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위장 스캔들 (3)
신문사에 말을 전달하자마자, 그길로 아테니아는 발레리안과 함께 대공가의 마차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게 좋겠다고 그가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대공 전하. 이쪽은 제 저택으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그러나 마차에 타 창밖을 바라보던 아테니아는 마차가 제 저택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발레리안은 그녀의 의문에 아주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일 황후 폐하의 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드레스를 맞춰야죠.”
갑작스러운 발레리안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진 아테니아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발레리안은 무언가 문제가 있냐는 듯 도리어 그녀를 보고 웃을 뿐이었다.
“…드레스라면 저도 있어요.”
발레리안의 당당함에 잠시 말을 잃었던 아테니아가 반박했다.
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압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테니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발레리안이 어떻게든 제 드레스를 맞추려 할 것임을 깨달았다.
“…대공 전하,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다시 만난 이후로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의 말을 처음으로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스캔들을 확실히 확인시켜 주려면, 아테니아와 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이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발레리안은 다른 의견까지 내세우며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게 드레스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을 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그녀가 함께 드레스를 사러 가면, 사람들은 대공이 새 연인에게 무어를 얼마나 선물하는지를 가장 궁금해할 터였다.
즉, 아테니아가 제 돈으로 드레스를 구매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발레리안이 나중에 드레스값을 그녀에게 받으려고 할 리도 없었으니, 꼼짝없이 그에게 얌전히 드레스들을 받아야 하는 셈이었다.
“상점가만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도 드물죠. 거기에 모습을 보이면, 다들 알아서 소문을 내 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아테니아의 심정을 모르는 것처럼, 발레리안은 논리로 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사이에 마차는 어느덧 상점가에 도착해 있었다.
대공가의 타운하우스로부터 상점가까지의 거리가 이렇게 짧았던가?
그녀는 정말이지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것보다 아테니아, 발레리안이라고 부르시는 게 어떨까요.”
상황은 물 흐르듯이 지나치게 잘만 흘러갔다.
그 속에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손을 내밀며 말을 이었다.
“연인 사이에 대공 전하라고 부르면 남들이 이상하게 볼 겁니다.”
사실, 연인 사이에 딱딱하게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그리고 발레리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지적했다.
“예전처럼 리안이라고 불러 주시면 더 좋고요.”
제 애칭을 부르라고 말하는 발레리안의 얼굴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의 표정이 워낙 담담해서, 그것이 응당 해야 할 일처럼 보였다.
“…알겠어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리안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마치, 아테니아가 일부러 말 뒤에 그의 애칭을 생략한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큼, 크흠… 리안.”
아테니아가 결국 발레리안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분명, 아카데미 시절 불렀던 애칭인데도 불구하고 이미 5년이 지난 뒤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제는 서로 그렇게 부를 사이가 아니어서인지 그의 애칭이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그럼 가실까요, 테나.”
아테니아가 아직까지 잡고 있지 않던 손을 발레리안이 재차 내밀었다.
어색해하는 그녀와 달리, 그는 아주 매끄러운 발음으로 아테니아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하아, 가요.”
마침내 아테니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발레리안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마차에는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문양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그 증거로, 상점가에 나타난 대공가의 마차를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이미 마차 밖에서 시끌벅적하게 들려왔다.
기껏 상점가까지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는 건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명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내리는 수밖에.
“그럼 우선- 마담 기네스의 의상실부터 갈까요?”
발레리안이 웃으며 아테니아의 손을 맞잡았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내려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그 순간,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마차에서 누가 내리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던 이들의 이목이 확 쏠렸다.
그로 인해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이전 같았으면 사람들의 시선을 이토록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선들이 순간 거북해졌다.
“테나?”
나직하고 부드러운 음성.
그것이 번뜩 아테니아의 주의를 잡아끌었다.
그녀의 시선이 발레리안에게 박혀 들었다.
그가 그녀의 손을 더욱 꼭 잡아 주었다.
일순 긴장한 아테니아를 마치 귀신같이 알아차린 것처럼.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아테니아가 시선을 황급히 다른 쪽으로 돌렸다.
방금, 그녀는 발레리안이 자신의 곁에 있다는 사실에 매우 안도하고 말았다.
왠지 이런 심정을 들키면 안 될 것 같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군요.”
발레리안은 더는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다.
