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26화 (26/111)

26. 위장 스캔들 (5)

운하 건설 사업.

그것은 현재 나라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사업이었다.

주요 도시들을 관통하는 운하의 건설이 완료되면, 각 도시 간 물자를 더욱 빠르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운하의 주변 환경을 아름답게 조성하여 관광 산업에도 써먹을 예정이었다.

거기서 떨어질 수익은 정말이지 어마어마했다.

현재 그 엄청난 사업을 칼스이턴과 크리스나에서 동업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여기에 아테니아가 필요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간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운하 건설 사업을 주도했으나, 워낙 큰 사업이었기에 투자자들 또한 상당수였다.

그리고 이 투자자들은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서로의 신뢰를 깨 버리지 않으리라는 징표가 필요했다.

그 징표가 바로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결혼이었던 것이다.

“하,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네가 돈을 벌게, 칼스이턴과 크리스나의 끈끈한 사이를 증명하는 증거물이 되라는 셈이야?”

사실 두 번 물을 것도 없었다.

아테니아는 제 말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임을 알았다.

그저, 이제는 자신을 대놓고 물건 취급하려는 클라이브의 작태에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다.

“뭘 또 그렇게 증거물까지야….”

클라이브는 말끝을 흐리며 아테니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아테니아는 이제 제 안목이 완전히 의심됐다.

저딴 놈을 사랑하고, 저딴 놈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착각했다니!

수치도 이런 수치가 없었다!

다그닥다그닥.

그러나 아테니아의 고난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마차를 끄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가 기네스의 의상실 앞에서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 문밖에서 또 다른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테니아,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크리스나 백작이었다.

***

결국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 저택으로 돌아왔다.

외부에서 전남편이랑은 싸워도 아버지랑은 싸울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황실에도 빠질 것 없다는 권력을 가진 빈켄티우스 대공조차도, 부모와 딸의 사이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물론, 발레리안은 아테니아가 원한다면 크리스나 백작을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러면 가문 간에 시끄러운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혼한 이상,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가문의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과 자신의 방에 마주 앉게 되었다.

“웬일로 저를 찾아오셨어요?”

물론, 크리스나 백작을 대하는 아테니아의 태도는 절대 고울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부모라면서 그들이 자신에게 꽂은 비수가 그녀는 아직도 생생했다.

“쯧, 부모를 오랜만에 보자마자 하는 게 그런 말이냐? 내가 너를 그렇게 키웠어?”

역시나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의 태도에 대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냈다.

그러나 크게 역정은 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아테니아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혼하는 순간 호적에서 파신다면서요? 저 이미 크리스나 백작님의 자식이 아닌 거 아니었나요?”

아테니아가 제 아버지를 도발하듯이 말한 것은 반쯤 의도한 일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왜 저의 이런 행동에도 참는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분명 어떤 목적이 있을 터였다.

쾅!

크리스나 백작이 둘 사이에 있는 테이블을 내리치며 일어났다.

“이 자식이 그래도…!”

크리스나 백작의 어깨가 분노로 들썩거렸다.

그가 한참을 그 상태로 아테니아를 노려보더니, 치솟는 역정을 꾹 눌러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아테니아가 그간 아무리 아버지의 말에 고분고분 살아왔다고 해도, 제 아버지의 성질이 어떤지 모르진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저렇게 구는 건 분명 딸에게 바라는 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테니아는 크리스나 백작이 자신에게 원할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이혼으로 제 부모의 지긋지긋한 바람을 박살 내 버린 그녀에게 아버지가 기대할 만한 것.

그것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발레리안 빈켄티우스.

아테니아가 그와 쌓고 있을 관계, 그것이 분명했다.

“큼, 인제 그만 반항하고 집으로 들어오거라.”

괜스레 헛기침을 한 번 한 크리스나 백작이 말했다.

마치, 아테니아가 이팔청춘이라도 되어 객기를 부리고 있다는 태도였다.

“…반항이요?”

아테니아가 모든 생각을 멈춘 채로 제 아버지를 쳐다봤다.

반항.

그녀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한 행동을 겨우 한 마디로 축약하여 저렇게 전락시킬 수 있다니.

아테니아는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분노가 치솟았다.

왜, 제 아버지는 제 아픔에 대하여 이런 식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인 건지.

부모에 대한 실망과 화는 대체 왜 단편적이지를 못한 것일까.

이미 한 번 최악을 보았으니, 그들을 포기하고 편해지면 될 텐데.

하필 눈앞의 상대가 제 아버지여서 그게 안 됐다.

