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위장 스캔들 (1)
아테니아는 순간 헬레나의 말에 멍해졌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아테니아가 한발 늦게 말을 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문을 잠재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스캔들을 내라고?”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을 멀리해야 할까 생각 중이었던 터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와 엮일수록 그가 난감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레나는 아테니아와 전혀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너와 클라이브의 사이에 관한 말이 줄어들지 않는 거, 빈켄티우스 가문과 인연을 맺고자 하는 이들이 너를 적대하기 때문 아니야?”
헬레나는 생각보다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
상세한 내용을 정확히 말하지는 않더라도,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듯한 부분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지라 결국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라이브가 그런 헛소리까지 한 마당에 너와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가 인제 와서 거리를 둔다고 해서 그들이 믿을 거 같진 않단 말이지.”
듣다 보니 헬레나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테니아는 사실 스캔들 적인 면에서는 결벽적이다 싶을 만큼 깨끗한 사람이었다.
귀족들 간에는 아직도 연애보다 정략결혼이 많았고, 그에 비례하여 정부를 두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판국이었으니 약혼자나 배우자가 있어도 연서를 받는 것쯤은 차라리 미덕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사람에 따라서는 오히려 많은 연서를 받을수록 그만큼 매력 있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괜히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연서는커녕 제 남편이 아닌 사람에게서 꽃 한 송이 받는 것조차 질색하던 사람이다.
그러니 이혼 후, 그녀를 스캔들로 엮을 다른 상대가 있었을 리 만무했다.
루이앙스 대부인이 내면을 들여다보면 회생할 가능성 따위 전혀 없어 보이는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사이를 다시 엮으려던 것 또한 그런 이유일 터였다.
아테니아와 그나마 닿아 있는 상대가 클라이브 아니면 발레리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루이앙스 대부인이 아테니아를 발레리안과 떼어 놓기 위해서는 클라이브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무모한 수까지 두었는데, 인제 와서 물러난다는 것도 우스워지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사교계에 퍼진 소문들을 종합하면 너만 완전히 나쁜 사람이란 말이야.”
헬레나가 보기에는 아테니아의 상황만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다.
솔직히 빈켄티우스 같은 대가문의 입장에서야, 일개 소문 따위 뭐가 두렵겠느냔 말이다.
“두 소문을 종합하면, 네가 바람피워서 이혼해 놓고 재혼 상대로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한다는 이야기잖아.”
아직까지 그런 식으로 크게 소문이 나지는 않았지만, 루이앙스 공작가도 클라이브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두 가지 소문이 함께 돌게 되면, 나올 결론이야 뻔한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남편의 바람으로 이혼 후, 상처 입은 너를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이 보듬어 주다가 다시 사랑에 빠졌다는 게 더 로맨틱하다고.”
사람들은 소설 같은 사랑에 열광한다.
헬레나는 지금 그 점을 이용하라고 하고 있었다.
어차피, 소문이 둘 다 멈추지 않을 거라면 아테니아의 입장에서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했다.
둘 다 아니라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을 테고, 새로운 사람이라도 갖다 붙였다가는 둘이 아니라 셋을 데리고 논다며 아테니아만 욕을 먹을 테니까.
그 모든 일을 겪지 않으려면 차라리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그들이 재회한 시점을 명확히 밝히는 게 좋았다.
클라이브는 치안대에 기록상으로 이미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가 남아 있었다.
반면에 아테니아와 발레리안 사이의 일은 단순히 클라이브의 주장일 뿐이었다.
거기에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이 첫사랑과 재회한 후 순식간에 빠져들었다는 식으로 열렬한 사랑 이야기를 첨가하면, 사람들이 어느 쪽의 말을 믿고 싶어 할지는 자명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대놓고 스캔들을 냈다가, 확실하게 헤어진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지금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사이가 어쩌고저쩌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은, 기실 두 사람의 사이가 아무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테니아가 진짜로 발레리안과 연인이었더라면, 클라이브가 아무리 떠들어 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다들 빈켄티우스 대공가가 무서워서 부정적인 발언에 관해서는 그 입을 다물 텐데.
그건 루이앙스 공작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공작가가 건드리는 방향에는 아테니아와 클라이브뿐, 발레리안이 쏙 빠져 있었다.
즉, 그들도 발레리안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아테니아가 발레리안과 연인이 되면 루이앙스 공작가에서도 일단 몸을 사릴 터였다.
헤어지고 나면?
그러면 더더욱 그쪽에서는 아테니아에게 볼 일이 없었다.
빈켄티우스 대공에게 있어 한때의 연애담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설령 루이앙스 공작가의 여식이 발레리안과 맺어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스쳐 지나간 여인에게까지 보복하는 건 루이앙스 공작가에서 빈켄티우스 대공가와 혼약을 맺을 능력이 안 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치졸하다고 입증하는 셈이었다.
그러니 체면을 위해서라도 공작가가 추후 아테니아를 건드릴 일은 없었다.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와 재혼할 거라든가, 사실 이혼 전 발레리안과 바람이 났다는 소문을 잠재우기에는 이보다 좋은 방법도 없어 보였다.
