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31화 (31/111)

31. 위장 스캔들 (10)

발레리안이 대기하고 있던 곳은 아테니아가 드레스를 갈아입고 있던 방 바로 옆의 응접실이었다.

즉, 현재 문밖에 서 있을 사람은 그녀뿐이라는 이야기였다.

발레리안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응접실 바로 문밖에 있었으나, 아테니아에게 세바스찬과의 대화가 들렸을 터였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아테니아에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녀가 얼마나 대화를 들었을까, 그가 초조하게 생각했다.

똑똑똑.

“대공 전하, 들어가도 되나요?”

문밖에서 들려온 아테니아의 목소리는 마치 대화를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차분했다.

그 차분함에 퍼뜩 정신을 차린 발레리안이 세바스찬에게 문을 열어 주라 지시했다.

“…하, 하, 크리스나 영애께서 드레스가 전부 다 잘 어울리셔서 준비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마담 기네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방금의 툭 소리는 그녀가 들고 있던 수선 용품이 든 상자였던 모양이다.

기네스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최소한 마지막 말만 들었어도 발레리안과 아테니아 사이에 미래가 없다는 건 알았을 테니까.

귀족들한테 결국 결혼하지 않을 관계란 건 그런 것이었다.

솔직한 말로 마담으로서는 알고 싶지 않은 정보였다.

정황상 이건 꼭 함구해야 할 정보인 듯한데, 새어 나가면 외부인인 기네스가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것 아닌가.

정말이지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마담은 이만 가 봐도 좋아요.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그런 기네스를 구해 준 것은 아테니아였다.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해 달라는 의미였다.

“바로 출발하면 될 것 같은데, 괜찮으신가요?”

“…예, 괜찮습니다. 세바스찬, 바로 마차를 대기시키도록.”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는 아테니아의 행동에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한결같았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테니아의 손을 아래에서 받쳐 잡았다.

두 사람이 응접실을 나서 마차로 향했다.

마차에 오르기 전까지, 발레리안은 그녀의 눈치를 봤으나 아테니아는 그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공 전하, 그렇게 눈치 보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마차에 올라 단둘만이 남았을 때, 그녀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대공 전하께서 결혼하실 마음이 없는 것도 알고, 저도 재혼할 생각 없어요. 전하와 저의 관계는 예정대로, 필요가 끝나면 관계 또한 끝날 거고요.”

아테니아의 발은 그들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 있었다.

다시 만난 이후, 어딘가 애매모호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녀의 한마디로 정리되어 버렸다.

“테나, 제가 세바스찬과 한 이야기는….”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변명이라도 하기 위해 말을 꺼냈다.

“물론, 대공 전하께서도 어떤 이유가 있으시겠죠.”

그러나 아테니아가 그것을 끊어 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저와 전하가 다른 사이로 발전할 일은 없다는 거고, 전하께서는 저에게 굳이 그 이유를 설명하실 필요 없으시다는 거예요.”

발레리안이 속으로 침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아테니아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절대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만 들은 모양이었다.

발레리안과 세바스찬의 말을 앞에서부터 들었다면, 드레스를 왜 그토록 많이 선물하고 싶었는지 혹은 왜 그의 집안에 끌어들이기 싫어하는지를 물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 눈치를 보지 않으셔도 돼요. 진심이에요.”

아테니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그녀는 정말로 단 하나도 화가 나지 않은 듯했다.

마치, 원래부터 발레리안과의 결혼 같은 건 꿈꾸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 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테니아와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발레리안이었다.

그녀가 거기에 수긍하겠다는데, 그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왜 그대는 그토록 아무렇지도 않으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아테니아만큼은 절대 모르기를 바랐다.

그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그녀에게 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 후, 마차 안은 황궁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했다.

***

황궁의 연회장에 도착하자,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두 사람의 도착을 알렸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와 크리스나 백작 영애 드십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연회장 안의 시선들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쏠렸다.

다름 아닌 바로 어제, 수도의 전역을 뜨겁게 달궈 놓은 연인의 등장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왔구나, 빈켄티우스 대공.”

연회의 주인인 황후가 손님들을 맞이하다가 발레리안에게로 다가왔다.

그와 아테니아가 동시에 인사를 올렸다.

“제국의 달을 뵙습니다.”

“아, 영애가 우리 조카와 교제한다는 크리스나 영애로군.”

황후의 시선이 아테니아를 향했다.

빈켄티우스에 비하면 부족할 뿐, 아테니아도 중앙 귀족 중에서도 이름난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테니아도 황후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테니아 크리스나라고 합니다, 황후 폐하.”

아테니아가 공손한 태도로 자신을 소개했다.

