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끼리끼리 논다 (2)
결국은 그거였다.
클라이브가 자신을 만나 주지 않는 걸 아테니아에게 따지러 온 것.
아테니아가 레이시아에게 얼마나 만만하게 보였던지, 또다시 새삼스레 알게 된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내가 클라이브를 꼬여 내서 너랑 못 만나게 만들었다?”
아테니아가 다리를 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자식이랑 이혼까지 한 내가, 걔가 너랑 잘해 보든 말든 무슨 상관이라고?”
“그… 건….”
레이시아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인간이 몰염치하고 무식하면 쓸데없이 용감하다고, 레이시아는 재차 입을 열었다.
“당신이 클라이브와 내 관계에 호의적일 리 없잖아요! 불만이 있어도 크게 있을 텐데, 이혼했어도 얼마든지 훼방 놓으려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레이시아가 아테니아를 부르는 호칭은 어느덧 당신으로 돌아가 있었다.
아테니아가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살다 살다… 이래서 미친 인간은 상대하는 게 아니었는데.”
미친 인간이랑 마주 앉아 있었더니 미친 소리나 듣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갑작스레 자신이 한심해졌다.
이게 무슨 꼴인지.
그냥 레이시아의 입이나 닫게 하고 돌려보낼 걸 그랬다.
“당장 꺼져. 찻물을 들이붓기 전에.”
아테니아가 두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제미니에게 차를 끓여 오라고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지금, 끼얹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 그럼! 이거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레이시아는 사나운 아테니아의 모습에 움찔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기어코 말을 덧붙였다.
남의 남편 빼앗은 그 뻔뻔함은 어딜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두 번 다시 클라이브와 만나지 않겠다고요!”
아테니아가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레이시아는 기어코 입을 열어 그녀의 속을 또 뒤집어 놓았다.
촤악.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장에 놓인 꽃병의 꽃을 내팽개쳐 버리고 물을 끼얹은 건 순전히 레이시아의 탓이었다.
그나마 클라이브 때처럼 꽃병으로 상대를 내리치려고 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경이었다.
“꺄악! 당신, 미쳤어?! 이게 얼마짜리 옷인데!”
레이시아가 온갖 호들갑을 떨며 홀딱 젖은 옷을 펄럭거렸다.
아테니아가 꽃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짜증스레 말했다.
“그깟 옷! 네가 상간녀 소송을 당해서 물 위자료보다 더하겠니?”
아테니아의 머리에 열이 쫙 올랐다.
레이시아의 태도는 마치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의 내연녀라도 되는 듯했다.
그 태도가 아테니아에게는 더없이 모욕적이었다.
“너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뭐? 나 보고 클라이브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말라고? 그 자식과 바람피운 건 내가 아니라 너야!”
아테니아가 씩씩거리느라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리고 내가 그 자식을 보고 싶어서 보는 줄 알아? 능력 있으면 제발 네가 좀 나한테서 떼어 내 보든가!”
아테니아가 쏟아붓듯 말을 이었다.
정말이지, 그녀도 할 수만 있다면 평생 클라이브와 손절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망할 놈이 자꾸 엉겨 붙는 것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판에, 누구 열 받으라고 여기 와서 아테니아의 화에 기름을 들이붓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지, 지금, 당신, 크리스나 영애가 클라이브의 행동과 무관하다는 걸 나보고 믿으라는 소리예요?”
레이시아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간이었다.
아테니아가 강하게 나가자 그녀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서 아테니아의 인내는 끝이었다.
“마틴! 이 여자 내쫓아.”
아테니아가 목소리를 높여 하인을 불러들였다.
내연녀에게 전남편을 꼬신 게 아니냐고 의심받는 기가 막힌 상황에 더는 놓여 있기 싫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역시 당신이 꼬여 낸 거 맞죠…!”
아테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멸 어린 눈으로 레이시아를 내려다봤다.
“진짜 너네… 끼리끼리 논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아테니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테니아는 더 이상 레이시아와 마주하고 있을 생각이 사라졌다.
발레리안이 자신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어차피 레이시아도 모를 터였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레이시아에게 더 들을 이야기도 없었다.
“제미니, 응접실을 정리하렴.”
아테니아는 레이시아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한 채 말했다.
마틴이 아테니아의 명령에 따라 레이시아를 끌어내기 위해 다가갔다.
“이렇게 쫓아내면…!”
레이시아가 마틴을 피하려는 듯 주춤주춤 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내일 또 찾아올 거예요! 내가 못 할 줄 알아?!”
레이시아의 말에 아테니아가 홱 그녀를 돌아봤다.
어쩌면 이렇게 하는 짓이 레이시아와 클라이브가 똑 닮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사실은 내연 관계가 아니라 혈육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그럼 난 윌터스 남작가에 찾아갈 거야. 네 부모님께.”
