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위장 스캔들 (4)
기네스가 아무리 잘나가는 의상실의 주인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그녀는 평민이다.
그에 따라 마담의 조수들 또한 평민임은 당연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귀족들이 종종 억지를 부리면 난감함에 빠지고는 했다.
평민인 그들이 귀족의 몸에 쉽사리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의상실에서 부리는 용병들이 막을 수 있는 상대들이었으면 나았으나, 고위 귀족들은 덩치 있는 용병들의 존재에도 겁먹지 않았다.
법적으로 백작가부터는 가문에서 자체적인 기사단을 키울 수 있었는데, 그리하여 고위 귀족의 경우 어차피 그들의 기사가 용병들을 대신 상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기사단을 운영할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가문일 때의 이야기지만.
그리고 애석하게도 칼스이턴은 기사단을 꾸릴 만큼 충분히 부유한 가문이었다.
그리하여 클라이브는 기어코 의상실의 닫힌 문을 뚫고 들어온 것이었다.
물론, 유명 의상실과 척지기 싫은 손님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으나- 클라이브는 이미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정말 상식이라고는 단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불청객의 존재를 눈치채자, 발레리안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클라이브가 발레리안과 아테니아가 있는 곳을 찾기란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현재 수도에서 발레리안과 아테니아만큼 주목받는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이 사람 많은 상점 거리에서 소문이 나길 바라고 왔듯이, 두 사람이 어느 의상실에 들어갔는지 같은 건 애초에 여기저기 퍼졌을 터였다.
그렇다고 한들 이렇게 들이닥치다니,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마담, 여기 있게. 내가 알아서 처리하지.”
마담을 제지한 발레리안이 소수의 손님을 위한 비밀룸을 나섰다.
그러자 곧 의상실의 정중앙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는 클라이브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아니라더니… 아테니아, 네가 어떻게 그놈하고 결국 붙어먹을 수가 있…!”
“클라이브 칼스이턴.”
발레리안의 무거운 목소리가 클라이브의 다소 경망스러운 목소리를 끊어 냈다.
발레리안을 뒤따라 나온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의 그런 꼴을 한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너희…! 그 안에서 대체 뭘 하고 있던 거야!”
발레리안과 아테니아가 비밀룸에서 같이 나오자, 클라이브는 그 머리로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 그들을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대놓고 경멸 어린 표정으로 바뀌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의상실에서 드레스를 입어 보지 뭘 했겠어?”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의 표정을 보고 울컥하여 그녀에게 다가오려 했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난 건지 모를 발레리안의 그림자 기사가 클라이브의 팔을 꺾어 그를 바닥으로 처박았다.
“아악!”
클라이브가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의상실의 문밖에서 대기하던 클라이브의 기사들이 당장에라도 안으로 쳐들어올 듯했으나, 그들과 대치하던 용병들이 그것을 막아섰다.
용병들도 최소한 기사들까지는 의상실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고용된 입장에서 기사들까지 잡지 못했다가는, 맡은 역할을 다하지 못한 셈이니 용병들도 난감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발레리안이 클라이브에게로 다가갔다.
발레리안은 오만한 눈으로 클라이브를 내려다보며 제 기사에게 팔을 놓아주라 손짓했다.
클라이브 따위가 감히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자신감이 드러나는 태도였다.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이익…!”
클라이브가 잔뜩 열이 받은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발레리안의 예상대로, 발레리안에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나한테는 바람이라고 그토록 뭐라고 하더니, 너 대체 언제부터 대공 전하를 만나고 다닌 거야?”
아무리 성을 내도 소용이 없자 강제로 침착해진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의 말에는 이미 발레리안과 그녀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확신이 들어 있었다.
“지금 누굴 너랑 같은 취급 하는 거야…!”
아테니아는 숨이 턱 막혀 왔다.
의상실은 사교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클라이브의 말에 더 따지듯이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테니아는 의상실에서 말이 길어지지 않길 바랐다.
그녀가 여기서 자꾸 말을 보태면 이 말도 안 되는 대화가 길어질 것만 같았다.
“마담, 여기 있는 드레스를 전부 사지.”
그때 돌연, 발레리안이 말했다.
아테니아가 놀라 그를 홱 돌아봤다.
기네스 또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발레리안이 지금 있는 드레스를 모두 사게 되면, 최소 두세 달간은 장사할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러면 저희는 드레스를 준비하러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기네스는 사교계에 정평이 난 마담답게, 이 행동을 통해 발레리안이 얻고자 했던 바를 빠르게 눈치챘다.
기네스는 의상실의 모든 사람을 데리고 의상실을 나갔다.
그녀가 제 조수들의 입단속까지 철저히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이 이야기를 외부에 전달할 이들이 모두 이 자리에서 없어지자, 아테니아의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풀렸다.
그녀는 아까부터 자꾸만 움츠러드는 것이 자신답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문득 이런 제 모습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대체 뭐가 걸려서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조심스러워졌는지를.
그냥, 도저히 끝나지 않는 이 상황들이 그녀의 상상을 자극했다.
어쩌면 이런 상황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
그리고 그 상상의 한가운데에는 단언컨대 클라이브가 서 있었다.