아테니아는 그게 억울해서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입 안쪽 살을 꽉 깨물었다.

치맛자락을 쥔 아테니아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적어도 이제는 아버지가 벌일 짓에 당하고만 있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집으로 돌아오겠어요.”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진정시키며 한참을 숨을 고르던 아테니아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어차피 제 뜻대로 될 때까지 아테니아의 인생에 간섭하려 들 터였다.

분하지만, 미혼의 여성에게 아버지로서 간섭할 방법은 이 나라에서 차고 넘쳤다.

그러니까 그녀는 그 굴레를 끊어 내야만 했다.

“잘 생각했다. 그러면 빈켄티우스 대공은 언제쯤 인사를 올 생각이냐?”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은 좀처럼 아테니아가 얌전해지도록 두지 않았다.

제 아버지의 말에 그녀가 대번에 정색했다.

“대공 전하라고 똑바로 부르세요, 아버지. 그리고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크리스나 저택에 왜 와요?”

아테니아의 목소리가 자신도 모르게 격앙되었다.

이미 발레리안이 자신의 사위라도 된 듯이 굴고 있는 크리스나 백작의 행태를 참을 수 없던 탓이었다.

여기서 그녀가 말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발레리안에게 더한 짓도 할 수 있으리라.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이미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꼴을 너무 많이 보여 준 뒤였다.

“내 딸의 아버지로서, 딸과 교제하는 남자의 얼굴 좀 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문제더냐?”

이번만큼은 크리스나 백작도 역정을 내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아무리 크리스나 백작가가 후작가에도 부족함 없이 딸을 시집보낼 만큼 풍족한 가문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었다.

빈켄티우스 가문은 달랐다.

그들은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나마 루이앙스 공작가 정도가 빈켄티우스에 혼담을 넣을 수 있는 것이지, 빈켄티우스가 공작가를 상대로 그들도 부족하다 하면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후작가도 아닌 백작가 가문이 가당키나 하던가.

셈이 빠른 크리스나 백작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저러는 것이다.

딸로서 보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일면이었다.

“아버지, 교제한다는 기사가 난 지 만 하루도 안 됐어요.”

아테니아가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했다.

위장 연애이긴 하지만, 그 연애조차도 하루가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크리스나 백작의 태도는 마치 두 사람이 곧 결혼이라도 할 것 같았다.

“귀족들 간의 연애가 단순히 연애로 끝날 일이냐? 귀족들의 연애는 늘 결혼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야!”

크리스나 백작의 말에 아테니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한때는, 그녀도 발레리안과의 미래를 꿈꿨던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 시절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테니아도 현실을 알았다.

겨우 학생들 간의 교제로 아카데미에 들이닥친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한 행동은 과장되긴 했지만, 그 염려가 한편으로는 이해 갔다.

그녀와 얽히기 전에는 여학생들과의 염문 따위 일절 없던 발레리안이었다.

그런 그가 혹시나 일개 백작가의 여식에게 발목 잡힐까 봐, 그 원로들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리라.

그런데 이제는 졸업까지 하여 이미 한 번 결혼도 하고 이혼도 했다.

그런 아테니아에게 더 이상 꿈과 희망 같은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솔직히 그녀는 대체 왜 아버지가 저런 허무맹랑한 꿈을 꾸고 있는지, 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아테니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말을 거절하면?

그런다고 아버지의 욕심이 거기서 끝날까?

크리스나 백작의 욕심은 이미 끝도 모르고 팽창해 있었다.

아테니아는 그 싹을 철저히 짓밟아 뭉갤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알겠어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한참을 생각해 보는 척하다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공 전하께 이야기해 볼게요.”

물론,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직접 말할 생각 따위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긍정한 것은 크리스나 백작의 기대에 부응하는 척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는 상황이 제 뜻대로 이루어질 때 꽤 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나 백작이 그렇게 방심할 때, 아테니아는 아버지가 두 번 다시 그런 이야기 따위 꺼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릴 셈이었다.

“…정말이냐?”

크리스나 백작이 의심스럽다는 듯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아테니아를 바라봤다.

계속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던 딸이 돌연 고개를 끄덕이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제 아버지가 말의 진위를 의심하든 아니든 그런 건 아테니아에게 있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 조건이 있어요.”

어차피 크리스나 백작은 아테니아가 내민 조건을 쉽게 충족하지 못할 테니까.

그녀는 제 아버지가 가진 욕심을 믿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아테니아가 제 아버지의 손에서 완벽히 벗어날 기회를 만들어 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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