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27화 (27/111)

27. 위장 스캔들 (6)

“…무슨 조건 말이냐.”

아테니아는 새삼 빈켄티우스 대공가가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아버지가 딸의 말을 이렇게 경청하게 만드는 걸 보면 말이다.

솔직히, 크리스나 백작이 여인의 말을 집중하여 듣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칼스이턴 후작가와의 관계를 정리해 주세요. 저도 그래야 빈켄티우스 쪽에 면이 설 것 아니에요.”

“그건….”

크리스나 백작이 멈칫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버지는 칼스이턴과 빈켄티우스 사이에서 저울질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설마, 빈켄티우스 가문 앞에서 저를 난처한 입장으로 만드시려는 건 아니죠?”

아테니아가 제 아버지를 떠보듯 말했다.

“그럴… 리가, 그저… 사업적 이해 관계가 있으니 어쩔 수 없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리 제 딸에게 별의별 행동을 다 했던 크리스나 백작이라고 할지라도, 대놓고 네 혼처 중 이득 될 곳을 골라야겠으니 상황이 이래도 참으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말 안에는, 앞으로 칼스이턴과 거래를 할지 말지에 관한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이제 보니 제 아버지도 상당히 약은 편이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지금 그녀가 하는 행동들은 모두 그런 아버지를 노린 것이지만.

“다행이에요. 저는 혹시나 아버지가 클라이브의 그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계속 거래를 하시려는 줄 알고….”

제 아버지가 칼스이턴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하여 미적거리는 동안, 아테니아가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그런 행동?”

그리고 뼛속까지 장사꾼인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의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제 아버지에게 기대한 그대로였다.

“…혹시 모르세요?”

아테니아가 당황스럽다는 듯 두 눈을 깜박이며 되물었다.

“무엇을 말이야?”

크리스나 백작이 매우 찜찜한 얼굴이 되어 제 딸을 채근했다.

그때야, 아테니아가 말을 이었다.

“클라이브와의 이혼을 준비하려고 그의 집무실에 들어갔다가, 서류를 발견했는데….”

“했는데?”

아테니아가 말끝을 흐리자, 크리스나 백작이 답답하다는 듯이 한 번 더 말을 재촉했다.

그녀는 그럴수록 더욱 당황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정말 단 하나도 모르셨군요, 아버지. 그 서류에 클라이브가 저희 가문과 한 거래 중에 물품 대금을 속이고 그 차액으로 이득을 본 내역들이 적혀 있었어요.”

클라이브와 약속한 게 있었지만, 아테니아는 말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자식이랑 한 약속 따위 알 게 뭐란 말인가.

쾅!

끼이이익-

“그게 정말이냐?!”

크리스나 백작이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시끄럽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에 자식들이 이렇게 행동하면 크리스나 백작은 귀족답지 못한 행실이라며 꾸짖고는 했었다.

그러나 근엄한 척하던 아버지도 결국 본인이 흥분될 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테니아의 반항과 그 후 뒤바뀐 태도 같은 건 이제 크리스나 백작의 머릿속에서 단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확실해요. 저, 경제학을 부전공으로 해서 수석까지 한 거 아시잖아요. 장부쯤은 볼 줄 알아요.”

경제학은 집안의 안살림을 꾸리는 데도 배워 두면 좋았기 때문에, 종종 영애들이 부전공으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상인인 아버지를 두어서인지, 아테니아는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전공인 가정학 성적도 우수했기 때문에, 크리스나 백작은 그녀가 경제학을 배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여기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교수들이 취업하지 않고 결혼을 택한 그녀의 선택을 아쉬워한 이유였다.

“그 자식이… 감히 크리스나의 돈을 등쳐먹어?! 이 도둑놈 같으니!”

크리스나 백작이 분노하여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렸다.

그의 입에서 한참을 제대로 형용하지도 못할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상행을 가다 보면, 데려간 기사들로 부족하여 중간에 용병을 고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용병들에게서 옮은 말투인 것 같았다.

“…얼마나 빼돌렸더냐.”

크리스나 백작이 심각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돈에 관해서는 한없이 깐깐한 백작이었다.

“정확히는 크리스나 상단의 장부와 대조해 봐야 셈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테니아는 일부러 클라이브가 빼돌린 내역을 기억해서 적어 놓은 장부가 따로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장부는 상단의 핵심이었다.

크리스나 상단의 돈이 어디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것은 칼스이턴과 크리스나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꼭 필요했다.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가 기록해 놓은 것이 있다고 하면, 절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터였다.

아버지는 여자들이 사내가 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이었으니까.

“…장부를 보여 달라고?”

