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넌 내 거야 (2)
“…여기 얌전히 있어.”
집사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클라이브가 아테니아에게 경고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그녀는 다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피가 흐르는 발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가씨, 흐윽….”
제미니가 울음을 터트렸다.
제 아가씨가 이런 꼴을 당한다는 게 그녀로서는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충실한 이 하녀는 아테니아의 발을 조심히 들어 올렸다.
“읏….”
아테니아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다행히도 제미니가 간단한 치료쯤은 할 줄 알아 다행이었다.
제미니가 소독약을 가져와 아테니아의 발을 소독하고 핀셋으로 조심스럽게 유리 조각들을 빼냈다.
흉이 남지 않으려면 의원에게 곧바로 보이는 것이 좋을 테지만, 문밖의 기사들이 그런 요청을 들어줄 것 같진 않았다.
“죄송해요, 칼스이턴 후작님. 언니가 쓸데없이 분란을 일으킨다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많이 걱정하셨어요.”
아테니아가 치료받는 동안, 그녀의 방문 밖으로 어느덧 누군가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크리스나가의 둘째, 셀레니아의 목소리였다.
달칵.
그리고 아테니아의 방문이 열렸다.
아테니아를 발견하자마자, 셀레니아가 멈칫했다.
“아가씨, 도와…!”
제미니가 셀레니아를 보자마자 무릎걸음으로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셀레니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싸늘했다.
“…언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아가씨…!”
셀레니아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흘러나온 말에 제미니가 경악했다.
셀레니아의 뒤를 따라 클라이브가 들어왔다.
“왜, 맞는 말인데. 괜한 분란만 안 일으켰으면, 이런 꼴 당할 일 없었을 거잖아?”
클라이브가 아테니아를 도발하듯이 빈정거렸다.
셀레니아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아테니아를 무심하게 지나쳐 소파에 앉았다.
“일단은 제가 언니를 설득해 볼게요, 칼스이턴 후작님.”
아테니아를 대하는 클라이브와 셀레니아의 태도 사이에서, 아테니아는 정말로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아테니아는 마치 넋을 놓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마냥 주저앉아 있었다.
제 둘째 동생이 저를 등졌다는 생각 탓인지, 모든 전의를 잃은 것으로 보이는 아테니아를 보며 클라이브가 만족스레 미소했다.
“좋아, 오래간만에 자매끼리 대화 좀 해 보라고.”
탁.
클라이브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테니아의 방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문이 닫히고,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언니, 그러니까 왜 나한테까지 연락이 오게 만들어.”
셀레니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아테니아에게로 다가왔다.
『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가 보내셔서 왔어. 』
셀레니아의 손에 들린 쪽지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
셀레니아 크리스나.
그녀는 크리스나가의 이단아라고 할 수 있었다.
셀레니아는 어린 날부터 유구하게 레이디답지 않은 레이디였다.
“으아아아앙…!!!”
“셀레니아!!!”
어린 날, 어른들이 말하길 소녀들에게 ‘짓궂게 장난’치던 소년들을 셀레니아가 얼마나 많이 울렸던가.
그때부터 그녀는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다만, 크리스나 백작가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셀레니아는 자랄수록 점점 더 그런 면에 두각을 드러냈다.
그녀는 여느 귀족 영애들처럼 아카데미에서 가정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셀레니아의 전공은 역사학이었다.
당시 아버지 몰래, 입학식 전 가주의 인장까지 찍어 미리 처리해 버린지라 크리스나 백작이 손쓸 새도 없었다.
크리스나 백작은 분노했으나, 입학과 동시에 셀레니아는 통학이 아니라 아카데미의 기숙사를 선택했다.
기숙사에 틀어박힌 딸을 남들 보는 앞에서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었기에, 크리스나 백작은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크리스나 백작은 셀레니아를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고 감시했다.
당시, 가족들은 모두 셀레니아에게 한마디씩 했었다.
“셀리, 제발 조용히 살면 안 되겠니?”
“누나, 굳이 이렇게 유별나게 굴어야겠어?”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아테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아버지 뜻에 적당히 맞춰 드리고 얻을 건 얻으면 되잖아.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그때, 아테니아는 정말로 셀레니아를 이해할 수 없었다.
크리스나가는 부유했고 크리스나 백작은 딸들에게만큼은 유한 사람이었다.
딸들에게 보통의 레이디들보다 더한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백작이 바라는 것이라고는 귀족가 영애답게 시집을 잘 가는 것뿐이었다.
보장된 풍족하고 안온한 삶.
아테니아는 그것을 손에 쥔 아버지에게 굳이 대드는 셀레니아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아테니아는 그 당시 자신이 영리하게 군다고 여겼다.
그러나 아니었다.
셀레니아는 알고 있던 것이다.
아버지의 상냥함은 그 뜻을 따를 때만 베풀어질 뿐 사실은 언제든 그가 원하는 때에 거둬질, 겨우 그런 것이라는 사실을.
가족들에게 그렇게 질타받은 이후, 셀레니아는 한동안 조용히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그 판단은 정확히 오산이었다.
