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위장 스캔들 (7)
아테니아는 순간 그 뻔뻔한 면상에 물이라도 끼얹고 싶어졌다.
애꿎은 물을 낭비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아침부터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발휘한 마지막 이성이었다.
“…저 자식이 왜 여기 있어요?”
하지만 아테니아는 할 말만은 참지 않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노골적인 삿대질로 불청객을 가리켰다.
클라이브 칼스이턴.
그가 크리스나 백작의 왼편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원래라면 아테니아의 남편으로서 앉아야 할 자리에.
그러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은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전남편이라지만, 네 남편이었던 사람에게 삿대질이 뭐냐. 손 내려라, 아테니아.”
크리스나 백작은 도리어 아테니아를 꾸중할 뿐이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어서 제 아버지를 바라봤다.
어제까지만 해도 완전히 마음이 빈켄티우스의 쪽으로 기운 듯하더니, 갑자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클라이브를 가족 식탁에 앉혀 놓았단 말인가.
“그러지 말고 와서 앉아, 테나. 아침 먹어야지.”
클라이브가 제 옆자리를 빼 주며 아테니아에게 말했다.
그녀가 매서운 눈으로 홱 그를 노려봤다.
“누구 멋대로 테나야, 테나는. 클라이브, 네가 지금 나랑 애칭 부를 사이야?”
그들은 엄연히 전부인과 전남편 사이다.
단언컨대 애칭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이였다.
“씁. 아테니아, 네 남편이었던 사람한테 너라니.”
그러나 이번에도 제재는 크리스나 백작에게서 들어왔다.
아테니아는 어이없음을 참지 않고 제 아버지를 돌아봤다.
“아버지, 저 자식이 대체 뭘 제안했길래 이러시는 거예요?”
크리스나 백작이 괜히 클라이브의 편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그녀는 단언컨대 클라이브가 제 아버지에게 뭔가 혹할 만한 제안을 했다고 확신했다.
“제안은 무슨 제안. 허튼소리 하지 말고 아침 먹으러 왔으면 자리에 와서 앉기나 해라.”
크리스나 백작이 미간을 구기며 아테니아를 타박했다.
그러나 제 아버지가 역정을 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녀는 클라이브가 무언가 크리스나 백작에게 거래를 제시했음을 확신했다.
아테니아는 순간 입 안쪽의 여린 살을 질끈 깨물었다.
정말이지, 제 아버지한테 좋은 딸이 되려고 해도 크리스나 백작은 그녀를 질리게 만들었다.
어제는 빈켄티우스였다가 오늘은 칼스이턴이다.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의 입맛대로 아테니아를 팔아넘기기 위하여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제 아버지의 저울질에 이리 휙, 저리 휙 휘둘리는 중이었다.
천불이 솟았다.
끼이이익.
아테니아가 보란 듯이 상석의 오른편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제 심기가 불편함을 드러내듯이, 일부러 의자를 끄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곧바로 크리스나 백작에게서 다시 한 마디가 들려왔다.
“예법에 어긋나게 뭐 하는 짓이냐.”
아테니아는 그 말이 퍽 우습다고 생각했다.
어제, 크리스나 백작도 클라이브가 크리스나의 돈을 빼돌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자를 끌지 않았던가.
그런데 인제 와서 자신은 그런 적 없던 척, 그녀에게 훈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어제 아버지도 하신 실수잖아요? 저도 어제 아버지가 그러셨듯이, 기분이 좋지 않아서 한 실수이니 이해하세요.”
아테니아가 어제를 콕 집어 말했다.
그러자 크리스나 백작이 그녀에게 경고하듯 노려봤다.
어제는 칼스이턴을 당장이라도 버릴 듯했다가, 오늘 또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으니 여간 찔리기도 찔릴 터였다.
“큼, 내 집에서 식사하러 왔으면, 조용히 밥 먹도록 해. 밥상머리에서 투정하는 꼴 보기 싫다.”
크리스나 백작이 괜스레 헛기침하며 아테니아에게 엄포했다.
끼이이이이익.
의자를 끄는 것보다 훨씬 더 소름 끼치는 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아테니아가 나이프로 접시를 긁은 탓이었다.
“윽, 뭐 하는 거야, 누나!”
소리에 예민한 아이레스가 신경질적으로 아테니아에게 소리쳤다.
그럴수록 그녀의 기분은 더욱 뒤틀렸다.
남동생이란 놈은 제 기분에 거슬리는 소리 하나 참지 못하면서, 클라이브와 아테니아가 어떻게 이혼했는지 뻔히 알면서도 이 상황을 침묵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가족이었다.
“아버지도 대단하시네요, 어제는 클라이브가 크리스나의 돈을 등쳐먹은 도둑놈이라며 욕하시더니… 오늘은 겸상하시고. 생각보다 비위가 좋으신가 봐요.”
“아테니아!”
크리스나 백작이 당황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아테니아를 불렀다.
나라님이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지만,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는 이미 했던 욕도 조심하게 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아테니아가 대놓고 크리스나 백작이 클라이브를 욕했음을 까발리니, 백작은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클라이브의 기분을 엉망으로 만들어 이 자리에서 쫓아낼 수만 있다면, 아테니아는 더한 말도 할 수 있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칼스이턴과 크리스나 사이에 오해가 있었고, 그것을 오늘 풀었으니까요.”