역시나, 크리스나 백작은 단번에 넘어오지 않았다.

그는 아주 찜찜한 얼굴이었다.

“장부는 아직 아이레스에게도 보여 주지 않은 거다.”

그거야 아이레스는 장부를 정확히 판단할 능력이 없으니까요.

아테니아는 순간 그렇게 빈정거리고 싶어졌다.

모르겠다.

그녀는 지금까지 제 남동생이 크리스나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데 한 치의 이견도 없었다.

어차피 아버지의 말대로, 아테니아는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될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녀가 아무리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될지라도- 가족들만큼은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완벽하게 깨져 버린 지금은, 기분이 이상했다.

장부도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남동생은 크리스나의 모든 것을 누린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자신이 한 인간으로서 받아야 할 마땅한 대우들에 위협을 느끼는 순간조차도 크리스나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다른 가문의 사람이 된 그녀는 남편이 자신을 기만할지라도 참아야 했다.

크리스나의 모든 것은 아테니아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것을 가진 이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녀는 크리스나임에도 불구하고 손 하나 뻗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테니아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크리스나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크리스나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사교계에서 크리스나의 장녀로서 가문의 명성을 지켜 냈고,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여 크리스나의 사업에 도움이 될 가문과 결혼했다.

아테니아가 크리스나로서 못한 게 무엇인가.

지금까지 그녀가 가문을 위해 해 온 게, 이혼 한 번으로 모조리 무산될 그런 것이었나?

새삼스레 억울했다.

아테니아가 해 온 모든 것들이, 아테니아에게만큼은 주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텐데.

그녀의 시선이 어두워졌다.

그럼 자신은, 가문을 위해 평생 희생하지 않으면 가문에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일까?

아테니아의 속이 시끄러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우선 그 수많은 생각을 뒤로 미뤄 버렸다.

“아버지, 제가 크리스나의 장녀로서 행동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요?”

아테니아가 혼자 사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 혼자 조용히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 수중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어쨌든, 크리스나의 이름을 달고 사는 것과 없이 사는 건 다르다.

아테니아가 재혼을 할 것도 아닌 이상, 귀족으로서 그녀는 크리스나의 이름이 필요했다.

어쨌든 가문의 호적에서 누군가를 제하고 말고는 최종적으로 가주의 권한이다.

보통 가문의 일원이 어지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굳이 쫓아내지 않는다.

가문에서 혈육을 제하는 일은 사교계에서 두고두고 씹히기에 좋은 일이니까.

그렇지만 애초에 그런 권한이 있다는 점에서, 아테니아가 아버지나 크리스나의 가주가 될 아이레스와 마찰을 빚어 괜스레 시끄러운 일을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우선 전처럼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장녀의 역할을 연기했다.

아테니아는 이제 당하고 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게 무모해지겠다는 건 아니다.

“제가 이혼을 하느라 아버지의 말씀을 잠시 듣지 않긴 했어도, 결국 칼스이턴보다 훨씬 더 좋은 상대와 연을 맺을 수도 있게 되었잖아요.”

그러니 지금은 일단 아버지의 장단에 맞춰 주는 게 나았다.

아테니아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스이턴과 빈켄티우스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연히 빈켄티우스죠. 그럼 어차피 칼스이턴은 정리해야 할 텐데- 뭐라도 더 크리스나 쪽에 유리하게 가져와야 하지 않겠어요?”

크리스나 백작은 점점 솔깃한 얼굴이 되어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빈켄티우스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칼스이턴 따위가 대수일까.

“그래, 알겠다.”

그리고 생각 끝에, 결국 크리스나 백작의 고개가 다시 한번 끄덕여졌다.

아테니아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감췄다.

그날, 그녀는 처음으로 크리스나의 장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경제학 시간에 배운 것보다 훨씬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단의 일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건 왠지, 매우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

크리스나 저택에 돌아와 보낸 첫날 밤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의 집무실에서 틈틈이 훔쳐본 장부를 기억해 뒀다가 적을 수 있을 만큼,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그 기억력을 이용하여 이번에는 크리스나의 장부를 옮겨 적었다.

칼스이턴과 크리스나의 거래 내역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상큼하게 보낸 밤은 오래간만에 늦은 아침을 즐기기 위해 식당에 내려간 순간, 엉망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크리스나 백작 가문의 일가만 있어야 할 그곳에, 불청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애석하게도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입장에 불과한 것인 모양이었지만.

왜냐하면, 크리스나 백작 부부와 아이레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그 불청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니까.

“좋은 아침이야, 테나.”

불청객이 뻔뻔한 얼굴로 아테니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미간이 대놓고 팍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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