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끼리끼리 논다 (3)
“…그게 무슨 소리야? 어머님이 왜???”
아테니아가 노골적인 의문을 표했다.
그녀는 제 시부모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테니아는 아직도 무의식중으로 칼스이턴 대부인을 어머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아테니아가 아는 선대 후작과 대부인은 자신의 아들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했으면 부끄러워할 사람들이었지, 몰염치하게 클라이브를 그녀에게 다시 갖다 붙일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테니아, 정신 차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야.”
헬레나가 아테니아를 채근하듯 말했다.
아테니아가 움찔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헬레나의 말에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래, 시부모님이 그녀의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단 한 번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마냥 좋은 사람이었다면, 왜 칼스이턴 저택에서 아테니아가 갇혀 있을 때 아무도 그녀의 방문을 열어 주지 않았을까?
그 의문은 여전히 아테니아의 안에 잔재했다.
그러나, 부모님만큼이나 믿고 따르던 시부모님에게까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사람들에게 차례차례 배신당하다니.
남이야 이 모습을 보면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도 타인을 또 믿냐고 하겠지만, 당사자가 되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지는 법이었다.
수많은 배신 끝에 누구 하나라도 제가 아는 존재로 남아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배신으로 사람을 잃어 본 자만이 알았다.
“아테니아, 네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해.”
그러나 헬레나는 아테니아가 현 상황을 부정하도록 두지 않았다.
아테니아의 양어깨를 잡은 헬레나가 단호히 말했다.
“칼스이턴 대부인은 사교계에서 대단히 존경받아 대모나 샤프롱 역할을 자주 맡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교계에서 잔뼈가 굵으신 분이야.”
헬레나는 아테니아를 현실로 끌어오려는 듯 꾸준히 시선을 마주쳤다.
그 덕에 아테니아의 안에 현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분이 사교계에 소문을 내고, 칼스이턴 후작이 지금처럼 군다면 넌 나중에 곤란해질 거야.”
헬레나의 말이 옳았다.
아테니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클라이브와의 재혼이 기정사실이 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아테니아가 재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해 봤자, 그녀만 뒤늦게 말을 바꾼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책을 세워. 나도 널 최대한 도울 테니까.”
헬레나는 젊은 귀부인 중 아름다운 외모로 사교계에서 입지가 제법 넓은 편이었다.
그녀가 아테니아의 편이 되어 준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데 날 이렇게 도와줘도 돼?”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스이턴 대부인을 적으로 돌리냐 마냐의 문제 때문은 아니었다.
헬레나의 남편과 클라이브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쨌든 칼스이턴 후작가는 현재 상당히 권세 있는 가문에 속했다.
괜히 헬레나가 밉보여, 집안에서도 그녀의 위치가 나빠질까 봐 아테니아는 걱정이 됐다.
“네가 앨리스를 돕겠다고 말할 때, 빈말이었니?”
헬레나가 물었다.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단호히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럼? 나는 우리가 모임에서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어. 그건 나만의 착각이야?”
“아니야.”
헬레나의 질문에 아테니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혼인 전에는 몰랐으나, 결혼한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같은 기혼자들끼리 만나 모이게 되었다.
남편의 발령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멀리 가는 친구들도 있고, 아카데미의 동기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아테니아도 어른이 되어 갈수록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적어졌다.
그 속에서 헬레나는 당연히 아테니아에게 좋은 친구였다.
“그럼 내가 널 돕는 건 당연한 거잖아.”
헬레나는 이미 단단히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이었다.
“앨리스나 다른 친구들도 도와주기로 했어.”
아테니아의 두 눈이 커졌다.
헬레나가 자신을 도와주는 것은 모임에서 가장 친하니 그렇다고 해도, 다른 친구들까지 저를 도우려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아테니아의 의문을 해소해 주듯이, 헬레나가 말을 이었다.
“아테니아, 우리가 너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또, 동경했는지 넌 모를 거야.”
아테니아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넌 언제나 당당하고 옳은 일에 나서지 않는 법이 없었고, 단 한 번도 비겁하지 않았어.”
아테니아는 몰랐겠지만, 사실 그녀는 아카데미 시절부터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아테니아가 모임에서 젊은 귀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사실 예고된 일이었다.
“그래서 칼스이턴 후작이 바람을 피워서 네가 이혼했다고 했을 때, 다들 역시 너답다고 했어. 너다워서 다행이라고.”
아테니아는 왠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이런 이야기를 헬레나한테 들을 줄은 몰랐다.
