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넌 내 거야 (4)
“…이런 추문이 나면 미래의 대공비 전하께서 싫어하실 거예요.”
미래의 대공비 전하.
그 단어들만큼이나 아테니아와 발레리안의 사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없었다.
발레리안은 아직 미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나라의 유일한 대공가를 이을, 대공가의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러니 발레리안에게 결혼은 필수였다.
그리고 그 혼인 상대가 절대 자신은 아닐 것이다.
아테니아는 그쯤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들 쉬쉬하지만, 아직도 귀족 사이에서 이혼은 흠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아카데미 시절에 발레리안이 직접 그녀를 거절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을 책임져 줄 수도 없는 판에 그에게 추문까지 돌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추문이 난다면, 그의 혼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한참의 침묵 끝에, 발레리안이 겨우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사이는 이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아테니아가 명확히 보여 준 선에 발레리안은 숨이 턱 막혔다.
이제 막 이혼한 사람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하겠냐마는, 새삼 선을 확인하는 것은 마음에 풍파를 일으켰다.
“저는 결혼을 안 할 생각이니까요.”
그렇지만 만약 아테니아가 항소를 말리는 게 자신의 결혼 때문이라면, 발레리안은 그러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네?”
아테니아가 멍하니 반문했다.
대를 잇는 것은 귀족의 가장 중요한 의무 중 하나였고, 특히나 대공가처럼 고위 귀족일수록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발레리안이 결혼을 안 할 생각이라니.
귀족이 해야 할 역할에 늘 충실히 살아왔던 그녀로서는 생각도 못 해 본 일이었다.
“…변명하자면, 그때 그대를 거절했던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때, 라는 건 아테니아가 발레리안에게 고백했을 때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아테니아, 그대는… 결혼을 원했으니까요.”
발레리안이 아테니아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물을까 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건, 그가 대답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왜 인제 와서 말씀해 주시는 건데요?”
아테니아로서는 발레리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가 아카데미에서 고백했을 때도, 재회했을 때도, 언제든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지 않았다는 건 굳이 아테니아에게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말을 꺼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건….”
발레리안이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남들 앞에서는 늘 거침없는 그가, 아테니아의 앞에만 서면 생각이 끝없이 많아졌다.
게다가, 발레리안이 말하기 힘든 사실을 몇 가지 제외하고 나니 실상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그가 마른세수하며 한숨을 삼키고는 아테니아를 마주했다.
“아카데미 시절, 제가 그대를 거절한 방법이 최악이었던 걸 압니다. 그대를 마음에 둔 듯이 굴어 놓고,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로 그렇게 떠나 버렸으니까요.”
아테니아가 순간 울컥했다.
5년이나 지난 뒤에야, 발레리안의 행동에서 저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음을 인정받다니.
그는 그녀의 고백을 미안하다는 말로 거절한 후,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졸업 후 곧바로 북부로 돌아가 버렸다.
그 허무한 끝에서 아테니아가 어떤 심정으로 남겨졌는지는, 아무도 모르리라.
그때 하필 클라이브가 그녀의 곁에 있어 줬다.
물론, 발레리안을 탓하는 건 아니었다.
클라이브와 결혼한 것은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그저, 다만- 당시에는 그만큼이나 헛헛했다.
누구라도 옆에 있어 주지 않으면 힘들 만큼.
어떤 사람에게나 그렇겠지만, 아테니아에게는 그만큼이나 강렬한 첫사랑이었다.
“이제야 사과해서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다시 만날 때까지만 해도,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테니아가 행복했다면, 발레리안은 그녀에게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테니아의 행복에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으니까.
“…절 모른 척이라도 하실 생각이셨어요?”
그 기색을 알아차린 아테니아의 마음에 원인 모를 서운함이 차올랐다.
결혼한 사람이 과거의 첫사랑과 사이좋게 지내 봤자, 반길 배우자는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까 발레리안이 모르는 사람처럼 굴려고 했던 것은 그다지 틀린 선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왜 이런 마음이 드는가.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그러지 못했지만요.”
그러지 못했던 이유조차도 아테니아가 알던 발레리안다웠다.
거리를 홀로 헤매고 있는 그녀를 그는 그냥 둘 수 없었음이라.
“제가, 이렇게 뒤늦게야 그대를 거절했던 이유를 말하는 건….”
발레리안은 말을 하며 생각이 정리가 되었던 건지, 그제야 아테니아와 시선을 맞춰 왔다.
