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넌 내 거야 (7)
클라이브는 아테니아의 저택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저택에서 편하게 쉴 수 있었다.
물론, 더한 것을 요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클라이브가 물품의 비용을 속여 크리스나에서 본 손해보다, 칼스이턴과 함께함으로써 볼 이득이 더 컸다.
그도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니, 크리스나 백작이 겨우 이 정도로 거래를 포기할 리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아테니아가 과한 것을 요구한다면, 클라이브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고 한도 내의 거래를 한 셈이었다.
“…단단히 미친놈. 지가 한 짓이 있는데, 나랑 재결합하길 바라?”
클라이브가 가자마자, 아테니아의 얼굴 위로 진솔한 감정이 드리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혼하자마자 쉽게 다시 시작하자는 식으로 나오는 놈의 얼굴에 뜨거운 찻물을 들이붓지 못한 게 아직도 아쉬웠다.
응접실에 들어올 때 그 기대에 찬 얼굴이라니.
정말 너란 놈은 사실 최소한의 수치심이라는 것도 모르냐고 묻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야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철면피처럼 군단 말인가.
“…하아.”
아테니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 당장이야 이런 식으로 클라이브를 쫓아냈다지만, 아마도 그는 그녀와의 재결합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만약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몰염치한 작태로 찾아왔겠는가.
지금은 당장 클라이브가 상황이 급하니 물러선 것뿐이었다.
칼스이턴과 크리스나의 거래 관계가 단단했던 것은 아테니아와 클라이브가 혼인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혼했어도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그냥 서로를 믿고 신뢰하면 될 것 같지만 말이야 쉽지. 가문 간에 결합이 있기에 서로 적당히 양보하던 이권부터 당장 챙기려 들 터였다.
그러다가 깨지는 귀족 가문 간의 거래가 한두 개이던가.
그러니 칼스이턴과 크리스나가 서로를 믿기 위해서는 결혼이 필요했다.
다만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아테니아가 이혼 후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무리 클라이브가 뻔뻔해도 바람피워 이혼당한 주제에 선뜻 먼저 재결합하자고 달려들 리 없다는 지극히 정상인의 사고 판단하에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정상인이었다면,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본래 정상인은 미친놈의 사고방식을 알 수 없는 법이었다.
누구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클라이브 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생각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할 터였다.
말 그대로 그게 정상이니까.
그러나 어쨌든 클라이브는 미친놈이었고 아테니아에게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녀의 한숨이 점점 더 깊어졌다.
***
역시 아테니아의 예상대로 클라이브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환심을 사서 마음을 돌리기라도 할 작정인지, 이번에는 아테니아의 저택으로 선물 공세를 해 왔다.
물론 그 선물은 되팔아 빈민가나 보육원 등에 기부되었다.
그렇지만 매일같이 누가 봐도 요란하게 선물을 실은 마차가 저택 앞에 도착하니, 그녀는 그 또한 스트레스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외출을 하기로 했다.
본디 외향적인 성격인 그녀가 이혼 후 괜한 수군거림이 싫어 집 안에서만 틀어박혀 있던 터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테니아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기분 전환 하나 못 한다는 건 상당히 억울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로 아테니아는 간만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치장했다.
이혼했다는 이유로 추레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그녀와 이혼해서 아쉬울 건 클라이브지, 아테니아가 아니었으니까.
“우리 아가씨, 여전히 예쁘시네요.”
비록 작은 저택이었기에 치장을 도와주는 하녀는 따로 없었으나, 제미니의 손재주는 상당했다.
제미니는 자신이 꾸며 준 아테니아를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테니아 역시 저택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제대로 꾸며서인지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그 즐거운 마음은 길게 가지 못했다.
똑똑똑.
“아가씨, 손님이 오셨어요.”
아테니아의 저택에서는 제미니 외에 하인 한 명, 하녀 한 명을 더 부리고 있었다.
그중 하녀인 에밀리가 말을 전해 왔다.
아테니아의 얼굴에 의아함과 함께 불길함이 떠올랐다.
대체 이 작은 휴식처에 왜 자꾸 누가 찾아오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누구라고 하던?”
아테니아가 물었다.
“레이시아 윌터스 영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에밀리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아테니아의 즐거움을 완벽히 망쳐 버렸다.
“저 미친 것들이 진짜…!”
아테니아가 막 끼려던 레이스 장갑을 내던졌다.
쌍으로 미쳐도 정도껏이지, 여기가 어디라고 한 놈 보내니 다른 인간이 찾아와서 이런단 말인가.
“…하아, 됐어. 무시해.”
열을 냈던 것도 잠시, 아테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외출을 위해 마차까지 불러 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굳이 레이시아 때문에 외출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예, 아가씨.”
에밀리가 말을 전하기 위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아악!”
그러나 곧 창밖에서 에밀리의 비명이 들렸다.