아테니아가 적어도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자신이 괜찮아지려면, 진정으로 클라이브를 끊어 내야 했다.
“난 너와 같은 짓은 안 해.”
아테니아가 일부러 더욱 고개를 빳빳이 들며 앞으로 나섰다.
움츠러드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런 모습을 바꿔야 했다.
특히나, 클라이브 같은 인간 앞에서 자꾸 뒤로 물러나게 되면 그가 더 득의양양할 게 뻔했다.
“그렇지만 리안과 교제를 시작하기로 한 것도 사실이야.”
크게 숨을 들이쉰 아테니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발레리안이 앞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슬쩍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으나, 그 온기만으로도 충분히 용기를 얻은 기분이었다.
“어차피 너와 나는 이미 이혼했는데, 내가 그러지 못할 이유가 뭐 있어?”
아테니아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히 말했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녀에게 염문설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그러나 발레리안에게 말했듯, 아테니아는 사교계에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이미 클라이브와 루이앙스 공작가 덕에 아테니아에 대한 사교계 소문은 엉망이었으니, 그녀는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게다가 사실, 발레리안과 연애한다는 소문이 나면 클라이브가 자신을 한 번쯤은 찾아오리라고 아테니아도 예상했던 바였다.
발레리안에게 열등감이 가득해 보였던 클라이브가 아닌가.
그러나 발레리안은 클라이브보다 건장했고, 강한 기사였으며, 신분조차도 훨씬 높았다.
그러니 발레리안에게 따지진 못하고 자신에게 올 것 같았다.
방금도 보라.
발레리안의 그림자 기사가 클라이브를 놓아주자, 클라이브는 곧바로 아테니아에게 따지고 들지 않았던가.
정말 한심한 종자였다.
“나쁜 년. 그렇게 부와 권력이 좋았어?”
클라이브는 이제 숫제 자신이 피해자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었다.
감히 아테니아를 향해 욕설을 담는 클라이브의 작태에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나섰다.
그녀가 발레리안의 손을 뒤로 잡아당기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당장 이 상황을 제지하기 위해 나섰을 터였다.
“하…! 너 진짜 머리에 총 맞았니?”
그러나 아테니아는 상황을 모두 발레리안에게 맡겨 놓고 뒤로 물러나 자신은 상황에 관계없는 척 고고하게 있고 싶지 않았다.
“잊었나 본데, 너랑 나 네가 바람피워서 이혼했어…!”
아테니아는 기가 막힌 심정을 감추지 않고 노골적인 헛웃음을 터트렸다.
“얼마 전에 레이시아 윌터스가 날 찾아와서 그러더라. 나보고 널 붙잡고 있지 말라고. 어이가 없어서 진짜… 내가 너 같은 걸 뭐하러 붙잡고 늘어져!”
기왕 이렇게 된 거, 아테니아는 제 속에 든 것을 다 털어 내기로 했다.
발레리안이 그녀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 온기가 마치 자신에게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는 듯해서, 아테니아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았다.
“뭐? 레이시아가 널 찾아갔다고? 혹시 그래서 내가 재혼하자고 한 걸 거절한 거야? 그건 오해야…! 나는 이미 레이시아 하고 끝냈어!”
미친놈은 약도 없다고 했던가.
클라이브는 아테니아의 말을 전적으로 자신이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말도 안 되는 사고의 흐름이 나올 수 있는지, 정상인인 아테니아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제발 끝내지 말고 끼리끼리 잘 지내! 영원히! 너희끼리!”
결국 아테니아는 질색팔색하며 소리쳤다.
그녀가 과하게 흥분한 듯하자,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어깨를 도닥이며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칼스이턴 후작, 자꾸 이런 식으로 내 연인을 쫓아다닌다면 후작을 스토킹 혐의로 고발할걸세. 그러면 접근 금지 신청 정도는 거뜬히 받아 낼 수 있겠지.”
클라이브도 어쨌든 후작이었기에 그가 형을 살게 만들려면 복잡하고 많은 과정들이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접근 금지 처분쯤이야 발레리안의 힘으로 얻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클라이브는 아테니아가 참석하는 파티에는 발도 디딜 수 없게 될 터였다.
훗날 어떻게 될지 몰라도, 사람들은 일단 칼스이턴 후작보다 빈켄티우스 대공의 연인과 더욱 가까이 지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여인이 나라에서 손에 꼽히게 부유한 크리스나 가문의 영애라면 더더욱.
“…아테니아! 나한테 그런 모욕까지 주겠다는 거야?”
말은 그렇게 했는데 이번에도 클라이브가 따지고 드는 상대는 아테니아였다.
그녀는 정말이지, 어쩌다가 제가 저런 놈에게 우습게 보였나 고심하게 되었다.
아테니아가 어이가 없어 클라이브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미친놈은 눈치도 없는 건지, 그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이상한 용기를 얻어 말을 이었다.
“아니지?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이 어떤 관계인데…! 우리, 대운하 사업도 같이 해야 하잖아…!”
그러나 그 순간, 아테니아는 알아차려 버렸다.
클라이브가 제게 이토록 매달리는 이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