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30화 (30/111)

30. 위장 스캔들 (9)

발레리안은 이미 연미복을 완벽히 차려입은 뒤, 아테니아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는 응접실 안에서 얌전히 앉아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테나, 드레스를 입어 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혹시 옷이 마음에 안 듭니까?”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드레스를 하루 만에 무려 열 벌이나 준비하게 해 놓고서는 부족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그녀는 다른 의미로 차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하. 다 예뻐요. 다 예쁜데….”

아테니아가 말끝을 흐렸다.

기껏 발레리안이 준비해 준 것들이었다.

거절 끝에 그의 마음이 상할까 봐 걱정됐다.

“그럼,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나 발레리안이 물어 오는 순간, 아테니아는 그저 제가 느낀 것을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과해요.”

한 번 결심한 아테니아의 말투는 단호했다.

이미 타운하우스의 고용인들은 모두 물려 둔 뒤였기에, 그녀는 거리낄 게 없었다.

“저희가 진짜 연인도 아니고, 37벌이라니… 그 모든 걸 받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워요.”

발레리안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그가 조심스레 변명했다.

“테나, 그 정도는 빈켄티우스의 대공비가 1년에 쓸 수 있는 금액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티도 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정도는 아테니아에게 주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설득하고자 그녀의 안색을 열심히 살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녀의 단호함 앞에 끊겨 버렸다.

“빈켄티우스의 사정이 어떤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받기에 과하다는 거예요.”

아테니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무리 남들의 눈에 연인으로 보이기 위한 눈속임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아테니아는 대공비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가 빈켄티우스의 돈을 쓰는 데에 있어, 대공비가 쓸 내탕금을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자신이 절대 대공비가 될 일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설령 발레리안이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상대는 공작가나 하다못해 후작가가 될 것이다.

그녀는 제 것도 아니고, 제 것이 될 일도 없는 자리에서나 아무렇지 않게 대공비나 누릴 권한을 제 것처럼 여기며 방만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마담에게는 미안하지만, 주문 제작을 맡겼던 드레스 10벌은 아직 제작에 들어가지도 않았으니 환불해 주세요.”

어차피 하루 만에 드레스 10벌을 손보느라, 주문 제작을 맡긴 드레스에는 손도 댈 수 없었을 것임이 자명했다.

그러니 아테니아는 그것이라도 돈을 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7벌의 드레스는….”

아테니아가 생각하기에, 문제는 27벌이나 되는 드레스였다.

이미 그녀의 몸에 맞추어진 드레스 10벌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녀가 가져야 할 판이었다.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17벌을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아테니아는 골이 아팠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까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요, 테나. 환불은 하지 않을 겁니다.”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왜요???”

아테니아가 당황한 얼굴로 두 눈을 깜박거렸다.

“어차피 우리가 사귀다가 헤어지는 과정을 보여 주려면, 앞으로도 함께 많은 파티에 가야 할 겁니다. 드레스는 그때마다 입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많아요. 시즌이 곧 끝난다고요. 37번이면 하루에 한 벌씩 입어도 다 못 입어요.”

1년에는 계절별로 4가지의 시즌이 있었다.

그리고 현 시즌은 이미 반절이 넘어간 참이었다.

즉, 이 시즌에 맞춰 만든 27벌과 만들 10벌 중 무언가는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하리란 것이었다.

작년에 유행했던 드레스를 새로운 해에 입는 귀부인이나 영애는 없었으니, 그 드레스의 운명은 말 그대로 그저 옷방 행인 셈이었다.

그 값비쌈의 결정체인 기네스의 드레스를 그저 방에 처박아 두기 위하여 사들인다니.

부유하게 자라 온 아테니아로서도 기함할 일이었다.

그녀의 경제 관념이 싹 사라진다면 모를까, 아테니아는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럼 주문 제작 맡긴 10벌은 다음 시즌 드레스로 해 달라고 하겠습니다.”

발레리안이 이쯤에서 타협하자는 듯 말했다.

그러나 만약 이 기세라면, 지금 당장 10벌을 뒤로 미룬다고 해도 다음 시즌에 또 감당 못 할 드레스의 산이 쌓일 것만 같았다.

아테니아는 그러지 않길 바랐다.

“대공 전하, 그 10벌이 문제가 아니라….”

