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위장 스캔들 (8)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와 진짜로 어떻게 잘 해 볼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흔들리는 그의 모습은 크리스나 백작의 불안감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클라이브의 얼굴 위로 아테니아와 크리스나 백작 중 누구의 편을 들어야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셈하는 속이 뻔히 드러났다.
“클라이브, 이 애는 어떻게든 독하게 자네와 이혼을 한 애야. 그런 애가 자네와의 재혼할 것 같은가? 나를 믿어야지!”
크리스나 백작이 말했다.
그런 애.
아테니아는 제 아버지의 호칭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자신이 크리스나 가문보다 아래라는 것을.
“테나….”
그 순간,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아테니아의 팔을 조심스레 잡았다.
아테니아가 제 어머니를 돌아봤다.
크리스나 저택에 찾아왔다가 어머니에게 실망한 이후로, 처음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
“…아버지를 곤란하시게 하지 마렴.”
그 오랜만에, 아테니아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재차 실망을 주었다.
탁.
표정이 단번에 굳은 아테니아가 백작 부인의 손을 쳐냈다.
“어머니야말로, 제 일에 끼어들지 마세요.”
“테나…!”
크리스나 백작 부인은 제 딸의 단호함에 충격 먹은 듯 손을 바르르 떨었다.
본래도 유약한 어머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아테니아로서도 썩 속이 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가 고개를 돌려 크리스나 백작을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이렇게 구는 아테니아의 태도에 어머니에게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냐며 크리스나 백작이 꾸중했을 터였다.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은 클라이브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라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정말이지, 모든 게 짜증 나고 꼴이 우스웠다.
“아버지, 보셨죠? 지금 이런 상황에 저 자식을 믿으실 수 있겠어요?”
아테니아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겨우 한두 점 억지로 씹어 삼켰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체할 것 같았다.
여유로운 척,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음식을 입에 담았는데 괜히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뭐?”
클라이브를 설득하는 데 바쁘던 크리스나 백작이 그제야 아테니아를 돌아봤다.
“내가 고작 몇 마디 했을 뿐인데,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재고 있잖아요. 그런 자식을 아버지는 진짜 믿을 수 있냐고 여쭌 거예요.”
아테니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제야 아까부터 낯빛 좋던 클라이브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 날 속인 거야?”
클라이브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아테니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볍게 그 물음을 무시했다.
처음부터, 아테니아에게 있어 클라이브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의 목적은 클라이브와 크리스나 백작 사이에 서로에 관한 불신을 심어 놓는 것이었으니까.
“제 말에 두 사람 다 흔들리는 걸 보니, 크리스나 백작가와 칼스이턴 후작가에서 나눌 대운하 사업의 수익 배분율을 재조정하는 건 아무래도 아직 말만 오간 모양이네요.”
크리스나 백작과 클라이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아테니아가 그런 걸 계산하고 있을 줄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그녀를 너무 우습게 봤다.
이미 칼스이턴과 크리스나 사이에 수익 배분율에 관한 계약서가 다시 오갔다면, 크리스나 백작이 클라이브에게 저렇게 매달릴 리 없었다.
게다가 이미 준 것을 빼앗아 올 수도 없고, 지금 칼스이턴에서 크리스나에게 주기로 한 것도 속이 쓰릴 텐데 더 내어줄 리도 없었다.
그러니 결론은 아직 크리스나 백작과 클라이브 사이에 구두 약속만 오갔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두 가문 사이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여지가 얼마든지 충분했다.
“만약 나를 굳이 억지로 재혼시키려 든다면.”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제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진짜로 칼스이턴이 주기로 한 수익은 내가 가져갈 거예요.”
아테니아는 그리고 이어, 클라이브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너도 잘 생각해. 크리스나에 그걸 줘서, 진짜로 네가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클라이브의 표정은 이제 굳어서 나아질 줄을 몰랐다.
“저는 외출 준비로 바빠서, 이만 일어날게요.”
아테니아가 식당을 나서려던 찰나, 아이레스가 그녀를 붙잡았다.
“이렇게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리면 나더러 어쩌라고…!”
“하.”
아테니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아이레스는 지금, 제가 불편한 상황에서 밥을 먹기 싫으니 그녀더러 상황을 수습하라는 것이었다.
탁.
아테니아가 이번에도 단호하게 제 남동생의 손을 쳐 냈다.
“네가 애야? 너 알아서 해.”
“누나!”
아이레스가 다시 한번 아테니아를 붙잡으려는 듯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
아테니아가 외출 준비로 바쁘다는 건 괜한 말이 아니었다.