“어떤 관계가 끝남에 있어, 그것이 아테니아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입니다.”
순간, 아테니아가 움찔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쩐지, 울고 싶었다.
발레리안과의 관계가 아무 설명 없이 끝나 버렸을 때, 아테니아는 처음에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클라이브가 바람을 피운 후 그녀를 탓했을 때는, 찰나에 정말 자신이 문제인가 생각도 했다.
아테니아의 삶에 있어 사랑을 품었던 단 두 남자와의 사이가 모두 그런 식으로 틀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되뇌면서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안의 말은 그런 아테니아의 속내를 정확히 꿰뚫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가끔 아주 무서운 부분이 있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끝이 없는 수렁.
한동안 그녀에게 생각이란 그랬다.
남편은 제 탓을 하고, 부모는 그냥 너만 참으면 된다고 하는데, 자신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의심이 든 것이다.
정말로, 이 정도도 넘어가지 못하는 내 잘못이던가?
그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래서 일부러 더, 무슨 행동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발레리안은 애석하리만치 아테니아를 너무 잘 알았다.
“그대는 언제나 옳았어요, 아테니아.”
아, 기어코 아테니아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요즘 따라 그녀는 자신이 평생 울 것을 다 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저번처럼 좌절과 절망, 분노와 무력감이 섞인 그런 게 아니었다.
아테니아는 정말이지- 비로소 살 것 같았다.
발레리안은 그녀가 실컷 울도록, 또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
아테니아는 발레리안이 준비해 준 얼음팩을 눈 위에 얹고 있었다.
발레리안에게 온갖 못 볼 꼴을 다 보였다.
정말이지,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아카데미 시절, 첫사랑에 푹 빠졌던 소녀는 그 상대인 소년의 앞에서 예뻐 보이고 싶어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보이리라고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민망함이 몰려왔다.
그런 아테니아를 아는 것인지, 발레리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저택은 빈켄티우스 가문과 전혀 관련 없는 이름으로 사 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걱정을 접어 둬도 됩니다.”
사실 아테니아가 일어나서 가장 먼저 물었어야 했던 부분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혼하자마자 빈켄티우스 저택에 몸을 의탁했다면 추문에 휩싸였을 테니까.
그러나 역시 그런 부분조차 이미 발레리안은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대가 괜찮을 때까지, 여기 머물러 줬으면 좋겠습니다.”
발레리안은 부탁하듯이 아테니아에게 말했다.
그러나 사실 부탁은 그녀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클라이브의 갑작스러운 행동으로 도망치듯이 나와 이혼했다.
그러니 아테니아가 살 만한 집을 구할 수 있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혼을 그토록 반대하던 크리스나 가문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아테니아는 자신의 아버지라면 칼스이턴 후작가와의 사업적 관계를 위해서 뭐든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그것이 이제 막 이혼한 딸과 망나니 같은 사위를 재결합시키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테니아가 그러지 않겠다고 반항하면, 또 부모와 싸우게 될 터였다.
이제 막 칼스이턴 후작가를 벗어난 그녀에게는 그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고급 여관에 머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집을 구할 때까지 여관을 전전했다가는 귀족 사회에서 비웃음이나 살 것이다.
아테니아는 자신이 쫓겨난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도왔던 여동생은 현자의 탑 소속이기에 별도의 집이 없었다.
결국, 아테니아는 지금 발레리안이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면 머무를 곳이 없는 셈이었다.
“…고마워요, 대공 전하. 도와주신 은혜는 나중에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빈켄티우스 대공인 발레리안에게 부족한 게 무엇이 있겠냐마는, 아테니아는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 아테니아의 성격을 알기 때문일까, 발레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그때, 밖에서 돌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은 아직 동이 완전히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대공 전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발레리안의 시종이었다.
그 목소리가 어딘가 다급하게 들렸다.
“잠시만요, 아테니아.”
발레리안도 그 기색을 느꼈는지 아테니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발레리안이 방을 나가, 목소리를 낮춘 채 시종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열린 방문 틈으로 아테니아의 눈에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 이어, 그가 시종에게서 황금색 편지지를 건네받는 것이 들어왔다.
‘…황실?’
황금색 편지지는 황실에서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발레리안이 편지지를 읽더니 표정을 굳혔다.
그가 시종에게 무언가를 명령하고는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아테니아, 제가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발레리안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 편지지가 황실의 소환장이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