아테니아가 놀라 창문을 열었다.
“하녀 따위가 날 우습게 봐!”
레이시아가 대문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에밀리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마틴! 당장 대문으로 가서 에밀리한테서 저 여자를 떼어 놔!”
아테니아가 방을 뛰쳐나가며 외쳤다.
물론, 그녀도 곧바로 아래층으로 향했다.
대문으로 달려가자 마틴이 에밀리와 레이시아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보였다.
아테니아가 그대로 성큼성큼 다가가 대문을 열었다.
철썩.
레이시아의 고개가 거세게 돌아갔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쫘악!
아까보다도 더 세게, 레이시아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넘어갔으니까.
순간적으로 뺨을 두 대나 얻어맞은 레이시아가 어안이 벙벙한지 느릿하게 고개를 바로 해 아테니아를 쳐다봤다.
어찌나 사정없이 때렸는지 레이시아의 양 뺨과 더불어 아테니아의 손바닥까지도 붉어져 있었다.
“아아악!! 당신 미쳤어?!”
뒤늦게 정신이 든 레이시아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아테니아는 레이시아를 압박하듯 다가가 살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야말로 미쳤니? 어딜 내 사람한테 감히 손을 대!”
칼스이턴 저택에서 클라이브와 싸우면서 그의 뺨을 때리면서도, 레이시아에게 보복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더는 그들과 더럽게 얽히기 싫어서도 있었지만, 가장 근본적인 잘못은 아테니아를 배신한 클라이브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레이시아도 죄가 없지는 않았으나, 아테니아는 클라이브 따위를 두고 두 여자가 머리끄덩이를 잡는 그런 촌극 따위 연출하고 싶지 않았다.
그깟 놈, 뭐가 대단하다고 여자 둘이 남자 하나한테 달라붙어 싸운단 말인가!
그러니까 오늘 레이시아가 감히 자신의 사람에게 손을 대지만 않았더라면, 아테니아는 레이시아 따위 잊고 살았을 터였다.
“내가 너 따위랑 얽히기 싫어서 그냥 넘어가니까 내가 우습니? 어딜 와서 행패는 행패야!”
물론, 자신을 건드리는 것 또한 마냥 괜찮지 않았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제 사람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자신이 참고 말고는 제 선택이지만, 부리는 고용인들이 어떤 취급을 당하느냐는 그 주인의 태도에 달려 있었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참지 않은 것이다.
주인인 그녀가 고용인들이 당하는 부당함에 화를 내주어야만, 앞으로도 그들이 레이시아에게 당한 것 같은 취급 따위 받지 않을 테니까!
“상간녀 소송이라도 내 줄까? 사교계에 소문도 쫙 퍼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 어디 한 번 황실에서 잘리는 건 당연하고, 수도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줘?!”
아테니아가 아무리 클라이브와 이혼했다고 한들, 그녀가 수도의 귀족으로서 사교계에서 입지를 다져 온 것이 몇 년이던가.
그런 아테니아에게 레이시아가 내연녀로 살았다는 사실을 여기저기 알리는 것쯤은 사실 일도 아니었다.
황실은 가뜩이나 체면을 중요시하는 곳이다.
클라이브와 레이시아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황궁에서 내쫓길 터였고, 더불어 황실의 관리가 황실의 품위를 훼손했다 하여 고소까지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니아가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그 소문이 퍼졌을 때, 더 큰 벌을 받을 사람은 클라이브가 아니라 레이시아였기 때문이다.
클라이브는 저명한 후작가의 가주고 레이시아는 한미한 남작가의 미혼 영애였다.
황실에서 둘 중 하나가 잘려야 한다면 황실은 분명 레이시아를 내칠 터였다.
게다가 그런 소문이 나면 레이시아의 혼삿길은 앞으로 쭉 막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밥줄이고 혼삿길이고 말 그대로 인생 말아먹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테니아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모두 끊어 버리고 싶었다.
거기에 상간녀 소송으로 막대한 위자료를 물게 만들면, 레이시아의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가는 것쯤이야 지나치게 쉬웠다.
그러나 클라이브는 멀쩡하게 살아갈 텐데, 상대적 약자인 레이시아한테만 보복하는 그런 저열한 사람이 되기는 싫었던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아테니아가 참는 이유였다.
그런 저열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네까짓 걸 처리 못 해서 안 하는 거 같아? 착각하지 마! 네가 너무 보잘것없어서, 처리할 가치도 없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는 거야!”
아테니아가 애써 삼키고 있었던 말을 모조리 토해 냈다.
레이시아가 이딴 식으로 쳐들어와서 아테니아의 속을 뒤집어 놓지만 않았더라도, 굳이 평생 하지 않을 말이었다.
“…자, 잘못했어요. 저는 다만…!”
레이시아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인지,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클라이브를 제게 돌려달라고 말씀드리려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