황후의 시선이 자신을 세세히 훑는 것이 아테니아에게도 느껴졌다.

“미색이 뛰어나구나. 그리하여 우리 무뚝뚝한 조카님이 빠지셨던가-.”

황후의 말에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시선부터 말투까지- 어쩐지 아테니아는 황후가 자신을 경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뜻 들으면 아테니아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었지만, 황후의 말에는 외모 외에 그녀의 장점이라고는 단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개 백작 영애에 불과한 나를 황후 폐하께서 왜?’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와 황후의 사이를 막아섰다.

“저와 제 연인이 어쩌다가 사랑에 빠졌는지는… 저희만의 비밀로 하고 싶군요, 황후 폐하. 자랑하고자 하면 끝도 없어서요.”

발레리안의 말투는 정중했으나, 그 내용은 결국 신경 끄라는 것에 불과했다.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과 황후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가 빈켄티우스 대공이라지만, 황후에게 저러다가 난감해지는 일은 없을지 걱정이 됐다.

“외숙모라고 부르래도. 딱딱하게 구는 건 여전하구나.”

황후가 짐짓 섭섭하다는 듯이 말했다.

“제가 어찌 감히 황후 폐하께 호칭을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발레리안의 태도에는 변화가 전혀 없었다.

굳건한 거절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선황제의 사생아였고, 지금의 황제와 배다른 남매 사이였다.

당시 빈켄티우스 대공이었던 발레리안의 아버지와 황제의 사생아였던 어머니의 스캔들은 유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발레리안이 황제와 황후를 외숙부, 외숙모로 부른다고 하여 이상할 것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황위 계승권이 괜히 유효한 게 아니었다.

“형님께서 딱딱하신 게 어디 하루 이틀이랍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지요, 어머니.”

황후를 사사로이 어머니라 부른 남자가 그들의 쪽으로 다가왔다.

황태자, 베르나도 클레르폰이었다.

“공석에서는 그리 부르지 말래도.”

황후가 가볍게 황태자를 타박했다.

그러나 베르나도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조카에게는 외숙모라 부르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시고서는요.”

황태자의 태도는 여유롭고 능글맞았다.

이번 대 황실은 유독 손이 귀했는데, 그중에서도 황후의 소생은 모조리 죽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이 베르나도였다.

그 덕에 황후의 손에서 애지중지 큰 황태자는 다소 방만하기까지 했다.

“이해하게, 대공, 크리스나 영애. 내 아들이 좀 자유로운 편이라네.”

황후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에게 양해를 구했다.

사실, 굳이 그럴 것 없는 일인데도 그랬다.

황후의 말에 황태자의 입이 샐쭉해졌다.

“어머니는, 제가 뭘 어떻다고요.”

투덜거리는 황태자의 행동에 황후가 한숨을 삼키는 게 아테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황후는… 그래, 이상할 정도로 발레리안을 살피고 눈치를 봤다.

황후의 시선이 발레리안과 베르나도의 사이를 오갔다.

아테니아는 이 기묘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졌다.

그때, 불쑥 아테니아의 앞으로 한 손이 내밀어졌다.

“크리스나 영애라고 했던가? 난 베르나도 클레르폰이라고 해.”

귀족적이기보다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한 태도였다.

아테니아는 사교계에서 본 적 없는 행동에 잠시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황태자!”

황후가 질책하듯 작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도는 악수하자는 듯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순식간에 난감해졌다.

황태자의 인사를 거절할 수도,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황태자처럼 그에 대한 예법도 지키지 않고 덜컥 그 손을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와 황태자 그리고 빈켄티우스 대공이 몰려 있었다.

사람들이 시선도 함께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황태자에게 예법에 어긋나는 무례를 저지르면, 아테니아의 평판은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데 더 바닥으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그때, 발레리안이 베르나도의 손을 덥썩 잡았다.

“형님, 저는 크리스나 영애에게 인사를 청했습니다만?”

베르나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발레리안이 무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는 테나가 다른 사내와 손끝 하나 닿는 것도 싫습니다. 제가 투기가 심하여 그러니, 황태자 전하께서 이해하시지요.”

연회장 안이 크게 술렁거렸다.

유부녀나 유부남이 연서를 받아도 오히려 그들의 매력을 증명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게 사교계였다.

그런 곳에서 도를 넘는 질투는 오히려 치졸하게 여겨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지금, 아테니아에게 손끝도 대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발레리안의 시선이 마치 경고하듯이 똑바로 베르나도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받은 황태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싹 달라졌다.

그저 여유롭던 지금까지와 달리, 베르나도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황제 폐하와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실 때는 크리스나 영애와 잘 해 볼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니… 말이 달라지셨네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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