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위장 스캔들 (2)
“호외요! 호외!”
신문을 판매하는 거리의 소년이 내는 목소리가 시끄러웠다.
그 소년에게서 신문을 사들인 제미니가 그곳에 적힌 내용을 보자마자 헐레벌떡 아테니아에게 달려왔다.
“아가씨…! 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
“무슨 일인데 그리 호들갑이야?”
아테니아가 제미니에게서 신문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곧 아테니아의 눈 또한 제미니 못지않게 커졌다.
황제가 당장 내일 열리는, 황후가 주최하는 연회에서 제 조카를 위하여 그 신붓감 후보들을 살펴보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당장 외출 준비를 해야겠어, 제미니.”
아테니아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발레리안은 다녀가며 아테니아의 생각을 기다리겠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다음 날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굴 리가 없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렇다는 건 황제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멋대로 발레리안의 신붓감을 찾겠다고 나섰다는 말이었다.
그가 곤란해졌다.
아테니아는 그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
아테니아는 마차를 대여해 로브를 뒤집어쓴 채 빈켄티우스 대공가의 타운하우스로 향했다.
그녀가 잔뜩 긴장한 채로 저번에 집사가 자신을 데리고 갔던 비밀 통로의 문을 두들겼다.
누군가 자신이 타운하우스로 들어가는 걸 발견해서 발레리안이 난감해지지 않길 바랐다.
그래서 눈에 띄지 않을 비밀 통로로 온 것이지만, 혹시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걱정은 정말로 걱정일 뿐이었다.
어쩐지 마치 누군가 대기하고 있었던 거처럼 머지않아 사람이 문을 열고 나왔으니까.
“아테니아 크리스나 영애시군요. 들어오십시오.”
이렇게 재빠르게 누군가 자신의 방문에 응할 줄은 몰랐다.
아테니아가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오시죠.”
평범한 시녀로 보이지 않는 여인은 그런 아테니아를 모른 척해 주며 예의 바르게 그녀를 안내했다.
안내인의 공손한 태도에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느껴졌다.
그로 인해 그녀는 이번에도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고 대공가의 타운하우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른 아침인데… 일찍 일어나셨네요, 크리스나 영애.”
응접실로 들어서니, 발레리안이 멋쩍은 얼굴을 하고 아테니아를 반겼다.
아무래도 그녀가 아침에 난 신문 기사를 보고 자신을 찾아왔음을 추측한 모양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아테니아도 발레리안의 어색한 웃음에 맞춰 애써 미소했다.
본래 그녀는 아침잠이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제법 인자했던 아테니아의 과거 시어머니, 칼스이턴 대부인은 집안 여인들의 늦잠을 절대 허용하지 않았다.
출근하는 남자들보다 늦게 일어나서야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클라이브는 아테니아가 자신의 어머니와 잘 지내기를 바랐고, 그녀 또한 몇 시간 일찍 일어나면 되는 일로 시어머니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지난 1년간 강제로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일어나는 것에 익숙해진 터였다.
물론, 이런 사소한 일까지 발레리안에게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보다… 이렇게 아침 일찍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해요. 정정 기사를 내려면 한시가 바쁘다고 생각했어요.”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사과를 건넸다.
귀족가에서 사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오는 일은 단언컨대 무례다.
그러나 황실에서 낸 기사였다.
황제가 대서특필로 신문에 실은 만큼, 발레리안의 신붓감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아주 널리 널리 퍼져 나갈 터였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면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정 기사라면 방금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괜찮아요.”
발레리안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단순한 정정 기사로 현재 이 사태가 가라앉을 리 없어요. 그건 대공 전하께서도 아시잖아요.”
황제가 낸 기사에서, 황제와 발레리안의 협의가 있었느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발레리안의 신붓감을 찾겠노라 한 것이 황제라는 사실 하나였다.
아무리 발레리안이 해당 기사가 아니라고 반박할지라도 결국 황후의 연회에서 황제는 어떤 아가씨든 발레리안에게 붙여 주려고 들 테니까.
“그건….”
발레리안도 역시나 아테니아가 지적한 사실을 모르지 않는 듯,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방금 괜찮다는 말은 역시나 그저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대공 전하, 제가 돕게 해 주세요.”
아테니아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대공 전하께서 저를 도와주세요.”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제게 도움을 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게 그녀가 말을 바꾼 이유였다.
“크리스나 영애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돕겠지만…, 혹시 제 일이 신경이 쓰이셔서 그런 거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역시나, 아테니아의 예상대로 발레리안이 저를 돕겠다고 나서는 그녀를 말렸다.
