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끼리끼리 논다 (4)
아테니아는 헬레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손님의 정체를 확인하러 응접실을 나섰다.
왜냐하면, 제미니가 저택에 믿고 들일 만한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니아가 다른 응접실의 문을 열며 들어섰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새까만 흑발과 커다란 키를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아테니아가 혹시나 했던 사람은 역시나, 발레리안이었다.
그는 아테니아를 마주하자마자 우선 그녀에게 사과했다.
“…크리스나 영애,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크리스나 영애.
그 호칭에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발레리안과 그녀 사이에는 거리감이 필요했다.
크리스나 영애라는 그 호칭은 거리감을 주기에 아주 적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는 마음 한구석에 기묘한 마음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니에요. 대공 전하께서 괜히 찾아오실 분도 아니고요.”
호칭이 신경 쓰인 탓에, 아테니아가 한발 늦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발레리안이 이렇게 다급하게 찾아올 일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것이… 크리스나 영애께 이것보다 더 미안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발레리안이 정말로 미안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아테니아는 보기 드문 그의 태도에 의아함을 잔뜩 품었으나, 발레리안이 말해 주기를 기다렸다.
마른세수한 그가 한참을 어떻게 이야기할지 말을 고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크리스나 영애와 칼스이턴 후작 사이 헛소문이 저 때문에 난 것 같습니다.”
“네…?”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와 클라이브가 자꾸만 엮이는 게 전혀 상관없는 발레리안 때문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현재 소문을 주도하는 사람은 루이앙스 대부인입니다.”
루이앙스 대부인은 오래전 남편을 잃고 아들이 공작이 될 때까지 홀로 가문을 꾸려 온 여걸이었다.
아들이 공작의 자리에 앉은 이후, 루이앙스 대부인은 뒤로 물러났다지만 여전히 공작가나 사교계에 그녀가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지대했다.
“…루이앙스 대부인이 왜요?”
“그게….”
발레리안이 말끝을 흐리며 말을 망설였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테니아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주기 싫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궁금해했기에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빈켄티우스 가문과 루이앙스 가문 사이에 혼담 이야기가 오갔었거든요.”
루이앙스 공작가에는 아테니아보다 2살 어린 대부인의 손녀가 있었다.
아테니아가 듣기에도 빈켄티우스 대공가와 혼담이 오가기에 충분한 위치의 가문이었고, 발레리안과의 나이 차도 그리 크지 않았다.
어쩌면… 루이앙스 공작가의 손녀라면, 발레리안과 결혼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물론, 이야기가 오가기만 하고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발레리안이 자신도 모르게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결혼할 생각이 없어서 아테니아를 거절했다고 한 주제에, 혼인하려 했다는 오해를 사기 싫었다.
“…그러니까, 대공 전하가 저를 도와주신 걸로 루이앙스 대부인이 저와 대공 전하의 사이를 오해했다는 건가요?”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의 변명에 무의식적으로 안도했다.
루이앙스 대부인이라면 아테니아의 이혼 뒤에 누가 있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발레리안이 루이앙스 공작가의 영애와 결혼하지 않은 이유를 아테니아에게서 찾은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크리스나 영애가….”
발레리안의 고개가 수그려졌다.
그래도 그의 키가 워낙 큰 탓에, 아테니아에게는 발레리안의 표정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고 있었다.
“이게 왜 대공 전하께서 죄송할 일인가요?”
그래서 아테니아는 곧바로 제 생각을 내뱉었다.
“루이앙스 공작가에서 제멋대로 오해하고 벌인 일을 대공 전하께서 책임지실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이렇게 이유를 알려 주러 오신 것만으로도 제가 감사할 일이죠.”
발레리안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테니아는 쭉 까닭도 모르고 당하기만 했을 터였다.
“이 일은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니 크리스나 영애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테니아의 말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현 상황에 대하여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만했으나,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건 역효과였다.
“대공 전하께서 이 상황에 루이앙스 공작가를 찾아가시거나 압박하시면 오히려 오해만 짙어질 거예요.”
그렇게 되면 이 상황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루이앙스 공작가에서는 계속해서 아테니아를 노릴지도 몰랐다.
그럴 때마다 발레리안이 나서 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침음을 흘렸다.
그녀의 말도 틀린 바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지는 저도 좀 생각을 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그때까지 다른 걸 하지 마시고 절 기다려 주시면 좋겠어요.”