그러나 클라이브의 한마디로 아테니아의 도발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마치 대단한 대인배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방금 들은 제 욕을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하하…! 역시 우리 사위가 마음이 넓구먼!”
클라이브가 아무렇지 않게 넘기자, 크리스나 백작 또한 금세 여유를 되찾았다.
마치, 여기에서 열을 내는 아테니아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녀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혼까지 했는데 사위는 무슨 사위란 말인가.
정말이지, 꼴값들을 떨고 있었다.
“하, 클라이브 저 자식이 뭐… 대운하 사업의 수익 배분율이라도 크리스나 쪽에 유리하게 해 주었나 보죠?”
눈매를 가늘게 뜬 아테니아가 떠보듯이 말했다.
지금 당장 칼스이턴에서 크리스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구미가 당길 제안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누나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게 정답이었다.
생각 없는 아테니아의 남동생이 그녀가 내건 가정에 놀라 대답을 해 주었으니까.
“아이레스!”
크리스나 백작이 드물게 아이레스에게 역정을 냈다.
아테니아에게 비밀로 할 예정이었던 듯했다.
비밀을 들킨 클라이브의 표정도 제 욕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
아테니아가 기가 막혀 웃음을 터트렸다.
대운하 사업의 수익이라면, 확실히 크리스나 백작이 빈켄티우스 대공가를 제치고서라도 탐낼 만했다.
대운하 사업을 제대로 성공시킨다면, 크리스나 백작가의 작위가 상승하는 것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사람이 돈이 차고 넘치면 그 다음은 명예욕에 시달린다고 했던가.
나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를 가지고도 아직 백작가라는 사실에 불만을 지닌 크리스나 백작이었다.
애초에 대운하 사업을 통해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이 노리는 것은 단순한 돈뿐만이 아니었다.
대운하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고 그 수익이 상상을 초월하게 되면, 어차피 황실은 이것에 어떻게 되든 숟가락을 얹으려 들 터였다.
정치적 수단으로 황실이 상업을 방해할 방법은 많았으니, 크리스나든 칼스이턴이든 훗날 있을 황실의 개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황실에게 일부를 내어주어야 함은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은 황실에게 적당한 배분을 해 준 후, 황실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어 낼 작정이었다는 말이다.
황실에게 내어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황실에서 받을 것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클라이브가 지금 크리스나 백작에게 무려 그것을 양보한 것이다.
“네가 그걸 양보했다고? 왜?”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에게 의문을 표시했다.
대운하 사업의 엄청난 수익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수익의 단 1%라고 할지라도, 상당한 돈에 해당한다.
아테니아가 알기로, 크리스나 가문과 칼스이턴 사이 수익 배분은 50 대 50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고작 몇 프로를 내어준다고 해서 혹했을 리는 없으니, 아마 최소한 10%는 크리스나가 수익을 더 받게 되었을 터였다.
말이 10%지, 금전적 이익으로 따지자면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아테니아, 네게 미안해서 그렇지.”
클라이브가 이전에 아테니아를 꼬실 때 썼던 다정한 낯을 꾸며 내며 말했다.
물론, 이제는 그것이 온전한 거짓임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는 역겨움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내게 미안해서, 크리스나에 대운하 사업의 수익을 양보하겠다고?”
아테니아가 헛웃음을 지었다.
클라이브의 바람으로 피해 입은 건 자신인데, 왜 그에 관한 보상은 크리스나와 칼스이턴 사이에서 그녀를 쏙 빼고 오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차라리 크리스나에 주기로 한 수익만큼을 나한테 직접 준다고 하면, 너와의 관계 다시 생각해 볼게.”
아테니아가 불쑥, 말을 꺼냈다.
“아테니아!!!”
그 순간 식탁 위로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제 딸의 말은 제대로 들은 척도 하지 않던 크리스나 백작이 마침내 아테니아의 말이 제대로 귓구멍에 들어간 모양인지, 분노에 차 목소리를 키웠다.
“클라이브, 괜한 소리 듣지 말게나. 저 애가 그걸 받는다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두 사람의 재혼은 내가 잘 생각해 볼 테니….”
크리스나 백작이 얼굴색을 싹 바꾸며 클라이브를 돌아봤다.
클라이브가 정말로 아테니아의 말대로 크리스나가 아니라 그녀에게 수익을 배분할까 봐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물론, 아테니아는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클라이브, 너도 알지? 내 부모님은 너와의 이혼을 반대하셨던 거. 근데도 나는 결국 너랑 이혼했어. 재혼이라고 다를 거 같아? 부모님이 억지로 재혼을 시키려고 하셔도, 나는 벗어날 방법이 있어.”
아테니아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녀는 아까 화를 내던 것과 달리, 지극히 자신의 말만이 사실인 것처럼 여유롭게 눈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칼질했다.
그 우아하고 흔들림 없는 태도가 아테니아의 말에 신뢰성을 더했다.
클라이브의 두 눈이 흔들렸다.
“자, 어떻게 할래?”
아테니아가 아주 오랜만에 클라이브를 향해 달콤하게 웃어 주며 물었다.
그녀는 이제 죽도록 미운 사람 앞에서도 이렇게 웃어 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