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혼해, 이 개자식아 (4)
그 찰나에 아테니아의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뜬금없이 발레리안이 클라이브와 레이시아의 불륜 현장을 덮쳤으니, 아테니아가 관련 있다고 충분히 생각할 만도 했다.
클라이브와 레이시아가 함께 있는 곳에 기꺼이 들어가려고 했던 건, 어젯밤 일로 모든 것이 끝맺음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어쩐지 그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아테니아는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빈켄티우스 대공 전하…? 그분은 갑자기 왜?”
아테니아는 우선 모른 척 클라이브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마치 발레리안을 만난 적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너도 알다시피, 굳이 무슨 관계냐고 묻는다면 고백했다가 거절당한 사이인데… 그것도 벌써 5년 전의 일이고.”
아테니아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반응에 클라이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테니아의 행동이 진실인지 가늠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최근에 빈켄티우스 대공과 만난 적 없어?”
“북부에 있는 사람을 내가 어떻게 만나?”
아테니아가 클라이브를 똑바로 마주하며 도리어 추궁하듯이 물었다.
“무슨 일인데? 왜 날 의심하는 것처럼 그런 걸 물어?”
그러자 클라이브가 말을 돌렸다.
아테니아를 계속 의심하기에는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았던 데다가, 만약 그녀의 성격에 바람피운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이렇게 태연하게 자신을 대할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어쩌다가 빈켄티우스 대공이 수도에 있는 걸 봤거든.”
“대공 전하랑 무슨 일이 있었어?”
아테니아는 클라이브를 걱정하듯이 그를 살폈다.
그제야 완전히 의심을 내려놓은 클라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별일 없었어.”
클라이브로서는 당연히 발레리안과 있었던 일을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지금까지 아테니아를 속여 왔던 클라이브가 이제 와 제 입으로 불륜했다는 사실을 고백할 리 없을 테니까.
“별일이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나한테 괜히 말을 꺼냈을 리가 없….”
아테니아는 조금 전의 클라이브가 그랬듯이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클라이브가 순간 발끈하여 소리쳤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잖아!”
클라이브가 이렇게 군 적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아테니아는 깜짝 놀랐다.
“……왜 화를 내?”
아테니아가 겨우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클라이브는 키가 크고 제법 건장한 남자였다.
그런 그가 화를 내니 위협적으로 보였다.
가슴이 빠르게 두방망이질 쳤다.
그리고 곧 그것은 그녀에게 어떤 분노를 불러왔다.
“나한테 먼저 추궁하듯 물은 건 너야.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걱정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소리를 지를 일이야?”
겨우 클라이브 같은 인간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
그로 인해 아테니아는 치욕을 느꼈다.
“그거야, 티아 네가 나를 몰아붙이니까….”
아테니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하다, 그 한마디면 될 텐데 클라이브는 굳이 그녀를 물고 늘어졌다.
마치 모든 게 아테니아의 탓인 양 구는 그 작태에 분노와 함께 실망감이 차올랐다.
‘적어도 이전의 당신은 이렇진 않았는데….’
아테니아와 연애할 때의 클라이브는 고맙다, 미안하다 같은 표현들을 아끼지 않는 남자였다.
아테니아를 사랑하지 않기에 변한 것인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아닌 척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몰랐고.
어느 쪽이든 썩 유쾌한 전제는 아니었다.
“됐어, 말할 생각이 없으면 말아.”
아테니아가 클라이브에게서 휙 돌아섰다.
그녀는 짐짓 화가 난 척 클라이브에게서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당연했다.
괜히 붙잡았다가 아테니아가 재차 발레리안과의 일을 물으면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도 다행인 일이었다.
클라이브의 추궁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뒤, 아테니아는 클라이브가 도대체 어떻게 유치장에서 벗어났을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나 그녀는 좀처럼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무려 대공인 발레리안이 철저히 조사하라고 일러둔 일이었다.
그러니까 클라이브가 귀족으로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도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혹시 클라이브가 그쪽에 연이 있어서 뇌물을 쓴 걸까…?’
하지만 그조차 이상했다.
굳이 대공의 심기를 거스를지도 모르는 일을 하려면 클라이브와 대단히 연이 깊거나, 아주 큰 돈을 주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아테니아가 알기로 클라이브는 치안대나 법정 쪽에서 그만큼 그를 위해 줄 인맥 따위 없었다.
게다가 가문의 장부를 확인한 결과 갑자기 커다란 돈이 빠져나간 흔적 또한 발견하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클라이브가 어떻게 빠져나왔단 말인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아테니아가 순간 멈칫했다.
곧,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설마… 설마, 그건, 아닐 거야. 설마….”
아테니아는 입 안쪽 살을 잘근잘근 씹어 가며 방금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초조함이 그녀의 얼굴에 적나라하게 떠올랐다.
가정만으로도 끔찍해서 두 번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아테니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확인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으므로.
***
아테니아가 도착한 곳은 크리스나 백작저였다.
“티아, 이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니…?”
