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넌 내 거야 (6)
이곳은 수도의 귀족들이 모여 사는 주택가 중 하나였다.
그 한복판에서 제 이름을 불러 젖히는 클라이브의 행동에 경악한 아테니아가 창가로 다가갔다.
“할 말이 있어!”
사교계 말로, 귀족들의 눈과 귀는 어디에든 있다고 했다.
지금 클라이브의 행동도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사교계에 쫙 퍼질 게 분명했다.
“네가 나한테 화가 많이 난 걸 알아!”
그런데도 클라이브는 공개적으로 이딴 소란을 피워 아테니아까지 곤란하게 만드는 짓거리를 멈추지 않았다.
“네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기다리긴 뭘 기다려, 이 새끼야.
아테니아는 그렇게 숫제 욕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가서 이런 대응을 하는 순간, 그야말로 사교계 귀족들의 도마 위에 자신을 잡아 잡수쇼 하고 올려 주는 것과 똑같았다.
‘참자, 참아.’
아테니아는 속으로 끝없이 말을 되뇌었다.
클라이브를 어떻게 떨쳐 냈는데, 저 자식과 다시 얽힐 수는 없었다.
“아테니아, 사랑해!”
그러나 클라이브는 최소한의 수치심도 없는 모양이었다.
“난 알고 있어! 너도 날 아직 사랑한다는 걸!”
수치심은커녕 머리에 생각도 없는 것인지 되는대로 내뱉은 말에 아테니아가 순간 울컥하여 소리쳤다.
“저 미친놈이 뚫린 입이라고!”
아테니아가 제자리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두 손이 분노에 바들바들 떨렸다.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창문을 열어 클라이브와 말을 섞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자고로, 저딴 놈은 무시하는 게 답이었다.
그녀가 괜스레 분노하여 뛰쳐나가 물이라도 끼얹는 날에는, 매달리는 전 남편을 쫓아낸 매정한 여자라면서 다들 수군거릴 게 뻔했으니까.
아테니아가 한숨을 삼켰다.
언제부터 이렇게 겁이 많아졌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나라에서 아직까지 이혼한 여자는 구설에 오르기 너무 쉬웠다.
게다가 클라이브는 어찌 되었든 후작이 아닌가.
그에 반해 그녀에게는 어떤 작위도 없었다.
아테니아의 가문도 그녀를 보호해 주지 않을 테니, 몸을 사려야만 했다.
아테니아는 참자는 말을 새기고 또 새겼다.
그렇게 속이 불지옥 같은 20분이 지나고 나서야, 클라이브는 제 풀에 지쳐 돌아갔다.
“미친놈, 미친놈!”
아테니아가 욕을 지껄였다.
좀 전과 같은 욕이었으나, 욕을 다양하게 구사하기에는 그녀는 귀하게 자라 온 귀족이었다.
아마 클라이브가 아니었다면 아테니아가 욕을 입에 담을 일 따위 일평생 없었을지도 몰랐다.
“한심한 놈. 고작 20분을 버틸 거면서 저 난리를 피워?!”
아테니아가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녀의 저택 주변 귀족들이 수군덕거릴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그렇지만, 고작 20분을 기다렸다고 가 버린 놈이니 다시 안 오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아테니아! 사랑해!”
저 미친놈이, 다음날도 아테니아의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
아테니아는 골이 지끈지끈하는 것을 느꼈다.
하루에 10분에서 20분.
클라이브가 일주일째 그녀의 앞에서 난동을 부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고작 그 하루의,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10~20분 따위가 아테니아의 일상을 완벽히 망쳐 놓고 있었다.
저 짓거리를 다음 날에도 또! 하리라고 생각하니 그 전날부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었다.
“아가씨, 조금 더 드셔야죠.”
“미안, 제미니. 입맛이 없어.”
그래서인지 아테니아는 요즘 식사를 통,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클라이브만 봐도 식욕이 뚝, 뚝 떨어진 탓이었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께 연락이라도 드려 볼까요?”
제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작인 클라이브를 막으려면 그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당연히 공작씩이나 되는 가문의 사람들과는 얽히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따지자면, 발레리안을 알고 있는 아테니아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만큼이나 도움을 받았으면 됐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든, 내가 할 일이지.”
아테니아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오후 6~7시 사이.
직장에서 퇴근하는 수도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리를 오갈 시간이었다.
아테니아는 속으로 수를 셈했다.
‘3, 2, 1….’
“아테니아! 나랑 이야기 좀 하자니까!”
일주일 하고 하루째.
또, 클라이브가 찾아왔다.
그는 일부러 사람들에게 더 각인시키려는 듯 꼭 이 시간대에 아테니아의 저택을 찾아왔다.