그저 사람 많은 상점가에서 아테니아가 걷기 편하도록 사람들 틈에서 제 몸으로 그녀를 가려 보호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아테니아는 의상실까지 아주 편하게 갈 수 있었다.
***
아테니아는 그리 사치스러운 편이 아니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집안의 여자들에게 돈을 아끼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큰 상단을 이끌고 있는 상단주로서, 그는 백작가보다 고위 귀족에 해당하는 가문보다도 가족들의 씀씀이에 더욱 유했다.
그러니까 아테니아가 사치스러워지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기본적으로 부유하게 자란 덕이었다.
모든 게 다 준비되어 있으니, 굳이 더한 욕심을 부릴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만큼이나 부족할 게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테니아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도 너무 잘 어울리세요, 크리스나 영애!”
마담 기네스가 신나서 가져오는 드레스를 아테니아는 벌써 정확히 21벌째 갈아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안, 이 정도면 충분할 거 같은데요.”
아테니아는 조금 전에 꺼냈던 말을 재차 발레리안에게 꺼내 봤다.
그러나 그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테나, 혹시 그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그럼 다른 의상실로….”
발레리안은 딱 몇 분 전과 똑같이 곧바로 다른 의상실로 아테니아를 데리고 갈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그랬던 것처럼, 아테니아가 황급히 고개를 휙휙 저었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럼 드레스가 마음에 드나요?”
“…네, 그러니까 그만….”
“마담, 그것도 같은 주소로 보내 주게.”
“예, 대공 전하!”
그러자 아까와 똑같은 패턴이 벌어졌다.
아테니아는 이런 식으로 하여 21벌째 드레스를 구매당하는 중이었다.
이제 숫제 그녀의 표정은 먼 곳을 바라보듯 아연해졌다.
현재, 마담 기네스의 의상실은 수도에서 가장 잘나가는 곳이다.
게다가 발레리안이 마담에게 가져오라고 한 드레스는 전부 기네스가 조수를 쓰지 않고 하나하나 직접 만든 것뿐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입어 보고 있는 드레스 하나하나가 부르는 게 값이란 뜻이었다.
그 드레스들을 마구잡이로 사들이는 발레리안을 보며 기겁을 했던 것도 딱 10번째 드레스까지였다.
이제는 상단주의 딸로 자랐기에 계산이 빠른 그녀도 그가 채 1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얼마를 썼는지 계산하기가 두려워 뒤로 미뤄 두었다.
어림짐작으로도 천문학적이리라 짐작되는 금액은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다고 지쳤으니 드레스를 그만 입어 보고 싶다고 할 수도 없었다.
방금 아테니아가 그 말을 했다가, 발레리안이 그럼 어쩔 수 없다면서 그냥 의상실의 드레스를 전부 사들이려 했기 때문이다.
입어 보지도 않은 드레스가 나중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냐고 그녀가 빡빡 우기지 않았더라면, 아테니아의 저택에는 드레스의 산이 쌓였을 터였다.
물론, 발레리안은 그럼 안 입으면 되지 뭐가 문제냐는 말로 그녀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그나마 아테니아가 화를 낼 듯한 기색을 보이자, 기네스의 의상실에 있는 드레스를 쓸어 버릴 계획을 접어 다행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린 탓에 아테니아가 드레스를 21벌이나 갈아입었지만.
“…안 됩…! 안에는… 지금… 다음에…!”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테니아가 22번째 드레스를 입어 볼 일은 없었다.
갑자기 의상실 밖이 소란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마담, 이게 무슨 일이지? 손님이 오늘 나 하나로는 부족했나?”
예기치 않은 소란스러움에 발레리안의 표정이 굳었다.
아테니아를 지켜보던 때와는 전혀 상반된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발레리안이 의상실의 한 달치 이상의 매출을 올려 주고 있었다.
그건 마담더러 아테니아에게만 집중하라는 소리와 같았다.
그런데 소란스러움으로 시간을 방해받았으니, 그의 심기가 불편할 만도 했다.
“아닙니다…! 분명 의상실의 문을 닫아 두라고 일러두었습니다…!”
기네스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해명했다.
그러나 마담이 당황하고 발레리안의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지는 와중에도 의상실의 문밖은 시끄러웠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결국, 기네스가 안절부절못하면서 특별 손님들을 위한 룸을 나가려던 찰나였다.
“아테니아! 너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다른 손님은 받지 않는다며 닫아 놓은 의상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남자가 소리쳤다.
어쩌면 뻔하게도- 클라이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