아테니아가 고민하는 듯 보이자, 헬레나가 밀어붙이듯 말을 이었다.
“대공 전하께서도 필요하실지도 모르잖아. 루이앙스 공작가를 거절하셨다는 건 한동안 혼인할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 같은데.”
아테니아는 모르는 일이지만, 헬레나는 아카데미에 왜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찾아왔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발레리안이 원로들과 아테니아가 마주치지 않게 해 달라고 해서, 헬레나가 그날따라 아테니아에게 더 친한 척을 했더랜다.
그 극성맞은 원로들의 기준에 빈켄티우스와 현재 가장 부합하는 상대는 루이앙스였다.
그런 가문을 거절했으니, 헬레나는 자연스럽게 발레리안이 결혼 의사가 없다고 여겼다.
“헬레나, 네가 대공 전하와 친했던가…?”
아테니아가 재차 의아한 얼굴로 헬레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면, 아테니아는 아카데미 시절 발레리안이 저 외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헬레나의 말은 마치 그녀가 아테니아도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발레리안이 혼인할 마음이 없다는 것만 해도, 아테니아는 얼마 전에야 알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테니아가 보기에 헬레나는 발레리안이 결혼할 생각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게…!”
의문이 담긴 눈초리에 헬레나가 움찔했다.
역시, 말하지 않고 아테니아를 설득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한참 뜸을 들이던 헬레나가 한숨을 쉬었다.
발레리안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 동경하던 아테니아와 이제야 진짜 가까워졌는데 괜한 걸 숨겨 사이가 틀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별건 아니고, 아카데미 시절에 우연히 지나가다가 내가 봤는데….”
그래서 헬레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너를 찾아왔었어.”
“…그 가문의 원로들이 나를 왜???”
헬레나의 말에 아테니아는 순식간에 혼란과 의문에 가득 찬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빈켄티우스의 원로들이 아테니아에게 할 말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것도 아카데미를 졸업하지도 않은 미성년자이자 학생을 상대로!
“…나도 어이없지만, 저들 도련님의 스캔들 상대를 만나러 왔다더라.”
헬레나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황당해하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테니아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느 누가 아카데미에서 학생들끼리 눈 맞은 일을 가지고 그걸 따지러 든단 말인가!
외동딸을 유별나게 애지중지하여 성인이 지난 나이에도 통금을 7시 따위로 잡아 두는 에이브릴 자작가에서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너도 어이없지…? 그럴 만도 해…. 나도 아카데미 시절에 그 장면을 봤을 때는, 내가 뭘 본 건가 했거든.”
그 꼬장꼬장한 노인들이 어린 여자애 하나 만나겠다고 우르르 몰려온 광경을 떠올려 보라.
그건 절대 아름다운 광경은 아니었다.
헬레나가 질색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걸 왜 이제 이야기해 주는데?”
아테니아가 가볍게 헬레나를 흘겼다.
딱히 크게 탓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살짝 섭섭한 마음은 들었다.
“미안해. 변명 같겠지만, 그때는 대공 전하께서 내 입단속을 하셔서…. 솔직히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는 너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조리 매서운 사람이었잖아.”
그러나 헬레나의 말을 듣는 순간 아테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발레리안이 자신만을 특별하게 대했다는 건 아테니아가 가장 잘 알았다.
그에게 고백을 거절당하기 전까지,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여긴 것은 솔직히 그녀만의 착각이 아니었다.
대놓고 말하자면, 아카데미의 교수들조차 발레리안에게 그를 귀찮게 만들 만한 이야기를 할 때면 괜스레 아테니아에게 부탁할 정도였으니 말 다 하지 않았겠는가.
지역마다 있는 아카데미끼리 하는 검술 대회에 나가달라든가… 다른 학생이었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자연스레 했을 그런 일들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는 말을 전달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며 거절했었지만.
어쨌든 그만큼 발레리안은 타인에게 있어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헬레나가 인제 와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건 그렇지.”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헬레나의 말에 긍정했다.
아테니아가 기분이 크게 상하지 않은 듯 보이자, 헬레나가 안도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내 말이 괜한 말 같지 않으면 정말 한 번 생각해 봐. 어쩌면 대공 전하께서도 필요하실지도 모르잖아.”
발레리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헬레나의 말에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헬레나의 말에 따르면, 빈켄티우스 가문 쪽 원로들은 결혼에 관해서도 극성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가문에서 발레리안이 지금까지 쭉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원로들이 그를 얼마나 귀찮게 굴지 모를 노릇이었다.
교제하는 상대라도 있으면 원로들의 극성이 줄어들지도 몰랐다.
그게 아니라 원로들이 아테니아를 탐탁지 않게 여기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상대와 결혼하는 게 아니라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게 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러면 발레리안은 그 행동들을 핑계로 결혼을 더 미룰 수 있었다.
“…알았어. 한번 생각해 볼게.”
결국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발레리안에게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하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다음 날이 되어, 아테니아는 고민할 새도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