그 속내가 빤했다.
아테니아와 자신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이라는 것을 여기저기에 알림으로서, 그녀를 압박할 셈인 것이다.
“제미니, 클라이브를 응접실로 데려와.”
그러니까 클라이브의 속셈을 아는 이상, 아테니아도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결연한 얼굴로 제미니에게 명령했다.
“그렇지만, 아가씨….”
제미니가 크게 주저했다.
제 아가씨를 감금까지 했던 인간이었다.
그런 상대를 집 안으로 들여놓다니.
그 자체만으로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제미니.”
아테니아가 제미니를 달랬다.
제 하녀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나를 믿어 줘.”
그러나 아테니아도 무모하게 클라이브를 만나겠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제 주인의 결연한 얼굴을 본 제미니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럼 모셔 올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아가씨.”
“응, 알았어.”
이번에는 아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미니가 아테니아의 방을 나가고 나서 조금 후, 저택의 대문이 열리고 클라이브가 안으로 들어서는 게 창문을 통해 아테니아의 두 눈에 들어왔다.
아테니아가 곧 결연한 얼굴로 응접실로 향했다.
***
“아테니아! 드디어 내 마음을 알아줬….”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클라이브가 호들갑을 떨며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닥치고 앉아.”
아테니아가 싸늘한 얼굴로 클라이브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표정이 굳었다.
클라이브가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닥치라니, 여기까지 온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그럼 그대로 꺼져 버리든가.”
그러나 아테니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
클라이브가 그런 아테니아의 태도에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그녀가 나직이 경고했다.
“또 무슨 짓거리를 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공식적으로 너와 나는 이제 남이고, 전처럼 남편이기에 설렁설렁 넘어갈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클라이브는 분명 아테니아를 감금했다.
그러나 그가 그녀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그 죄는 단순히 강권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에게 그런 불공정한 행운 따위 두 번은 없다는 사실을 인지시켰다.
“…너도 나를 저택에 들여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클라이브가 이를 악물며 자리에 앉았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테니아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했다.
“이유, 그래. 있지.”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녀도 그가 끈질기게 찾아오는 일주일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이 서류는 아테니아가 일주일간 공을 들여 작성한 것이었다.
그것을 들여다본 클라이브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이걸 내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너도 참 난감해질 거야, 그렇지?”
서류에는 클라이브가 크리스나 가문과의 거래 중, 물품 대금을 속이고 그 차액으로 이득을 본 내역이 적혀 있었다.
클라이브가 바람을 피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아테니아는 그의 집무실을 몰래 드나들었다.
워낙 금실이 좋은 부부였기 때문에 그녀가 후작의 집무실을 들락거려도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적어 둔 거래 내역 장부를 발견했다.
그것을 보고 달달 외워 둔 게, 지금 쓰이는 것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뛰어난 상인이었다.
아테니아가 이 내역의 일부만 건네줘도, 그간 클라이브가 백작을 속이면서 생겨난 이상한 점들을 금방 알아차릴 터였다.
본래 이 내역들은 아테니아가 이혼 후, 크리스나와 칼스이턴 사이를 말끔히 정리하기 위하여 써먹을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보인 태도로 봐서는, 아테니아는 자신의 생각에 대하여 회의적으로 변했다.
크리스나 백작은 칼스이턴과 함께하며 얻을 이득을 놓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브 또한 크리스나 백작가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끈질기게 아테니아를 찾아올 리가 없으니까.
그녀는 아직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의 헛소리 따위 믿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은 행동으로 증명되는 것이었다.
클라이브는 그의 속내가 얼마나 시꺼먼지, 스스로 보인 작태들로 훤히 드러냈다.
그런데 인제 와서 속을 리가 있겠는가.
“…이걸 보여 준다고 크리스나 백작이 우리 가문과의 거래를 포기할 것 같아?”
아테니아가 쯧, 혀를 찼다.
제 아버지의 앞에서는 크리스나 백작님, 하고 깍듯이 존대하던 클라이브였다.
공경하는 듯 보였던 태도도 그런 척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긴, 제 아내를 우습게 여기는 인간이 아내의 아버지라고 해서 존중하겠는가.
“네 말이 맞아.”
아테니아가 쉽게 긍정했다.
그러나 그녀도 거래 파기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네 잘못이 있으니 앞으로 크리스나 백작 가문과 같이 하는 사업에서 내 가문에 번번이 이권을 양보하고 져 줘야 할걸?”
아테니아가 노린 것은 더 가지고자 하는 클라이브의 욕심이었다.
그녀의 노림수가 들어맞았는지, 클라이브는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이를 악물고 있던 클라이브가 분함을 꾹꾹 눌러 담은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건데?”
비로소 아테니아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내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