아 준 이유는 하나였다.

맞설 만큼, 굳이 빈켄티우스가 그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르나도가 아테니아를 걸고넘어진다면 말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베르나도가 주춤했다.

차마 그 입으로 내가 엿들었는데 대화 내용이 그게 아니었더라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정확히는 잘 해 볼 생각이 처음부터 없던 게 아니라, 잘 해 볼 생각을 접었던 겁니다. 처음에는 테나가 절 받아들여 주지 않았으니까요.”

언제 표정이 굳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발레리안이 말했다.

“이 연애, 제가 매달려서 시작했거든요.”

“…대공 전하!”

발레리안의 말에 아테니아는 기어코 기겁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는 그 빈켄티우스 대공이 오래도록 그리워한 첫사랑에서, 매달리기까지 한 첫사랑이 되었다.

사실, 위장 연애 제안도 아테니아가 먼저 제안한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모르는 군중은 이제 아테니아를 완전히 궁금증 어린 얼굴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빈켄티우스 대공을 그렇게 사로잡은 그녀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동동 발을 굴렀다.

발레리안이 제 체면은 생각도 하지 않은 결과였다.

더불어, 그가 그렇게 말함으로써 아테니아는 이혼녀가 미혼인 대공을 노렸다는 소문은 더 이상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모든 게 철저히 그녀에게만 유리한 상황이었다.

“…하, 안 하던 연애를 하시더니… 사람이 이상하게 바뀌셨네요.”

베르나도가 어이없다는 듯 빈정거렸다.

어디 당해 보라고 한 말이었는데, 발레리안이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자 도리어 속이 뒤집힌 것은 황태자였다.

베르나도는 어린아이처럼 제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 지금이 마음에 듭니다만.”

발레리안은 여전히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아테니아는 애꿎은 제 치맛자락만 움켜쥐었다.

황태자와 대공의 대화에 일개 백작 영애인 그녀가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두고 보고만 있자니, 두 사람 사이가 갈수록 싸늘해지고 있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그때, 문지기가 크게 외쳤다.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서는 순간, 모두가 그쪽을 향해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그 덕에 다행히도 발레리안과 베르나도의 대화 아닌 대화는 끊기게 되었다.

“모두 일어나게.”

황제는 가볍게 손을 저어 명했다.

황제의 말에 고개를 숙였던 귀족들이 모두 제자리를 찾았다.

발레리안과 베르나도의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황태자는 황제가 등장하자마자 마치 자신이 언제 역정을 냈냐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발레리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질린 것은 아테니아였다.

겨우 인사하는 손을 거절했다고 발레리안을 못 잡아 안달이더니, 그새 또 뒤바뀌는 태도가 그녀에게 클라이브를 떠오르게 했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아테니아는 황태자한테서 멀어지기 위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을지도 몰랐다.

놓지 않을 듯 꼭 쥐어진 손에, 그녀의 시선이 제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 팔을 따라 위로 올라갔다.

“미안합니다, 테나. 방금 있던 일은 이따가 제가 설명할 테니….”

아테니아와 시선이 마주치자, 발레리안이 빠르게 속닥였다.

그는 아까 베르나도를 대할 때와 달리 어쩐지 간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맺음 할 수 없었다.

“아버….”

어느덧 황좌에서 내려온 황제가 자신을 부르는 베르나도의 부름도 무시하고, 발레리안에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발레리안, 잠시 대화를 나누자꾸나.”

베르나도가 황제의 뒤에서 잔뜩 눈꼬리를 치켜뜬 채로 발레리안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제 부모를 다른 아이에게 빼앗긴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폐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제가 다음에 따로 찾아뵙는 게….”

발레리안은 더는 베르나도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그는 아테니아를 홀로 남겨 두고 싶지 않았기에 황제의 말을 거절하려고 했다.

“크리스나 영애, 연인을 내가 잠시 빌려 가도 되겠지?”