크리스나 백작이 둘째 딸이 얌전해졌다고 여기며 안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셀레니아는 모두가 보고 있는 사교계 데뷔 파티에서 선언했다.
“저는 혼인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크리스나가의 절대적인 독재자 크리스나 백작의 의견 따위는 단 한 점도 들어가지 않은 발언이었다.
“넌 오늘부터 내 딸이 아니야!!!”
그에 따라 크리스나 백작이 대단히 노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셀레니아는 반항이라도 하듯이 그대로 현자의 탑에 들어가, 집을 나가 버렸다.
현자의 탑 소속이 되면 이전의 삶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더는 크리스나 백작도 셀레니아의 삶에 관여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그나마 백작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사교계가 가문의 둘째 딸이 또다시 유별난 일을 벌였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현자의 탑 사람들은 한번 탑에 틀어박히면 나오는 법도 없었고, 그 안에 누가 소속되어 있는지 또한 대체로 비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진리를 탐구하고 무수히 많은 것들을 연구했는데, 그 내용조차 외부에는 절대적으로 비밀인지라 모두가 현자의 탑을 괴짜들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그로 인해 셀레니아는 사교계에 알려지길, 지병으로 인해 별장에 요양하러 갔다고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아테니아도 셀레니아를 보게 된 것은 자신의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클라이브가 셀레니아에 대해 모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물론, 아테니아는 셀레니아가 아버지의 명령 따위를 들을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보냈니?”
『 어떻게 된 거야? 』
아테니아가 필담으로 물었다.
문밖에서 클라이브의 기사들이 엿듣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내용과 필담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그럼 내가 괜히 여기 왔겠어?”
『 빈켄티우스 대공가에서 현자의 탑으로 직접 연락을 취해 왔어. 』
크리스나 백작이 애써 감춰 둔 셀레니아의 소재를 단 이틀 만에 파악한 것은 발레리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어떻게 된 것인지 들어 봐야 알겠으나, 우선은 아테니아가 칼스이턴 저택을 빠져나가야만 가능했다.
“아버지가 집안 망신 그만 시키고 한동안 크리스나 저택에서 자중하라고 하셨어.”
『 크리스나 저택에 언니를 데려간다고 하고 빼돌릴 거야. 』
아테니아가 의아한 얼굴로 셀레니아를 쳐다봤다.
클라이브가 쉽게 아테니아를 보내 줄 리가 없었다.
그런데 무슨 방법으로 아테니아를 친정에 데려간다고 한다는 말인가.
『 마침 대공 전하가 클라이브 저놈한테 윗선을 통해 진짜 출장 명령을 내리셨거든. 』
클라이브가 없으면 어쨌든 이 저택을 통솔하는 건 후작 부인인 아테니아의 역할이었다.
쾅쾅.
곧 셀레니아의 말을 증명하듯, 1층 현관문에서 도어 노커를 두들기는 소리가 방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곧 클라이브가 예의도 없이 벌컥 아테니아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크리스나 영애, 할 말이 있는데.”
아테니아를 고심하듯 노려보던 클라이브가 셀레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아테니아의 의견은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였다.
“언니, 소란 피우지 말고 여기 있어.”
셀레니아가 제 언니를 한심하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까와 다르게 분위기를 바꾸어 도도하게 말했다.
“꺼져 버려.”
아테니아 역시 제 동생에 대한 반감이 가득한 태도로 사납게 대꾸했다.
셀레니아가 마치 골칫덩어리 아이를 대하는 것처럼 못 말리겠다는 듯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클라이브와 함께 아테니아의 방을 나섰다.
탁.
문이 닫히고 아테니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셀레니아가 저토록 능청스럽고 담담하게 클라이브를 대할 줄은 아테니아도 몰랐던 일이었다.
밖에서 셀레니아와 클라이브가 이야기하는 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목소리를 낮춘 것인지, 그 내용까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테니아는 잔뜩 긴장된 상태로 문밖을 쳐다봤다.
셀레니아와 클라이브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나냐에 따라, 오늘 아테니아가 칼스이턴 저택을 벗어날 수 있느냐 아니냐가 결정되었다.
단언컨대,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자신의 일을 남에게 맡겨 본 적이 없었다.
셀레니아를 믿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이 타인의 손에 달렸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훨씬 더 두려운 일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클라이브가 탄 마차가 출발하는지 말발굽 소리가 창문을 통해 들려왔다.
달칵.
그리고 그 추측이 맞아떨어져, 곧 셀레니아가 아테니아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셀레니아가 일부러 방문을 열어 놓은 채로, 아테니아에게 명령하듯이 오만하게 말했다.
“짐 챙겨, 언니. 당분간 크리스나 백작가에 가 있기로 했어. 칼스이턴 후작님께서 특별히 언니를 위해 기사들도 붙여 주시겠대. 고마운 줄 알아.”
아테니아가 애써 기쁜 기색을 감췄다.
셀레니아가 아테니아를 칼스이턴 저택 밖으로 내보내도록 클라이브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제, 아테니아는 이 지긋지긋한 칼스이턴 저택을 떠날 수 있었다.
마침내, 드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