아테니아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발레리안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빈켄티우스에서는 큰돈도 아닙니다. 그런 금액 때문에 이미 사들인 드레스를 물리는 건, 오히려 빈켄티우스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이에요.”

발레리안의 표정은 그의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순간 할 말이 없어져 시선을 내리깔았다.

빈켄티우스는 애초에 귀족들 중에서도 그 급을 따질 수 없는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가주인 발레리안이 그렇다는데, 그녀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냥, 아테니아는 어쩐지 속이 조금 답답했다.

순간 그녀와 그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두 사람이 이런 식으로 의견이 갈리는 것은 아카데미 시절에도 없던 일이었다.

게다가 사실 그간 겪은 일이 하도 휘몰아쳤기에 정신이 없었을 뿐,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사이에는 5년이라는 간극이 있었다.

그 간극의 일면이 갑자기 드러났으니, 두 사람이 당황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똑똑똑.

“크리스나 영애, 이제 슬슬 준비하셔야 연회에 늦지 않을 듯합니다.”

문밖에서 집사의 재촉이 들려오지 않았더라면,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은 한참을 침묵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노크 소리에 마치 도망치듯 문으로 향했다.

“저는 준비하러 가 볼게요. 드레스는….”

드레스는 여전히 아테니아가 가만히 받기에 부담스러웠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발레리안이 저렇게까지 대단치 않은 것이니 가지라는데.

“드레스는, 대공 전하 뜻대로 하세요.”

결국 아테니아는 제 의견을 접고 말했다.

탁.

그녀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발레리안은 그 자리에서 닫힌 문을 한참 쳐다볼 뿐이었다.

***

“아가씨와 다투셨습니까?”

연륜 많은 집사는 발레리안과 아테니아 사이의 이상 기류를 금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티가 나던가, 세바스찬?”

집사의 말에 움찔한 발레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어.”

단언컨대, 아테니아에게 그렇게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발레리안이 마른세수했다.

‘빈켄티우스의 사정이 어떤가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받기에 과하다는 거예요.’

아테니아의 말은 그녀가 대공비가 아니고, 될 일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다지 틀릴 게 없는 전제인데, 그 순간 왜 괜히 속이 뒤집혀서 성을 냈는지 모를 일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아가씨한테 최고의 드레스들을 선물하시겠다고 그렇게 들뜨셔 놓고,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않고요.”

세바스찬의 말대로, 발레리안은 가장 좋은 것들을 아테니아에게 잔뜩 안겨 주고 싶었다.

실은, 그게 늘 발레리안이 바라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무엇을 주어도 부족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바람과 달리, 그의 입장에서는 아주 작은 것을 주었을 뿐인데도 그것을 칼같이 잘라 냈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공식적으로 드레스를 선물해도 된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으나, 아테니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가짜 연애.

그녀는 지금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의 진실을 조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홀로 들떴던 자신이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발레리안은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짜는 가짜일 뿐, 진짜가 아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짜가 아니라 진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그러나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와 진짜 연인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지금의 관계 이상으로, 테나에게 무얼 해 줄 수 있겠어.”

왜냐하면,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관계가 똑바로 정의되는 순간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아테니아와의 연애가 진짜가 되고, 연애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 분명히 주변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두 사람을 이상하게 바라볼 터였다.

그리고 대체로, 그 이상하게 보는 시선은 발레리안보다 아테니아에게 더 매정할 것이다.

그녀가 그런 눈초리를 받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아테니아와 결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말한 대로, 평생 결혼할 생각 따위 없었으니까.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그와 아테니아 사이 존재하는 관계가 유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관계에라도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자기 마음 편해지자고 그녀에게 당신을 위해 이것저것 해 주고 싶으니 받아 달라고 한다면?

아테니아는 당연히 그 이유를 궁금해할 터였다.

그건 그녀를 희망 고문하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테니아에게 이 관계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같은 건 제시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니 발레리안은 세바스찬의 말대로 솔직해질 수 없었다.

발레리안의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녀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나아가거나 끝이 나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하아. 아가씨와 결혼하시면 되잖습니까.”

세바스찬이 여전히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발레리안이 정색하며 대꾸했다.

“내 집안이 어떤 곳인지 잊었나? 거기에 테나를 끌어들일 수는 없어.”

발레리안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두 번 다시 그런 소리 하지 마. 내가 테나와 결혼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툭.

그 순간, 문밖에서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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