아무리 뻔뻔한 인간이어도 제 부모에게 그런 치욕을 당하게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아테니아도 제 부모와 나이대가 비슷할 남작 부부에게 굳이 그런 모욕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되도록 말로 레이시아에게 겁만 주고 끝낼 생각이었다.
“흥, 내 아버지가 그 정도로 꿈쩍하실 거 같아요? 후작 부인만 되고 나면 될….”
그러나 레이시아는 아테니아의 생각보다 더 뻔뻔했고, 그 부모도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양이었다.
레이시아는 타격 없다는 듯 대꾸했다.
“설마, 네 사교계 평판이 내연녀라는 이유로 엉망이 되고 나서도 후작 부인이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런 레이시아의 뻔뻔함은 아테니아의 이어지는 말로 인해 막을 내렸다.
“뭐… 뭐라고요?”
레이시아가 말을 더듬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그녀의 목적은 후작 부인이 되는 것이었나 보다.
그 현실 감각도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테니아는 순간 레이시아가 확 한심해졌다.
‘확 혼인 빙자 간음죄로 걸려 버려라, 개자식아.’
그리고 동시에 아테니아는 클라이브를 욕했다.
레이시아를 후작 부인이라도 만들어 줄 것처럼 굴었을 클라이브가 역겨웠다.
“애초에, 영지도 없고 이름만 남은 남작가를 후작가에서 받아 주리라 생각한 거야?”
아테니아가 혀를 찼다.
그녀와 클라이브가 연애결혼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로가 혼인할 수 있을 만큼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 간의 결혼이란 그랬다.
사실 그래서 대부분 연애결혼을 한 이들조차도 서로 혼인이 가능한 상대와 연애했던 경우가 많았다.
거기에 유부남과 바람을 피웠다는 오명까지 달고 있는 영애라?
아테니아는 제 시부모를 꽤 좋은 사람들이라 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절대 레이시아를 허락할 리 없다고 확신했다.
귀족이란 본디 그랬으니까.
“…웃, 기지 마…! 나는 클라이브랑…!”
“내 말을 믿든 말든 그건 알아서 해. 마틴, 내보내.”
“잠깐…!”
아테니아가 재차 마틴에게 손짓했다.
이 이상을 굳이 제가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가시죠.”
“안 나가! 말해, 그게 무슨 소리냔 말이야!”
레이시아가 마틴에게 끌려가며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더는 레이시아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깨닫지 못한다면, 본인의 팔자를 본인이 꼴 뿐이었다.
결국, 레이시아는 마틴에 의해 추하게 끌려 나갔다.
그러고 나서야 아테니아의 저택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애석하게도- 그 고요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
레이시아로 인해 외출을 망친 아테니아는 다음 날, 헬레나의 살롱을 방문했다.
역시나 오늘도 헬레나의 살롱에는 문학계 명사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문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아테니아, 잠깐 이리로.”
아테니아가 살롱에 들어오자마자, 헬레나가 다가와 그녀를 구석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헬레나, 왜 그래?”
아테니아가 헬레나에게 이끌려 가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헬레나는 단 둘뿐인 빈방에 들어설 때까지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헬레나, 이제 말해 봐. 대체 무슨 일이야?”
방의 문이 닫히자마자, 아테니아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누군가 엿듣는 사람이 없는 꼼꼼히 확인한 헬레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테니아, 너 혹시 칼스이턴 후작이랑 재결합하니?”
“…뭐?”
아테니아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쉿…! 쉿! 목소리를 낮춰. 너 지금 괜히 구설에 올라 봤자 좋을 게 없잖아.”
헬레나가 다급히 아테니아를 진정시켰다.
확실히, 클라이브와 재결합을 하든 안 하든 아테니아가 그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는 모습이 남들 눈에 띄어 그녀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아테니아가 불쾌함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참으며 물었다.
“그런 헛소리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거야?”
“지금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해. 요즘 칼스이턴 후작이 네 저택으로 선물 공세를 하고 있다며.”
아테니아가 이를 악물었다.
클라이브가 선물을 보내는 의도야 뻔했다.
그가 노린 게 바로 이것일 테니까.
“그거야 돌려줘도 그 자식이 받질 않으니까….”
아테니아로서는 속에서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마부는 백작 영애보다 후작의 말을 더 잘 들었다.
아무리 아테니아가 선물들을 돌려보내려고 해도, 선물을 가져온 마부는 마차에서 선물을 내릴 때까지 그녀의 저택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테니아가 되팔거나 기부를 한 것이었다.
클라이브의 선물 따위, 제 저택에 들여놓기도 싫다는 뜻으로.
“알잖아, 사람들한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헬레나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아테니아를 바라봤다.
아테니아도 알고 있었다.
귀족들의 세계에서 아직도 이혼은 그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이혼한 귀족 부부가 다시 재혼한다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썩였던 것이다.
“심지어… 칼스이턴 대부인도 이 소문에 가담한 모양이더라.”
그러나 이어지는 헬레나의 말은 단언컨대 아테니아의 고민 중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