오늘은 황후가 주최하는 연회에 발레리안이랑 함께 참석을 해야만 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간단한 준비 후에 마차에 올라 빈켄티우스의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어제 갑자기 크리스나 백작이 의상실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드레스들을 사기만 하고 피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크리스나 백작저로 그 드레스들이 왔다가는, 제 아버지가 또 상상의 나래를 마구 늘어놓을 것이 분명했다.
때문에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전서를 보내 드레스를 대공가에 두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공가에서는 의상실 마담, 기네스와 그 조수들이 아테니아의 드레스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크리스나 영애.”
대공가의 타운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오늘도 아테니아를 마중 나온 것은 그곳의 집사였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은 그녀가 타운하우스의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선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아쉬움을 느꼈다.
어쩐지, 그녀가 도착하면 발레리안이 마중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그리고 순간, 자신이 한 생각을 인지한 아테니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레리안과 그녀가 진짜 연인 사이도 아니고, 심지어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는 사이다.
되지도 않는 상상이었다.
아테니아가 스스로를 꾸중했다.
“대공 전하께서는 크리스나 영애의 마중을 나오려고 하시다가 시종들에게 붙잡혀 계십니다. 대공 전하께서도 준비하셔야 해서요.”
그러나 집사는 마치 그런 아테니아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레리안이 마중 나오지 못한 이유를 알려 주었다.
“아… 네, 네.”
괜스레 민망해진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반복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던가.
발레리안도 연미복을 입어야 할 텐데.
그녀가 또 한 번 스스로를 꾸중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아테니아는 기네스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집사가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
그러나 안으로 발을 딛던 아테니아의 걸음은 응접실 안의 드레스들을 보는 순간 멈추고 말았다.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드레스는 한 벌이 아니라, 무려 열 벌이었다.
“크리스나 영애!”
그리고 어제까지만 해도 화사한 얼굴이었던 기네스가 퀭해진 얼굴로 아테니아에게 훌쩍 다가섰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아테니아가 마담에게 물었다.
“마담, 왜 드레스가 여러 벌이죠…?”
귀족들의 드레스란 레이스와 보석, 그 외에 귀한 옷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마디로 다루기가 진짜 진짜로 까다롭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아무리 완성품인 드레스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아테니아에게 맞게 손보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와 발레리안이 아무리 오전에 의상실을 찾아갔다고 할지라도 열 벌을 하루 만에 모두 손본 것이다.
그제야 아테니아는 기네스와 그 조수들의 얼굴이 전부 퀭한 이유를 깨달았다.
저 열 벌을 모조리 손봐야 했으니, 꼬박 밤을 새우지 않고서야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22벌 중 적당한 것으로 골라 준비된 한 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아테니아의 예상이 완벽히 빗나갔다.
“…그게, 대공 전하께서….”
기네스가 울 듯 말 듯 한 얼굴로 대꾸했다.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 의상실의 수익에 달하는 비용을 모조리 낼 테니 크리스나 영애께서 원하시는 대로 고르실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하셔서요.”
아테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고작, 그녀가 원하는 드레스를 입게 하기 위해서 발레리안이 낸 금액에 어안이 벙벙한 탓이었다.
“사실 27벌 모두 준비하라고 하셨는데, 도저히 그건 무리라고 사정 사정을 했지요….”
기네스의 조수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아테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7… 벌이요???”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분명, 그녀가 크리스나 백작이 오기 전에 기네스의 의상실에서 입어 본 드레스는 22벌이었다.
그런데 왜 5벌이나 더 늘어 있단 말인가!
“혹시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그 외에도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추가로 드레스 10벌을 주문 제작 맡기셨으니까요.”
기네스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아테니아는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27벌이 아니라 37벌이라니!
최소한 이틀에 한 벌씩은 갈아입어야 한 시즌 안에 다 입을 만한 양이었다.
“마담,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요?”
결국, 아테니아는 이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틀에 한 번씩이면 그녀는 한 시즌 내에 열리는 모든 파티를 다 참석해야만 했다.
다 입지도 못할 드레스를 어쩌자고 이토록 많이 주문했는가.
그것도 하나하나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에 해당하는 드레스를!
절대 그냥 받을 수 없었다.
진짜 연인 사이였어도 심할 판에, 가짜 연애에서 이런 행동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대공 전하와 이야기 좀 해야겠어요.”
아테니아가 방금 들어왔던 방을 도로 나섰다.
그녀는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를 통해 곧바로 발레리안에게로 안내받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