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특별한 결혼을 위하여-15화 (15/111)

15. 넌 내 거야 (5)

칼스이턴 후작이 황실에 제 억울함을 호소하는 진상서를 제출했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귀족원을 통해 황실이 두 가문 사이의 중재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진상서가 귀족원으로 넘어가기 전에, 황제가 발레리안을 불러들였다.

발레리안의 어머니는 선황제의 사생아였고, 전 빈켄티우스 대공과 혼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황녀로 인정받았다.

즉, 발레리안은 황제의 조카가 되는 셈이었다.

실제로 그는 현 황실에 자손이 별로 없는지라, 황위 계승 서열 3위에 해당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황제가 황실의 체면을 위해 조용히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미리 발레리안을 불러들인 것이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알현실로 들어가자마자, 발레리안이 황제에게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황제가 되었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일어나렴. 그렇게까지 인사할 필요 없다고 해도.”

황제는 늘 발레리안에게 자비로운 외삼촌 역할을 자처하고는 했다.

그러나 실은, 늘 제 아들보다 뛰어난 발레리안을 견제했다.

발레리안이 졸업 후 수도에 되도록 발걸음하지 않은 이유였다.

황제의 견제가 성가셨기 때문이다.

“늘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그렇지만 예우를 다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녀석, 딱딱하기는.”

황제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발레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 황제의 말대로 격의 없이 구는 순간, 황제는 돌변할 터였다.

황제는 늘 발레리안으로부터 그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너를 부른 이유는 시종장을 통해 들었겠지.”

황제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클라이브가 진상서를 제출한 것에 대해서는 시종장이 미리 발레리안에게 말을 전한 터였다.

애초에 황제가 굳이 친밀한 척을 할 뿐, 황제와 발레리안은 실제로 사담을 나눌 만한 공통적인 주제도 없었고 그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러니 차라리 괜한 대화를 하는 것보다 이게 나았다.

“예,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발레리안이 몸을 낮추어 말했다.

솔직히 빈켄티우스 대공가가 굳이 황제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었지만, 황제의 견제가 더 귀찮았다.

게다가 황제가 발레리안을 제어할 수 없다고 느끼면, 황제는 분명 그를 누를 수단을 찾으려 들 터였다.

그렇게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네가 이번에 칼스이턴 후작 부부의 일에 관여했다던데… 칼스이턴 후작에게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느냐?”

황제가 눈매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귀족 사회에서 정부를 두는 일은 제법 흔했다.

특히, 남자들의 바람에 대해서 이 사회는 더욱 관대했다.

아테니아의 어머니가 남자들이 살다 보면 한 번쯤은 한눈팔기도 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은 괜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인식이기에, 자연스레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그랬으니 사실 발레리안이 증인이 되어 치안대를 이끌고 클라이브의 바람 현장을 덮치지만 않았더라면 재판부에서는 아테니아의 손을 쉽게 들어 주지 않았을 터였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관여함으로써, 그녀는 유리한 판결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것에 관하여 황제는 묻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아테니아 크리스나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야?”

황제는 발레리안에게 이것을 떠보기 위하여 그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황실의 체면은 역시나 핑계에 불과했다.

발레리안은 평정을 가장했다.

아테니아를 황제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칼스이턴 가문과 크리스나 가문의 사업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황태자 전하께서 그 사업에 관심을 가지시더군요.”

발레리안이 준비해 둔 핑계를 꺼내 들었다.

칼스이턴 가문과 크리스나 가문이 함께하는 운하 건설 사업은 한 가문이 홀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두 가문이 갈라지면 누가 이 큰 사업을 가져갈 것인가부터 문제가 되어 황실에도 기회가 생길 것이었다.

단독은 아니어도, 최소한 둘 중 한 가문이 운하 사업에서 손을 떼면 다른 투자자가 필요했다.

이때 발레리안의 말이 사실이어서 빈켄티우스 대공가가 황실을 돕는다고 생각하면, 전적으로 황실이 유리할 터였다.

“그러니까 황태자를 돕기 위해서다?”

황제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황태자가 운하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칼스이턴 후작 부부의 사이가 워낙 돈독했던 탓에, 칼스이턴과 크리스나 사이에는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이번에 그렇게 돈독했던 칼스이턴 후작 부부가 갈라선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 물어보시면 금방 알 겁니다. 제가 수도로 올라온 이유도 황태자 전하께서 부르셨기 때문인 건 폐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황제가 발레리안이 수도에 오는 것 자체를 내내 경계해 왔다면, 황태자는 발레리안을 자신의 아래로 두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리하여 황태자는 발레리안이 북부에 틀어박힌 이후 내내 발레리안에게 수도로 오는 초대장을 보냈다.

발레리안이 몇 년 만에 수도에 온 이유는 그런 까닭이었다.