그러나 황제가 발레리안의 말을 끊고 아테니아에게 말을 거는 게 먼저였다.

일견 양해를 구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으나, 상대는 상대였다.

되겠냐고 묻는 말은, 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것을 모르진 않는 아테니아가 결국 얌전히 대꾸했다.

“폐하의 뜻대로 하소서.”

자신이 아닌 아테니아에게 대답을 받아 내는 황제의 행동에 그 순간 발레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황제는 이 대화에 그녀를 끌어들이면, 그가 거부하지 못할 것임을 이미 짐작했으리라.

“네 연인도 괜찮다니, 잠깐만 시간을 내주렴.”

황제가 짐짓 인자한 외숙부가 조카를 대하듯이 말했다.

발레리안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돌연 아테니아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속닥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엘로이데 공작 부인을 찾아요.”

“알겠어요, 다녀오세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레리안을 안심시켰다.

곧, 황제가 뒤돌아 먼저 자리를 옮기고 발레리안이 그것을 뒤따랐다.

그가 곁에서 떠나가자, 빈켄티우스 대공 때문에 감히 아테니아를 쳐다보지 못하던 무수한 시선이 그녀에게 와닿았다.

아테니아가 허리를 일부러 더 꼿꼿이 세웠다.

아마도 발레리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해서 사람을 상대해야 할 테니, 얕보일 수는 없었다.

***

황제와 발레리안은 곧바로 알현실로 향했다.

어차피, 황제는 발레리안에게 할 말이 있어서 황후의 연회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니 연회장에 나타나자마자 그곳을 비운다고 한들, 미련이 있을 리 없었다.

“저번에 내가 네게 물었을 때, 아테니아 크리스나와 먼 사이가 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황제가 황좌에 앉으며 말했다.

그는 발레리안을 대할 때면, 자신이 황제임을 제 조카에게 각인시키듯이 꼭 황좌에 앉아 발레리안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연인이 되어 있더군?”

황제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지그시 발레리안을 응시했다.

자신의 말에 똑바로, 원하는 대답을 내놓으라는 압박이 담겨 있는 시선이었다.

사실 아테니아가 제게 위장 연애를 하자는 제안을 처음 내밀었을 때, 발레리안은 이 순간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빈켄티우스에서 손을 쓰면, 칼스이턴이 대운하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 상태로 발레리안과 아테니아가 혼인하면, 자연스레 대운하 사업은 크리스나의 이름을 빌려 빈켄티우스의 손안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황제는 지금 그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칼스이턴과 크리스나만이라면, 황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대운하 사업의 이윤을 결국 어느 정도 황실에 바칠 터였다.

그러나 빈켄티우스는 황실이 그렇게 압박할 수가 없었다.

즉, 황실이 대운하 사업에서 얻고자 했던 이익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여기서는 적당히 변명으로 둘러대고 황제의 심기를 달래는 게 나았다.

빈켄티우스가 황실에 크게 밑지지는 않았으나, 결국 둘이 부딪혀서 둘 다 손해만 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발레리안은 이번만큼은 굽히지 않았다.

“제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 폐하께서는 믿지 않으시는 듯하니- 차라리 사실로 만들어 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요.”

“뭐라?”

황제가 당황하여 반문했다.

지금까지 빈켄티우스를 누르면 누르는 대로 참던 발레리안이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대놓고 황제의 행동을 비꼬는 말을 하니, 황제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발레리안의 인상은 기본적으로 매우 냉정해 보이는 편이었다.

아테니아만이 그것을 모를 뿐.

그런 그가 정색하고 쳐다보자,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황제는 그제야 자신이 발레리안의 무언가를 잘못 건드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앙스 공작가가 그렇게 움직인 것의 뒤에, 누가 계시는지를요.”

발레리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는 제 안의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발레리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루이앙스 대부인에게 아테니아와 칼스이턴 후작에 관한 소문을 퍼트리도록 지시한 사람, 폐하시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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