그는 진심으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와 가짜 스캔들을 내요.”
그러나 이미 결심한 뒤였기에, 아테니아는 이야기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건 저에게도 필요한 일이에요. 칼스이턴 대부인까지 나서서 클라이브와 저를 다시 붙여 놓으려 하고 있어요.”
아테니아의 말에 발레리안이 크게 멈칫했다.
그는 일견 분노한 기색이었다.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침착하던 발레리안은 그녀의 일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대로라면 크리스나 가문에서도 저와 클라이브를 재혼시키기 위해 나설지도 모르죠.”
아테니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발레리안 본인에게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필요한 일이라면 그는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아테니아의 말은 허언도 아니었다.
클라이브가 바람을 피웠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던 크리스나 백작 부부였다.
아니, 심지어 그들은 부모로서 해서는 안 될 일까지 했다.
간통으로 잡혀 갔던 클라이브가 풀려나게 손을 쓴 것이 아테니아의 부모가 아니던가.
그런 그들이 그녀가 말한 가정을 현실로 만들지 말란 법도 없었다.
그러자 발레리안은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을 마주한 아테니아가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저를 도와주세요, 대공 전하.”
아테니아는 전적으로 발레리안이 자신을 도와주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도움을 드리는 게 아닌 걸 압니다. 저와 스캔들이 나면 크리스나 영애가 받을 영향이 더 크니까요.”
발레리안이야 이 나라의 하나뿐인 대공가를 손에 쥔 주인이었다.
그에게 일시적인 스캔들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달랐다.
귀족들 간에 이혼하는 일은 여전히 드물었고, 이미 그것으로 사교계에 큰 파란을 몰고 온 그녀였다.
그런 아테니아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인이 생기고 또다시 헤어진다고 하면 그녀의 평판에 단언컨대 좋을 게 없었다.
심지어 현재는 크리스나 가문에서 아테니아를 보호해 주지도 않고 있지 않은가.
“대공 전하, 어차피 클라이브와 루이앙스 양쪽에서 다 물러나지 않는다면… 결국 제가 대공 전하와 클라이브 사이에서 저울질한다는 소문만 남게 될 거예요.”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희가 이제 막 시작하는 관계인 척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어서, 대공 전하와 제가 이혼 전부터 만났다는 소문이 묻히게요.”
그녀는 어느덧 헬레나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고스란히 발레리안에게 써먹고 있었다.
“심지어 저는 클라이브가 아니라 누구와도 재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대공 전하와 사귄다고 해도 문제 될 것도 없고요.”
“…재혼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뭐에 놀란 것인지 순간 발레리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가 워낙에 표정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테니아는 그런 기색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실패한 결혼은 한 번으로 족해요. 어차피 결혼이 아니어도, 저는 제법 즐거운 삶을 살 수 있는걸요.”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에게 제 의사를 확인시키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나 백작은 그녀에게 여자의 행복은 결혼 그리고 남편과 자식에게 있다고 가르쳤다.
아테니아가 제 아버지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체로 그녀의 인생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아테니아도 크리스나 백작의 말을 비교적 잘 따랐던 것이다.
게다가 가문 간의 결합은 귀족의 의무였고, 아테니아가 그간 귀족으로서 누려 온 것들에 대한 대가였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을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처럼 한 번 실패한 이상, 아테니아는 더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의 말대로만 하면 뭐든지 잘될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결혼이 실패함으로써 그것은 거짓임이 증명되었다.
게다가 아테니아는 아마 클라이브와의 결혼을 통해 가문에 이득도 안겨 주었다.
그녀는 제 의무도 저버리지 않은 셈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는 더는 자신이 결혼에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 제 행복에 가장 방해가 되는 건 자꾸 클라이브와 얽히는 일이에요.”
아테니아의 말에 발레리안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참는 사람처럼 제 주먹을 꽉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다.
“그럼… 아테니아.”
그리고 곧, 발레리안이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손을 내밀었다.
“일시적이지만, 저와 교제해 주시겠습니까?”
발레리안이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아테니아에게 물었다.
마치, 이 교제 신청이 진짜라도 되는 것처럼.
“…잘 부탁드려요, 대공 전하.”
그리하여 아테니아 또한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채로 발레리안의 손을 잡았다.
그날, 수도의 신문에는 황제의 대서특필을 압도하는 기사가 실렸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발레리안과 아테니아의 극적인 재회와 수줍은 만남의 시작을 알리는 스캔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