사실, 발레리안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아테니아도 포기했을지 모를 이혼 소송이었다.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일도 아니고, 아테니아가 스스로 좋다고 한 이혼이었는데 그걸로 다른 이들에게 응원받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는 네가 앞으로도 너다웠으면 좋겠어. 우리는 현실에 순응해서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애써 외면하며 살지만, 너는 그러지 말고 늘 당당한 아테니아로 있어 줘.”
헬레나가 부탁하듯이 두 손으로 아테니아의 한 손을 꼭 잡아 왔다.
“아테니아, 너 같은 사람이 있으면- 우리도 언젠가는 널 보고 용기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헬레나의 두 눈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온전한 진심이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헬레나.”
아테니아는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곱게 화장을 한 터였다.
화장이 번지면 분명 헬레나와 무슨 일이 있었노라 사람들이 쑥덕거릴 게 뻔했다.
헬레나가 그런 소리를 듣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내가, 이혼하면서 모든 사람을 잃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목소리가 잠기는 것까지는 아테니아도 막을 수가 없었다.
여기가 밖에 사람들이 많은 살롱만 아니었다면, 아테니아는 지금이라도 울고 싶었으니까.
너무, 안도되어서.
그래서 울고 싶었다.
이혼 후 홀로 외딴섬에 서 있는 것 같던 감각이 마침내 아테니아의 곁을 떠나갔다.
“너희들이 있는 걸, 내가 몰라서 미안해.”
아테니아가 울듯이 웃었다.
아, 그녀가 모두를 잃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거짓된 관계를 떨쳐 내고 진실한 친구들을 얻었을 뿐.
“울지 마. 너 울면 사연 있는 여자 된다?”
아테니아의 눈가가 촉촉해지자, 헬레나가 괜스레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다.
그 별거 아닌 장난에 아테니아는 어느 때보다 즐겁게 웃고 말았다.
***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헬레나를 위시한 모임의 모두가 아테니아를 위해 사교계에서 분주히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소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재혼설은 점점 더 사교계 귀족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아테니아,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헬레나는 현재 잔뜩 근심 어린 얼굴로 아테니아의 저택에 와 있었다.
“우리 모임의 젊은 귀부인 수가 그렇게 적지 않잖아. 우리가 이렇게 단체로 움직이는데도, 소문이 사그라지지 않는다는 건….”
헬레나가 말끝을 흐렸다.
아테니아가 헬레나의 말을 이었다.
“우리 모임보다 더 큰 모임에서 소문을 퍼트리고 있다는 것밖에 되지 않지.”
아테니아와 헬레나 둘 모두 침묵했다.
결론을 내리기야 했지만,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굳이 아테니아와 클라이브를 억지로 재결합시켜서 크리스나와 칼스이턴 말고 누가 대단한 이득을 본다고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자면 크리스나와 칼스이턴이 틀어져야만 다른 귀족들이 그 틈새에 끼어들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남들의 입장에서는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이혼이 기회인 셈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와 헬레나가 속한 모임의 행보까지 막아 가면서 굳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너무 이상했다.
“칼스이턴 대부인이 이렇게까지 영향력이 크진 않은데….”
아테니아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사교계에서 명망 높은 노부인들은 젊은 영애들의 샤프롱 혹은 대모가 되어 여전히 사교계를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칼스이턴 대부인은 나이가 꽤 있었기에 어느 정도 대우를 받을 뿐, 젊은 영애나 귀부인들에게 매우 존경받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런 대부인이 단독으로 아테니아와 헬레나 무리의 행동을 막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누가 칼스이턴 대부인의 조력자가 된단 말이야? 아테니아, 네 어머니는 아예 사교계에 발걸음을 자주 하지 않으시는 편이잖아.”
아테니아가 알려 주었기에, 헬레나는 크리스나 가문에서 아테니아의 이혼을 반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나 부인은 사교계를 필요할 때 아니면 굳이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즉, 크리스나 백작 부인이 칼스이턴 대부인에게 도움이 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테니아와 헬레나 사이에는 답을 알 수 없는 의문만이 둥둥 떠다녔다.
아테니아와 클라이브의 재혼 같은 헛소문을 누가 자꾸 퍼트리는지 알아야 제재라도 가할 텐데, 상대의 실체조차 모르고 있으니 무언가 조치를 취하기도 어려웠다.
똑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잠시 전해 드릴 말이 있습니다.”
제미니였다.
아테니아의 허락에 안으로 들어온 제미니가 그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닥였다.
“아가씨를 만나고자 하는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아테니아가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이었다.
아테니아는 오늘 헬레나와 시간을 보내기로 했기에, 다른 손님은 당연히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이 손님을 만나 비로소 현 사태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