어머니는 찾아온 제 딸을 보고도 반가운 얼굴이 아니었다.
크리스나 백작 부인의 얼굴에는 누가 봐도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아테니아가 어떤 분란을 일으킬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머니, 솔직히 말해 주세요.”
그런 어머니의 기색에 아테니아의 표정은 올 때보다 더더욱 굳어 버렸다.
아테니아는 자신의 어머니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테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취조하는 듯한 어조가 되고 말았다.
“지난 새벽에 클라이브가 무언갈 요청하지 않았나요?”
클라이브가 유치장을 쉽게 나올 방법.
아테니아가 생각 끝에 낸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의 친정에서 내 준 탄원서.
클라이브가 크리스나 백작가에 연락을 취했고, 아테니아의 부모가 탄원서를 내 주었다면… 그의 빠른 복귀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폭력 같은 비교적 낮은 죄질의 죄부터, 하물며 살인 사건조차 가해자를 위한 피해자 측의 탄원서가 있다면 형량이 줄어들 수 있었다.
그런 판에 겨우 불륜쯤이야, 얼마든지 없던 일로 칠 수 있을 터였다.
사실 귀족 사회에서 정부를 들이는 일쯤이야 아주 드문 일도 아니니까.
비록 그게 아테니아에게는 미쳐 버릴 만큼 끔찍한 일이었지만.
“…그, 그게.”
어머니가 말을 더듬자, 아테니아는 제 드레스 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탄원서를 써 준 게 어머니일까?
그 의심 하나가 아테니아의 머릿속을 달궈 놓았다.
“…설마, 어머니가 그러신 건 아니죠.”
아테니아는 간절했다.
그녀는 어머니만큼은 아니기를 바랐다.
“너희 아버지가, 네 남편이 유치장에 있다면서 빼내 줘야 한다고 하셔서….”
어머니의 말끝이 한없이 늘어났다.
시선은 차마 제 딸을 마주하지 못한 채였다.
“엄마!!!”
그러나 아테니아의 눈에 그런 어머니의 머뭇거림이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녀는 배신감에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여자인 엄마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아테니아는 허리를 굽혀 가며 악을 질렀다.
그녀의 부모가 탄원서를 낸 덕에 클라이브는 형사적으로 고발당하는 일 없이 무죄가 되었다.
같은 죄는 두 번 묻지 않는다는 법정의 원칙에 따라, 이제 클라이브를 불륜으로 감옥에 집어넣는 건 요원하게 되어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아테니아의 부모가 일을 이렇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나, 그놈이랑 그 여자가 서로 붙어먹는 걸 봤다고요!”
아테니아는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알 수 없었다.
정말이지 모르겠다.
이게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이었던지.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부모가 그 딸에게.
“심지어 나를 깎아내리며 깔깔거리는데, 내가 그걸 내 두 눈으로 봤는데, 나보고 지금, 이 끔찍한 걸 견디고, 당신들의 영달을 위해…!”
가부장적인 아버지, 마냥 순종적인 어머니.
그게 약간의 흠이긴 하지만 그것 외에는 대체로 평화로운 행복한 가족.
그래, 이만하면 그래도 썩 괜찮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가족.
아테니아는 자신의 가족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믿던 게 깨져 버렸을 때, 사실은 자신이 괜찮다고 여겼던 게 그렇지 않았음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좌절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모가 되어서 꼭 날 이렇게 불행하게 만드셔야 만족하시겠어요?!”
어쩌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강요에 의해서 탄원서를 써 주었을지도 몰랐다.
몇십 년을 평생 살면서, 강압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사이의 균형이란 그런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자식이 부모에게 가지는 최소한의 기대치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부모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 주리라는 혹은… 부모라면 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는.
그런 미약하고 작은 기대.
“지금 네 어머니한테 뭐 하는 버릇이야!!!”
그때, 절규하던 아테니아를 향해 커다란 호통이 들려왔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그녀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은 부인에게 강압적으로 굴어도 어쨌든 부인을 사랑했으므로, 크리스나 백작 부인에게 누군가 막 대하는 것 같으면 두고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화난 얼굴로 성큼성큼 2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왔다.
크리스나 백작이 이전에 아테니아가 이혼한다고 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제 딸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커다란 분노였다.
그러나 그녀가 제 아버지에게서 빼다 박은 것이 있다면 대체로 누군가에게도 쉬이 기 죽는 법이 없는 그 호전적인 기질이었다.
“아버지야말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거예요…! 이딴 방식으로 딸을 팔아서라도 가문의 이익을 챙기고 싶으세요?!”
아테니아의 어깨와 가슴이 분노로 인해 들썩거렸다.
지금 감히 누가 그녀의 앞에서 당당하게 말을 꺼낸단 말인가!
그러나 크리스나 백작은 자신에게 대드는 사람은 더더욱 참지 않았다.
철썩.
사나운 마찰음과 함께 아테니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돌아간 고개를 원위치시켜 앞을 바라보았다.