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18화 (18/111)

18. 끼리끼리 논다 (1)

“…뭐?”

아테니아는 순간 자신이 무얼 들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이시아는 도대체 아테니아의 어느 방면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제멋대로 말을 이었다.

“나와 클라이브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요!”

레이시아의 태도에 아테니아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차올랐다.

여기서 레이시아를 상대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테니아가 레이시아를 대문 밖으로 밀어 버리고 등을 돌리던 찰나였다.

“진짜라고요! 애초에 빈켄티우스 대공이 당신한테 관심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굳이 당신 같은 드센 여자와 얽히지 않았을 거라고 했단 말이에요!”

레이시아의 외침에 아테니아의 걸음이 멈칫했다.

아테니아가 순간 뒤를 돌아 레이시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 입 닥쳐.”

레이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레이시아는 키가 작은 편이었고, 아테니아는 키가 큰 편이었다.

그런 아테니아가 제법 굽이 높은 구두까지 신고 있으니 시야의 높이차가 제법 상당했다.

그 상태로 아테니아가 내려다보니, 레이시아는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말았다.

“마틴, 저거 끌고 들어와.”

아테니아가 레이시아를 가리키며 마틴에게 말했다.

존칭은 바라지도 않지만, 저거라니.

게다가 아테니아는 데리고 들어온다는 말이 아니라, 죄인을 대하듯 끌고 들어오라고 이야기했다.

그 어투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으니, 그것은 의식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무의식에 박힌 것에 가까웠다.

즉, 아테니아가 레이시아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레이시아의 얼굴이 모멸감에 확 달아올랐다.

그녀를 안으로 들이는 마틴의 태도에는 역시 귀족 영애를 대하는 정중함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알아서…!”

레이시아가 울컥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휙 뒤를 돌아 레이시아를 쳐다보는 순간, 그녀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아테니아의 기세에 압도된 탓이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시아는 아테니아를 만만하게 봤다.

아카데미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했다는 부유한 백작가의 똑똑한 영애도 제게 남편을 빼앗기는, 별수 없는 그저 그런 여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레이시아가 가졌던 그 얄팍한 감정들이 오늘 산산이 조각난 것이다.

그녀가 아테니아를 상대로 우쭐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아테니아가 가만히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레이시아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녀는 아테니아를 얌전히 따라 들어가면서도, 두 눈을 번뜩였다.

언젠가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갚아 주고 마리라.

레이시아는 이를 갈며 생각했다.

***

아테니아가 레이시아를 저택 안으로 들여놓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레이시아가 하필, 발레리안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아테니아와 클라이브 사이의 일이야, 이미 사교계에 떠들썩하게 퍼진 것이었다.

그러니 레이시아가 어떻게 떠들든, 아테니아는 그녀를 제 집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제게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한 건 무슨 소리야.”

응접실에 앉자마자, 아테니아가 레이시아를 추궁했다.

딱히 제대로 된 손님 대접을 할 생각 따위 없었기에 하녀들이 차도 내오지 않은 상태였다.

“아무리 연락 없이 왔다지만….”

레이시아가 구시렁거렸다.

“내가 상간녀한테 차까지 대접해야 해?”

그것을 아테니아가 날카롭게 잘라 냈다.

그러자 입을 다물었던 레이시아가 그제야 본론으로 넘어갔다.

“어… 어쨌든! 내 말은 사실이에요. 클라이브는 애초에 당신을 사랑한 적 따위 없다고 했어요.”

레이시아가 억지로 고개를 빳빳이 들며 주장했다.

아테니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3년간의 뜨거운 연애, 1년간의 행복한 신혼.

그리고 그 전의 1년은 클라이브가 친구로서 그녀의 곁을 지켜 주었던 시간이었다.

클라이브와 결혼하기 전, 어쩌면 아테니아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인생에 실패라고는 딱히 겪어 본 적이 없었던 그녀가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여겼던 첫사랑에게 거절당한 후,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무려 1년이 걸렸었으니까.

그 1년을 클라이브가 곁에 있어 주었기에 아테니아는 괜찮아질 수 있었다.

물론, 클라이브가 없었어도 첫사랑의 실연에 대한 슬픔은 언젠가 극복했을 터였다.

그러나 슬픔에 젖어 보냈을 시간에 위로가 될 누군가가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의미던가.

그런데 레이시아는 지금 그 시간들조차 모두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나랑 결혼했는데?”

아테니아는 말끝을 늘이거나, 머뭇거리지 않기 위하여 애를 쓰며 일부러 담담히 말을 꺼냈다.

자신이 무언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레이시아는 금방 아테니아를 또 우습게 볼 터였다.

저런 부류의 인간에게는 한 치의 틈도 내주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를 만큼 아테니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빈켄티우스 대공이….”