황태자의 초대는 끈질기고 또 끈질겼다.

“아테니아 크리스나 때문이 아니란 말이냐?”

황제가 한 번 더 발레리안을 떠보듯이 물었다.

발레리안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크리스나 영애와 더는 얽힐 일 없습니다.”

크리스나 가문은 수도 귀족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부유한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과 발레리안이 얽히는 것을 황제는 극도로 경계했다.

그러니까 발레리안은 아테니아를 위해서라도 그녀와 거리를 두어야만 했다.

어차피 그는 평생 아이를 가질 생각 따위 없었고, 아테니아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는 게 꿈이었다.

그러니 발레리안은 그녀를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그가 아테니아와 최대한 얽혀 주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지 않는 일이었다.

다만, 발레리안은 아테니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내 아들 때문이라니 칼스이턴 후작의 진상서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마.”

곧, 황제가 의심의 눈을 거두고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발레리안은 아카데미 이후 아테니아와 일절 교류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행동이 의심 많은 황제에게 믿음을 준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를 숙이는 발레리안의 두 눈이 첨예했다.

황제한테 고개를 숙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단, 황제가 아테니아를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

발레리안은 그렇게 가 버린 이후, 아테니아가 돌려받은 자신의 지참금으로 새로운 저택을 구할 때까지 내내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기다렸다가, 끝내 발레리안이 급하게 가 버렸던 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음을 인지했다.

“…마지막 인사 한마디 정도는 해 줄 수 있었잖아.”

아테니아가 새로 이사한 그녀만의 보금자리는 칼스이턴 후작 저택보다 훨씬 작은 아담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클라이브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살 것 같았다.

이 작은 저택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이사까지 와 버리면서 더는 발레리안과 마주칠 일이 전혀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을 내뱉고 나서야 스스로의 속내를 깨달은 아테니아가 휙휙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이혼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러는 거야.”

물론, 클라이브로 인해 겪은 거지 같은 일들은 억겁의 시간을 지나온 것만 같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견뎌 낼 수 있게 도와준 것은 발레리안이었다.

그렇지만, 아테니아는 순간적으로 발레리안과 다시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을 아쉬워한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녀는 절대 클라이브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이혼하자마자 다른 사람의 생각에 빠지면, 마치 그것 때문에 이혼을 기다렸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라이브와 이혼도 했고, 크리스나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독립도 했다.

아테니아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스스로만 잘 챙기기로 했다.

히이잉-

그러나 그런 그녀의 생각을 저택의 대문 밖에서 들려온 말 울음소리가 깨 버렸다.

“누구지…?”

아테니아가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의 저택은 아담했기 때문에, 아테니아의 방은 2층에 있었고 현관과 대문이 가까웠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집 대문 앞에 말을 타고 서 있는 사람이 클라이브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미친놈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발레리안과 마지막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고, 아테니아는 항소를 결국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항소하는 것에 관한 결정 기한이 남아 있기는 했으나, 그녀는 더는 클라이브로 인해 곤욕을 겪고 싶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분명 감금을 당한 피해자지만, 생각 없는 이들은 그에 관해 말 안 듣는 드센 계집은 그런 식으로라도 교육을 해야 하니 어쩌니 떠들 터였다.

명예가 밥 먹여 주냐고 하지만, 귀족 사회에서 명예는 실제로 귀족들의 커다란 일부였다.

아테니아는 발레리안과 자신, 둘 모두의 평판에 좋을 리 없는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클라이브가 이렇게 그녀의 저택을 찾아오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똑똑똑.

“아가씨, 드릴 말씀이 있는데….”

밖에서 주저하는 제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아테니아를 아끼는 하녀의 입장에서, 클라이브가 왔다는 소식을 전하기 껄끄러웠으나 그렇다고 하여 칼스이턴 후작의 방문을 무시할 수도 없기 때문일 터였다.

제미니가 더 곤란해하기 전에, 아테니아가 먼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칼스이턴 후작님에게 정. 중. 히 내가 집에 없다고 전해 주련?”

아테니아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저 뻔뻔한 새끼가 대체 무슨 낯짝으로 여기를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물 한 바가지라도 끼얹으라고 하고 싶었으나, 아테니아는 이제 다시 백작 영애의 신분이었다.

그런 상황에 후작인 클라이브에게 물을 끼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저 새… 아니, 후작님이 가면 그 뒤에 소금을 뿌리도록 해. 꼭!”

“네, 네, 아가씨!”

제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아래로 내려갔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이대로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다.

문전 박대도 이런 문전 박대가 없었으니,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가 버릴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그러나 클라이브 칼스이턴이라는 인간은 아테니아의 상상 이상으로 뻔뻔하고 수치도 모르는 자였다.

“아테니아!!!”

창문 밖으로, 돌연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