아테니아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관하여 그녀도 진정하고 생각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여전히 부채감을 느끼는지, 자신이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표정이 단호하자, 결국 그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테니아의 일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녀의 의사를 무시한다는 건 발레리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저 좋을 대로 해결해 버릴 것이었더라면, 그는 굳이 아테니아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연락 드릴게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가 저택에 와 있었으니, 발레리안과는 다음을 기약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아테니아의 말에 무엇 때문인지 발레리안이 멈칫했다.
그리고 곧, 그의 얼굴 위에 자신도 모르게 선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다리겠습니다.”
그 미소가 너무 환하고 예뻐서,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레리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
“그럼, 이만.”
발레리안이 여전히 정중한 태도로 아테니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제야 그녀는 순간의 마법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마법이 있을 리 없는데도 불구하고.
“…조심히 가시길.”
그래서 아테니아의 인사는 조금 늦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레리안은 차분히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가, 아테니아의 인사에 다시 한번 미소를 지어 주고는 돌아갔다.
***
발레리안이 돌아가고 나서 헬레나가 있는 응접실로 돌아온 아테니아의 얼굴은 조금 멍해 보였다.
그런 아테니아의 주의를 일깨운 것은 헬레나였다.
“…혹시 방금 다녀가신 분,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셔?”
“어…?”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놀라서 반문했다.
그녀는 단언컨대 누군가에게 자신이 발레리안의 도움을 받았다는 티를 낸 적이 없었다.
오늘 발레리안 또한 일부러 마차도 없이 로브까지 뒤집어쓰고 아테니아의 저택을 찾았다.
따라서 아테니아는 헬레나가 갑작스러운 방문객이 그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에 대해 의문이 가득했다.
“…사실 근래 들어 도는 소문이 하나 더 있거든.”
헬레나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그렇지 않아도, 칼스이턴 대부인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아테니아에게 물어보려던 말이기도 했다.
“며칠 전에, 칼스이턴 후작이 술자리에서 빈켄티우스 대공이 얼마나 파렴치한 사람인지 세상이 알아야 한다며 주사를 떨었다고 해.”
아테니아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클라이브가 이혼한 아내에게 재차 구혼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들썩했다.
그런 상황에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남들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을 불러일으킬지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만했다.
그녀는 어쩌면 루이앙스 대부인의 오해도 거기에서 더 심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클라이브는 최근까지 아테니아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가 그런 소리를 지껄였으니, 오해가 깊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하, 기가 막혀.”
아테니아가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클라이브, 이 거지 같은 찌질이 자식.”
정말이지, 클라이브 칼스이턴 때문에 험한 말만 늘어난다.
아테니아는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서 다녀가신 걸 보니, 아무래도 일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네….”
헬레나가 염려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아테니아와 동갑이었기 때문에, 헬레나 또한 아테니아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두 사람이 진짜로 친해진 것은 둘 다 결혼한 이후였으나, 아카데미 시절 아테니아와 헬레나는 어쨌든 같은 무리에 속해 다녔다.
그렇기에 발레리안이 아테니아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헬레나도 알았다.
혹한에 서리가 내리듯 모두에게 공평하게 매정하고 싸늘한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만큼은 180도 다르게 굴었다.
심지어 본인의 본성이 어떤지조차 아테니아에게는 숨기기 급급했다.
게다가, 헬레나는 아테니아가 모르는 사실 하나를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의 어느 날, 헬레나는 우연히 아테니아를 찾아왔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간 북부의 원로들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날, 원로들을 멀리서 보던 헬레나도 도망가고 싶을 만큼 매섭게 대하던 발레리안을 본 것이지만.
그 원로들 때문이라도,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에게 다가오기란 쉽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굳이 아테니아를 찾아왔다는 건, 만나지 않고서는 일을 해결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헬레나의 중얼거림을 들은 아테니아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헬레나, 네가 대공 전하를 개인적으로 알던가…?”
“어, 응…?”
헬레나가 순간 움찔했다.
‘오늘 본 건 절대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오래전, 발레리안이 한 경고가 떠오른 탓이었다.
“아니, 음, 그냥, 어….”
헬레나의 두 눈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녀가 아는 건 전혀 뜻하지 않게 알게 된 발레리안의 개인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의 경고가 무서웠다.
그리하여 헬레나는 말을 돌렸다.
“아테니아, 이왕 너와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사이에 관한 소문이 도는 김에 그걸 진짜로 만들어 버리는 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