“똑바로 불러. 대공 전하.”

레이시아가 말을 잇자, 아테니아가 아까부터 거슬렸던 것을 지적했다.

“네, 네. 어쨌든,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가 당신….”

“당신이 아니라 크리스나 영애. 대체, 넌 교육을 제대로 받기는 한 건가?”

아테니아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테니아나 발레리안 모두 레이시아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레이시아가 대공이나 당신 따위로 제멋대로 부르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말 좀 하면 안 돼요?”

“말을 꼭 그렇게 교양 없이 해야 해?”

“…저보고도 너라고 부르시잖아요!”

“주제 파악 좀 해. 그럼 내가 상간녀를 상대로 존칭을 써 줄 줄 알았어?”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논쟁을 할 필요도 없이 계급에 따라 아테니아는 그래도 되고, 레이시아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아버지의 권위 의식을 싫어했다.

그렇기에 굳이 지위로 레이시아를 찍어 누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아테니아는 자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하여 상대에 대한 호칭을 제멋대로 편하게 한 적 따위 단 한 번도 없었다.

레이시아한테도 그녀가 제 남편과 바람을 피우지만 않았다면, 예의를 다했을 터였다.

레이시아가 이 자리에 발레리안이 없다고는 하나, 그를 상대로 무례하게 굴지만 않았더라면 아테니아는 자신에 관한 건 그냥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자신이 만만하게 보임으로서, 자신을 도와준 발레리안까지 그렇게 취급받는다는 건 아테니아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았다고요.”

레이시아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테니아는 그제야 말을 이으라는 듯 고갯짓했다.

“그러니까 클라이브가 말하길,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가 가지지 못한 크리스나 영애를 차지하고 싶었다고 했어요.”

아테니아가 멈칫했다.

이유가 있었다지만, 어쨌든 그녀를 거절한 것은 발레리안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테니아를 가지지 못했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명확한 것이 있었다.

크리스나 가문의 재산과 발레리안에 대한 열등감.

그것들이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에게 접근한 이유였고 거기에 그녀에 대한 사랑은 없었다는 것.

‘네게 첫눈에 반했어, 테나.’

오래전부터 아테니아를 사랑해 왔고 그래서 그녀를 내내 기다렸다는 클라이브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것.

또 다른 배신감이 아테니아를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이 거짓이었다고 해도- 그녀는 진짜로 클라이브를 사랑했으니까.

‘아, 그래서 그랬구나.’

아테니아는 깨달았다.

클라이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사랑한다면서, 사랑했다면서 그런 짓들을 할 수 있는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단 한순간도 진실로 아테니아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클라이브는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하고 아프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였다.

레이시아조차 아는 것을 아테니아만 몰랐을 뿐.

‘어떤 관계가 끝남에 있어, 그것이 아테니아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입니다.’

발레리안의 말이 아테니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정말로?

친구로 지낸 1년, 연애를 한 3년.

그동안 클리아브는 아테니아에게 놀랍도록 헌신적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작정하고 사람을 속이려 든다면,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아무리 똑똑한 이들이라도 사기를 당할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아테니아의 두근거리는 심장은 괜찮아지지 않았다.

‘하! 네가 이러니까 다른 여자한테 남편이나 빼앗기는 거야!’

이번에는 클라이브의 말이 생각났다.

아테니아는 떨리는 두 손을 들키지 않기 위하여 소파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진짜로 그녀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걸까?

5년을 함께하고 4년을 열렬히 사랑한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했는데?

자신에게 이유가 단 하나도 없을까?

클라이브가 한 말들과 현재의 상황이 아테니아를 마구마구 깎아 먹었다.

와르륵.

그녀의 자존심과 자존감이 모조리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에게 어떤 기대가 더 남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변심한 것과 처음부터 사랑조차 없었다는 것은 아주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아테니아는 순간 레이시아에게 묻고 싶었다.

혹시, 클라이브와 자신이 결혼하기 전부터 두 사람이 만나고 있었던 거냐고.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테니아는 화들짝 놀랐다.

입 밖으로 내뱉었다면 이 자리를 뛰쳐나갔을 만큼 스스로 수치스럽다고 여길 말이었다.

그런 것까지 확인하면서 구질구질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고작, 클라이브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클라이브 칼스이턴이 날 원래부터 사랑했든 아니든 그게 지금 와서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는 그 자식이랑 이혼했어.”

아테니아가 울컥 치솟는 감정들을 모두 억지로 삼키며 물었다.

이 자리가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라이가 매일 여기 온다면서요. 갑자기 나랑은 만나 주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레이시아의 말은 아테니아를 더욱 피곤하게 만들었다.

“크리스나 영애가 대체 라이한테 뭐라고 했길래 갑자기 나한테 그러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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